플라테로와 나 을유세계문학전집 59
후안 라몬 히메네스 지음, 박채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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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LIII. 우정

 

우리는 너무 잘 안다. 나는 그를 자기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 두지만 그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간다.

왕관 소나무가 있는 곳에 가면 내가 그 나무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그 거대하고 빛나는 나무 꼭대기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플라테로는 잘 알고 있다. 또한 내가 잔디 사이로 나 있는 오래된 우물로 가는 오솔길을 좋아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키 큰 소나무 언덕에서 추억에 젖어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축제라는 것도 안다. 내가 플라테로 등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 보면 늘 내가 좋아하는 경치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나는 플라테로를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 길이 좀 험하거나 짐이 무겁다 싶으면 내려서 같이 들어주곤 한다. 뽀뽀해 주고 놀리기도 하고 화나게 만들기도 한다. 플라테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삐치지는 않는다. 플라테로는 나와 똑같고 다른 당나귀들과 다르다. 내 생각에 우리는 꿈도 함께 꾸는 것 같다.

플라테로는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군다. 불평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플라테로의 행복이라는 것을 안다. 플라테로는 당나귀들과 사람들을 피해 내게 온다.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박채연 옮김, 을유문화사, 2013, 93-94면)

 

“모이노가 까무잡잡한 나귀이며 까노가 하얀색의 나귀이듯 플라테로는 은빛 나귀의 일반적인 지칭입니다. ‘나’의 플라테로는 한 마리 나귀가 아니고 내가 함께 했던 플라테로인 많은 젊은 수컷 나귀들입니다.

《플라테로와 나》에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나’의 고향 안달루시아 지방 모게르를 배경으로 한 이런저런 관계들, 세상의 변천, 내면의 풍경, 자연의 풍경이 서정적 산문시로 때로는 기쁨에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때로는 아픔에 눈물이 쏟아지도록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우정〉은 서로를 진정으로 잘 알며 어떤 경우에도 서로를 믿는 플라테로와 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나’는 플라테로와 함께 있을 때 플라테로를 내 몸의 일부인양 잊을 정도입니다. ‘나’와 플라테로는 ‘나’와 ‘너’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인 셈입니다.

 

2013년 12월말 대한민국에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는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는 간 데 없이, 세상이 너와 나, 내 편 아니면 적으로 갈라지도록 모르는 척 지나친 당나귀보다 훨씬 미련하고 천박한, 나를 포함한 인간들 때문입니다.”

 

[더 읽기]

 

후안 라몬 히메네스(1881-1958)는 스페인 20세기 시인의 한 사람으로 195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산문시집 《플라테로와 나》는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산문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산문시들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고 아픈 구석도 있지만 모두가 찬란하도록 아름답고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밝은 빛이 감싸고 있습니다.

 

시인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그의 산문시 두 편을 더 소개합니다.

 

LXI. 엄마 개

 

내가 이야기한 그 암캐는 사냥꾼인 로바토의 개야. 너는 그 개를 잘 알겠지. 왜냐하면 우리가 야노스 거리를 지날 때마다 그 개와 잘 마주쳤잖아. 기억나지? 5월 석양의 구름처럼 황금빛과 흰색 털이 섞여 있던 그 개 말이야. 그 개가 새끼를 네 마리 낳았어. 그런데 우유 배달 아줌마 살룻이 그 새끼들을 마드레스 거리의 자기 오두막으로 데려갔대. 왜냐하면 자기 꼬마가 아팠는데 돈 루이스 강아지 수프를 먹여야 한다고 그랬대나? 플라테로야, 너는 로바토의 집과 마드레스 다리 사이에 타블라스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거야.

사람들이 말하기를 로바토의 개는 그날 하루 종일 마치 미친개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도로를 기웃거리고, 흙담을 기어오르고, 지나가는 사람들 냄새를 맡는 등 안절부절 못했다는구나. 사람들은 저녁기도 시간까지도 그 개가 오르노스 거리의 감시인 집 곁에 놓인 석탄 자루 위에서 석양을 보며 슬프게 울부짖는 걸 보았대.

너는 엔메디오 거리에서부터 타블라스 거리까지 얼마나 먼지 알지? 그 개는 그날 밤새도록 네 번이나 그 길을 왔다 갔다 했다는구나. 그리고 한 번 올 때마다 입에는 새끼 한 마리씩을 물고 왔다고 해. 날이 밝아 로바토가 문을 열자 엄마 개는 문지방에서 잔뜩 불은 붉은 색 젖꼭지를 물고 있는 새끼들을 꼭 품고서 행복하게 자기 주인을 바라보았다는구나.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박채연 옮김, 을유문화사, 2013, 127-28면)

 

배달 아줌마 살룻의 자식을 위한 지극정성을 이해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남의 새끼를 삶아서야 되겠습니까. 흰 털이 섞인 황금빛 개에게는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밤새도록 새끼를 입에 물고 엔메디오에서 타블라스까지의 먼 길을 네 번씩이나 오가는 개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문지방에서 잔뜩 불은 붉은 색 젖꼭지를 물고 있는 새끼들을 꼭 품고서 행복하게 자기 주인을 바라보”는 모습도.

 

LXII. 그 여자와 우리들

 

플라테로야, 아마 그 여자는 가고 있을 거야. 어디로 가냐고? 그 까맣고 외로운 고속열차를 타고 흰 구름 사이를 뚫고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겠지.

나는 너와 함께 아래쪽 노랗게 익어 춤추는 밀밭 사이에 있었어. 그 사이사이에는 7월이 이미 잿빛 왕관을 씌워 준 양귀비가 피 흘리듯 군데군데 피어 있었지. 그리고 기차 연기 같은 흰 구름은 정처 없이 흘러 다니며 간혹 햇빛과 꽃들을 가리곤 했어. 기억나니?

그때 작은 금발 머리에 검은 베일을 쓴 여자를 보았지! 그녀는 마치 사진틀 같은 차창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초상화 같았어.

어쩌면 그 여자는 “저 상복을 입은 사내아이와 은색 당나귀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누구겠어! 우리지......그렇지, 플라테로?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박채연 옮김, 을유문화사, 2013, 129면)

 

도시적 이미지와 전원적 풍경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녹여낸 시입니다.

 

‘금발’ 머리와 ‘검은’ 베일 / ‘은색’의 플라테로와 ‘검은’ 상복의 나. 색의 배합이 자연스레 ‘한 여자’와 ‘플라테로와 나’를 등치 시켜 ‘플라테로와 나’를 둘이 아닌 하나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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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아침
프랑크 파블로프 글, 레오니트 시멜코프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휴먼어린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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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오늘 아침, 〈갈색 라디오〉에서 그 소식이 흘러나왔습니다.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붙잡혀 갔대요. 틀림없이 샤를리도 그 안에 있을 거예요. 사람들을 잡아간 이유는 최근에 갈색 동물로 바꾸었어도 마음까지 변한 건 아니기 때문이래요. 라디오 아나운서는 “갈색이 아닌 개나 고양이를 기른 적이 있으면, 그게 예전이었다 해도 법을 어긴 것입니다.”라고 말했어요. 심지어 ‘국가 반역죄’를 들먹였어요. 그 다음 내용은 더 끔찍했어요. 설령 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부모, 형제, 친척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갈색이 아닌 다른 색의 동물을 기른 적이 있다면 가족 모두 함께 벌을 받게 된대요. 정말 너무 해요.

세상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요. 갈색 고양이를 키우기만 하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하지만 저들이 예전에 키우던 동물의 색까지도 문제 삼기로 한 이상, 나와 같은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기 전에는 이 짓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밤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리석었어요. 그들이 처음 갈색 법을 만들었을 때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눈치 챘어야 해요. 우리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법을 따르기만 했어요. 그때 그들에게 맞서야 했어요. 하지만 어떻게요.? 모든 것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데......해야 할 일도 많고, 걱정거리도 산더미 같은데......나만 침묵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조용히 살겠다고 그저 보기만 하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프랑크 파블로프, 《갈색 아침》, 레오니트 시멜코프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휴먼어린이, 2013, 32-35면)

 

[북 리뷰]

 

처음에는 고양이가 다음에는 개가 너무 많아 갈색이 아닌 개와 고양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법이 생깁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법을 비판하던 《거리일보》가 폐간되더니 결국 정부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기사를 싣는 신문은 모두 폐간되고 정부 어용지나 다름없는 《갈색신문》만 남습니다. 나는 좀 가슴이 답답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 갈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책을 내는 출판사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세상에는 온통 ‘갈색’만 남습니다. 갈색 커피, 갈색 사랑, 갈색 생각, 갈색 남자, 갈색 결혼, 갈색 이혼, 갈색 토마토, 갈색 배, 갈색 빨강, 갈색 까망, 갈색 하양. 모든 사람들은 이제 갈색이 아닌 것은 갖지도 쓰지도 먹지도 아마도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갈색 개를, 갈색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도 체포되기 시작합니다.

 

[이 한 대목] 전까지의 이 짦은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갈색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전에 갈색이 아닌 것을 가졌었다는, 먹었다는, 썼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이 한 대목] 의 다음,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습니다.

 

“아아,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누굴까요.? 무서워요.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세상이 온통 갈색이에요.

쾅쾅! 쾅쾅!

알았어요. 그만 두드리세요. 나가요. 나간다니까요......”

 

프랑크 파블로프Franck Pavloff의《갈색 아침》은 시집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쉔Cheyne 출판사에서 1998년 12월에 출판된, 책 전체가 12면짜리 짧은 우화소설입니다. 책 제목 《갈색 아침Matin Brun》의 ‘갈색’은 대번에〈갈색 제복Chemises brunes〉,나치스의 돌격대Sturm Abteilung (S.A.) 갈색 셔츠 당원을 연상케 합니다.

2002년 불란서 대통령 선거 때의 일. 현직 대통령인 우파의 자크 시락과 현직 국무총리인 좌파의 리오넬 조스팽이 2차 결선투표에 올라갈 것을 전 세계의 누구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차 투표결과는 조스팽이 탈락하고 근소한 차이로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즘 옹호자인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 펜이 자크 시락과 함께 결선투표에 올랐습니다. 일요일인 1차 투표 날 조스팽의 지지자들인 젊은이들이 조스팽의 1차 투표 통과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나 하나쯤 선거에 불참한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겠나 하며 놀러 가버린 것입니다. 프랑크 파블로프는 이런 사소한 실수들, 그러나 결과는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을 나아가서 사회와 나라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들을 〈사소한 비양심적인 타협 행위들petites compromissions〉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1차 투표 후 누군가가 방송에서 이 책을 소개했는데 삽시간에 불티나게 팔려나가 단시일에 밀리언셀러가 됐습니다. 결선투표에서는 좌파 사회당이 우파 자크 시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고 우파 자크 시락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갈색 아침》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른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 한 가지 생각만 통하는 세상, 갖가지 검열을 통해 집권자에게 불리한 정보가 통제된 사회, 개인의 선택이 제한된, 개인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는 이 책에서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는 바는 앞에서 말한 〈사소한 비양심적인 타협 행위들〉에 대한 경고일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불행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귀찮게 여겨 모르는 척 넘어가는 일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저지릅니다. 다른 사람의 ‘사소한’ 불행이 실은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불행일 수 있는데 그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내 ‘치명적인’ 불행을 다른 사람들이 ‘사소한’ 불행으로 여겨 모르는 척 넘어가, 내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불어판 원저작에는 삽화가 없습니다. 한국어판에 있는 삽화는 러시아어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12면 책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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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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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인민〉은 이제 〈우두머리〉도 〈법〉도 갖지 못하고 오직 〈폭군〉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이 순간부터 괴물은 풍습과 미덕을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정직한 것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cui ex honesto nulla est spes 〈전제군주제〉가 지배하는 어디에서나 괴물은 다른 어떤 주인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괴물이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청렴함이나 의무는 없어지고, 가장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여기가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순환〉을 끝내고 당초 우리가 출발했던 그 지점에 가 닿는 종극점終極點이다. 모든 개인들이 다시 평등해지는 것은 여기에서인데,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신민〉들은 〈주인〉의 의지 외에는 다른 〈법〉을 갖지 않고, 〈주인〉은 자기의 정념 외에는 다른 규범을 갖지 않아 선의 관념과 정의의 원리가 또다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최강자의 단 하나의 〈법〉으로 그리고 결국 우리가 시작했던 〈자연상태〉와는 다른 새로운 〈자연상태〉로 귀결되는 것이 바로 여기서인데 전자는 순수한 〈자연상태〉이나 후자는 지나친 부패의 열매라는 점에서 다르다. 게다가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데 〈정부의 계약〉은 〈전제군주제〉에 의해 그토록 파기되어 〈전제군주〉는 최강자인 동안만 〈주인〉이다. 사람들이 그를 쫓아내게 되면 그는 결코 그 폭력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군주〉를 목 졸라 죽이거나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끝나는 폭동도, 그 전날 그가 〈신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법률적 행위이다. 폭력만이 그를 지탱했고 폭력만이 그를 거꾸러뜨린다. 모든 게 이처럼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뤄진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3, 135-137면. 번역은 부분수정)

 

●●●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최초의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포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까?” 〈소유의 개념〉이 인류를 불행에 빠트린 것으로 진단한 이 유명한 대목으로 시작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제2부〉는 결국 새로운 사회를 향한 혁명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위의 [이 한 대목]으로 끝납니다.

 

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1970년대 초반 읽었는데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의 안쪽에 이 책이, 특히 이 대목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3년 가을 내내 루소의 이 책을 뒤적거리고 있습니다. 1755년 발표됐으니 250년을 훌쩍 넘긴 작품이고 주장입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아이가 노인을 부리고 바보가 현자를 이끌며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 넘쳐나는 것은 분명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 문명사회란 정치사회이고 정치사회는 계약사회입니다. 계약이 파기된 사회는 변형된 - 부패한 - 지연상태일 뿐입니다. 공정한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는 이 상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루소에 따르면 지배자의 논리에 따라 제도가 생겨난 문명사회는 필연적으로 이 지점에 오게 되는데 이는 불평등에 기인한 문명사회의 모든 법의 특성이 ‘제도/체제 수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 ‘법’으로 개선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데에 루소는 부정적입니다. 백과전서파encyclopédiste와 루소가 다른 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백과전서파 사상가들은 개선하고 보수하기를 원했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사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변혁과 개조를 거의 꿈꾸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파렴치한 악폐들이 교정되는 것을 보는 것, 더 나은 정치적 상황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에른스트 카시러) 그들은 개량주의자입니다. 기존의 제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점진적 개선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루소는 개량주의의 기만성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유럽 사회를 윤리의식과 문화현상이 유리된 사회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예절은 노상 요구하고 명령한다......이젠 감히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도 못한다. 이런 끊임없는 강제 속에서는 사회라 불리는 무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환경에 놓이면 더욱 강력한 동기가 그들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지 않는 한 다 똑같은 짓을 하게 돼있다.”(《학문예술론》) 해결책은 혁명뿐입니다. 이 ‘동기’가 기왕의 제도, 즉 파기된 제도로서의 폭력만이 지탱해주는 사회의 보존욕구를 무력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어야 하는데 루소는 새로운 폭력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폭력은 ‘자연의 장애물’처럼 그 자체가 다음 사회의 생존방식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장애물’의 한 도구일 것입니다(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어쨌든 폭력은 본질적으로 합목적적이지는 못합니다. 도구적입니다). 이 폭력을 폭력이라는 이유로 기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는 인간의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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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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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우리[동양인]의 공상에는 늘 칠흑의 어둠이 있는데, 그들[서양인]은 유령조차 유리처럼 맑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 밖의 일상생활의 모든 공예품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색이, 어둠이 퇴적한 것이라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태양광선이 서로 겹친 색깔이다. 은그릇이나 놋쇠그릇에서도 우리들은 녹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라고 하여 반짝반짝 닦는다. 방 안도 가능한 한 구석을 만들지 않도록 천장이나 주위를 새하얗게 한다. 정원을 만드는 데도 우리가 나무를 심으면 그들은 평평한 잔디밭을 넓힌다. 이와 같은 기호의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생각건대 동양인은 자기가 처한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고, 현상을 감내하려는 버릇이 있어서, 어둡다고 하는 것에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단념해 버려, 광선이 없으면 없는 대로 도리어 그 어둠에 침잠하고, 그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런데 진취적인 서양인은 평소보다 좋은 상태를 바란다. 촛불에서 램프로, 램프에서 가스등으로, 가스등에서 전등으로 끊임없이 밝음을 추구하고, 자그마한 그늘이라도 없애나가려고 고심을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늘에 대하여》, 고운기 옮김, 눌와, 2005, 51-52면)

 

[북 리뷰]

 

십년은 족히 넘었을 어느 해 어디선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의 〈음예예찬陰翳禮讚〉이란 산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고운기)을 뜻하는 ‘음예’라는 단어에 솔깃해 일본문학을 전공한 황소연(강원대학교 일본학과)교수에게 물었더니 다음 날 《음예공간예찬》(김지견 옮김, 발언, 1996)을 보내왔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더란 메모와 함께. 밝음과 광택, 깨끗함, 열기에 열광하는 시대가 도래하던 때(이 산문은 1933년에 발표됐습니다) 어둠과 그늘, 반들거리는 때의 윤기, 서늘함을 예찬하는 다니자키의 글은 내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도록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니자키를 다시 만난 것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떠도는 그림자들Les Ombres errantes》(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에서였습니다. 키냐르는 2002년 프랑스 공쿠르 상 수상작인 이 소설의 〈제15장 그림자〉8면을 통째로 다니자키의 이 산문에 할애했습니다.

 

“거짓말과 변모變貌는 현실 세계, 사물들의 상태, 인신 매매, 동물 매매, 언어의 명령, 집단의 작동 안에서 이뤄지는 역할의 횡포와 맞서 끝없는 투쟁을 벌인다. 다니자키는 밤이라는, 개인이 활동하는 자리가, 동쪽 태양의 나라의 질서의 반대편 극에 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Grasset판본, 50면/송경의 번역본, 61-62면)

 

이 산문의 핵심을 잘 짚은 키냐르의 글을 읽으며 일본의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현존 작가도 아닌 20세기 전반기의 작가를 그가 어떻게 알까 궁금해 불란서의 아마존을 찾아보니 불란서에서는 다니자키의 작품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이, 단행본은 물론 플레이야드 판 전집까지 2권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나는 시골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장 관사(사택) 세 곳을 옮겨 다니며 보냈습니다. 두 군데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습니다. 방이 세 개인 왜식 가옥들이었는데 두 곳은 방 하나 씩이 다다미방이었습니다. 목조건물로 마당을 들어서면 봉당이나 토방이 있으며 마루를 올라 안방이나 건넛방으로 가는 한옥 구조와는 달리 건물 가운데에 있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편에 신발장이 있으며 마루를 올라 한쪽은 윗방, 다른 쪽은 건넛방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습니다. 집 한편 끝에 있는 한쪽짜리 문을 열면 부엌이고 그곳과 이어져있는 공간이 안방입니다. 뒷간, 목욕탕 모두 집안에 있었습니다. 창문들은 방들의 벽에 우선 창호지 미닫이문이고, 폭이 아이 하나쯤은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바깥쪽으로 내밀게 만들어 거기에 우유 빛 유리 여닫이문을 덧문으로 달았습니다. 햇빛이 방 깊숙이 들어올 수 없었지요. 복도, 목욕탕, 뒷간은 모두 짙은 밤색이 주된 색깔이었습니다. 어두운 안쪽으로 스며들어 혼자 노는 다락이나 벽장, 광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집 자체가〈깊은 공간〉이었던 풍경이 생생합니다. 이 ‘깊이’는 광선光線에 내부를 홀랑 내보이지 않는 집의 구조 때문에 집안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그늘, 응달과 관계가 있었던 듯합니다.

 

키냐르를 통해 다시 만난 다니자키가 반가웠습니다. 전자서점을 검색하니 《음예예찬》이 새롭게 번역돼 있었습니다(《그늘에 대하여》, 고운기 옮김, 눌와, 2005). 60면에 지나지 않는 ‘그늘’에 대한 이 산문을 다시 읽는 시간은 최근 손에 잡았던 몇 편의 장편소설들을 읽는 시간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운 존재를 만나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휘황찬란할 정도의 밝기에 익숙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존재란 우선 대명천지에 샅샅이 까발리고 들춰보아 추한 부분을 갖지 않은 존재라는 조건이 전제돼야합니다만 그늘의 미학을 아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존재란 아름다운 부분만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한 부분을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촛불이나 칸델라로 비춘 여인의 아름다움을 즐기면 되는 것이지 그림자조차 몽땅 삼키는 현대적 조명 아래 그 여인을 세워놓고 추한 부분을 찾아낼 필요가 어디 있냐는 것이지요.

 

“옛날 일본 여인의 전형적인 나체상[은] 종이처럼 얇은 유방이 붙은, 판자처럼 납작한 가슴, 그 가슴보다도 한층 작게 잘록한 배, 어떤 요철도 없는, 곧바른 등줄기와 허리와 엉덩이 선, 그런 몸 전체가 얼굴이나 손발에 견주면 불균형하게 가늘어서 두께가 없고, 육체라고 하기보다 꼿꼿한 막대기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옛날 여인의 몸통은 대체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나는 그것을 보면 인형의 뼈대를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몸통은 의상을 입히기 위한 뼈대이고, 그 이외의 어떤 물건도 아니다......그렇지만 옛날에는 그것으로 되었던 거다, 어둠 속에 사는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희읍스름한[깨끗하지는 않고 조금 희다] 얼굴 하나만 있으면, 신체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명랑한 현대 여성의 몸매를 칭송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여자의 망령 같은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은 어려우리라. 또 어떤 이는, 어두운 광선으로 치장된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우리 동양인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그늘을 만들기 시작하고 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긁어모아 묶으면 잡목의 암자가 되고, 풀어놓으면 원래의 들판이 되었구나’라는 옛 노래가 있는데, 아무튼 우리의 사색법은 그런 식이므로, 미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고 생각한다......과연 저 균형 잃은 신체는 서양 부인의 신체에 비해 추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한다.”(고운기 번역본, 49-50면)

 

다니자키는 이 짧은 글에서 동서양의 건축, 만년필과 붓, 동양의 뒷간, 칠기와 도기 등을 ‘그늘의 미학’과 연관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번역본에는 〈게으름을 말한다〉,〈연애와 색정〉,〈손님을 싫어함〉,〈여행〉,〈뒷간〉등 다른 산문들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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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시를 줍다 - 양성우 시화집
양성우 시, 강연균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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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랑에게

 

우연이라도 너를 만나야겠다.

무척 오랜 뒤에도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만나서 두 팔로 너를 힘껏 껴안고 싶다.

그때는 네가 귀 기울여 듣고자 해도

내 입으로는 한마디 말하지 않으리.

내가 어찌 마음의 어둔 길을 걸었는지를.

그래도 내 안에 가득히 설움이 차오르면

눈물 대신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야지.

너는 내 영혼의 변하지 않는 긴 그림자.

너와 나의 하루가 아무리 고단해도

사랑만 있으면 사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곳에서라도 몹시 그리운 너를 만나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6면)

 

“이런저런 기로에 서면 ‘그’는 어느 길을 선택할까 짐작해봤습니다. 이해관계에 빠져 허우적댈 때는 ‘그’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잘 살아온 구석이 조금은 있다면 ‘그’가 잘 이끌어준 덕분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를 만나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고 믿었는데, 삶이라는 게 ‘살아갈 나날’이 아니라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조바심이 엄습했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복받치기도 했지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깊이 묻었다 들어 두리번거리니 굳이 말을 건네거나 나누지 않아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멀리서라도 그윽이, 하염없이 바라볼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 년 전부터 잊은 적이 없는, 천 년 후에도 잊을 리 없는 그의 이름은 〈옛사랑〉입니다.”

[더 읽기]

 

2007년 〈랜덤하우스코리아〉의 시화집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된 《길에서 시를 줍다》는 그 시리즈의 다른 시집들과는 달리 품절되지 않고 아직은 살아있는 시집입니다. 김남조, 도종환, 정호승 등 다른 시인들은 ‘시선집’을 냈는데 양성우 시인은 ‘신작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시집은 이전에 낸 시집들과는 달리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옛사랑에게〉,

“우연이라도 너를 만나야겠다”로 시작해 “어느 곳에서라도 몹시 그리운 너를 만나/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로 끝나는 이 시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시작과 끝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그리움’에 대한 시인의 반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리움’을 이 시의 처음과 끝에서 〈만나다〉(‘만나야겠다’, ‘만나’)로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우연이든 고의든 어쨌든 만나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지만, 마지막에서는 만나겠다는 의지는 약해지고 만나고 싶다는 희망사항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만남의 구체적인 방식도 〈바라보다〉로 물러섭니다.

첫 행의 ‘만나야겠다’가 아직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움’을 만나는 방식이라면 마지막 행, ‘바라보고 싶다’로 바뀐 〈만남의 풍경〉은 ‘여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움’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첫 행 이전에 생략된 부분은 둘째 행에서 마지막 두 행 사이를 채우고 있는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일 겁니다. 어떻게든 만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느냐,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내 삶은 내내 폐허였다, 보상하라 등등. ‘옛사랑’에게 자기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확인시키는 허망한 일로 밤을 지새우겠지요.

 

‘여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인 첫 행 다음의 풍경은, 시행을 따라 읽으면 이렇습니다. 평생을 잊지 못하지만 단지 한 번 껴안아 봤으면 좋겠다(이뤄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살았느냐 묻는다 해도 입을 열지 않겠다, 쏟아져 나올 말들은 온통 ‘그리움’일 테니까, 힘들 게 살았다 복받친다고 왜 그걸 그대에게 이야기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겠느냐, 그냥 웃을 뿐. 그리고 바라볼 뿐.

 

첫사랑, 그대를 향한 사랑, ‘그리움’과 ‘서러움’이 다이지만, 그 ‘그리움’과 ‘서러움’ 덕분에 내가 잘 살아왔음을 시인/화자는 깨달은 모양입니다. 60대 중반에.

 

〈겨울공화국〉이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으로 양성우 시인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옛사랑에게〉는 의외일 수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의 맥락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달관까지 내닫지는 않았어도 벼린 맛은 한결 덜합니다.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 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겨울공화국〉 마지막 부분)

 

뭉클하게, 뭉툭하게 후비는, 1980년대의 그의 시집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이런 시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인의 이런 변화, ‘있어야 함’ 쪽에서 ‘있음’ 쪽으로 더 가깝게 자리를 옮긴 게 세상을 보는 그의 눈길이 달라져서는 아닙니다. 그의 시에서 차지하는 ‘그리움’의 크기가 커졌고 시인이 ‘벼린 맛’ 뒤에 숨겨 놓았던 ‘따뜻함’을 편하게 겉으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겨울공화국〉의 시혼이 세월을 지나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는지는 다음 차례입니다.

 

다음 두 시는 이 시집에서 일부러 뽑은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시입니다만 이 시 들도 남녀 간의 사랑의 맥락에 갇혀있지는 않습니다. 해설은 군더더기일 뿐이겠습니다.

행복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을지라도

티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다가 죽어서 전설이 되는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언제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은.

오늘은 두꺼운 얼음 위에 맨살로 누워도

사랑을 찾아서 어디론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0면)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시작과 끝이 없는 것.

네 안에서 고스란히 영혼을 태운 뒤에는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로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도

뜨거운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어느 날 아침 내 몸이 안개처럼 흩어져버릴지라도

뜨겁고 붉은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그래도 너와 나의 운명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니.

언젠가는 아득히 홀로 가는 먼 길을 어찌하리.

사랑한다는 아픔이여.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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