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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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우리[동양인]의 공상에는 늘 칠흑의 어둠이 있는데, 그들[서양인]은 유령조차 유리처럼 맑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 밖의 일상생활의 모든 공예품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색이, 어둠이 퇴적한 것이라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태양광선이 서로 겹친 색깔이다. 은그릇이나 놋쇠그릇에서도 우리들은 녹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라고 하여 반짝반짝 닦는다. 방 안도 가능한 한 구석을 만들지 않도록 천장이나 주위를 새하얗게 한다. 정원을 만드는 데도 우리가 나무를 심으면 그들은 평평한 잔디밭을 넓힌다. 이와 같은 기호의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생각건대 동양인은 자기가 처한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고, 현상을 감내하려는 버릇이 있어서, 어둡다고 하는 것에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단념해 버려, 광선이 없으면 없는 대로 도리어 그 어둠에 침잠하고, 그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런데 진취적인 서양인은 평소보다 좋은 상태를 바란다. 촛불에서 램프로, 램프에서 가스등으로, 가스등에서 전등으로 끊임없이 밝음을 추구하고, 자그마한 그늘이라도 없애나가려고 고심을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늘에 대하여》, 고운기 옮김, 눌와, 2005, 51-52면)

 

[북 리뷰]

 

십년은 족히 넘었을 어느 해 어디선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의 〈음예예찬陰翳禮讚〉이란 산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고운기)을 뜻하는 ‘음예’라는 단어에 솔깃해 일본문학을 전공한 황소연(강원대학교 일본학과)교수에게 물었더니 다음 날 《음예공간예찬》(김지견 옮김, 발언, 1996)을 보내왔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더란 메모와 함께. 밝음과 광택, 깨끗함, 열기에 열광하는 시대가 도래하던 때(이 산문은 1933년에 발표됐습니다) 어둠과 그늘, 반들거리는 때의 윤기, 서늘함을 예찬하는 다니자키의 글은 내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도록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니자키를 다시 만난 것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떠도는 그림자들Les Ombres errantes》(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에서였습니다. 키냐르는 2002년 프랑스 공쿠르 상 수상작인 이 소설의 〈제15장 그림자〉8면을 통째로 다니자키의 이 산문에 할애했습니다.

 

“거짓말과 변모變貌는 현실 세계, 사물들의 상태, 인신 매매, 동물 매매, 언어의 명령, 집단의 작동 안에서 이뤄지는 역할의 횡포와 맞서 끝없는 투쟁을 벌인다. 다니자키는 밤이라는, 개인이 활동하는 자리가, 동쪽 태양의 나라의 질서의 반대편 극에 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Grasset판본, 50면/송경의 번역본, 61-62면)

 

이 산문의 핵심을 잘 짚은 키냐르의 글을 읽으며 일본의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현존 작가도 아닌 20세기 전반기의 작가를 그가 어떻게 알까 궁금해 불란서의 아마존을 찾아보니 불란서에서는 다니자키의 작품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이, 단행본은 물론 플레이야드 판 전집까지 2권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나는 시골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장 관사(사택) 세 곳을 옮겨 다니며 보냈습니다. 두 군데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습니다. 방이 세 개인 왜식 가옥들이었는데 두 곳은 방 하나 씩이 다다미방이었습니다. 목조건물로 마당을 들어서면 봉당이나 토방이 있으며 마루를 올라 안방이나 건넛방으로 가는 한옥 구조와는 달리 건물 가운데에 있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편에 신발장이 있으며 마루를 올라 한쪽은 윗방, 다른 쪽은 건넛방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습니다. 집 한편 끝에 있는 한쪽짜리 문을 열면 부엌이고 그곳과 이어져있는 공간이 안방입니다. 뒷간, 목욕탕 모두 집안에 있었습니다. 창문들은 방들의 벽에 우선 창호지 미닫이문이고, 폭이 아이 하나쯤은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바깥쪽으로 내밀게 만들어 거기에 우유 빛 유리 여닫이문을 덧문으로 달았습니다. 햇빛이 방 깊숙이 들어올 수 없었지요. 복도, 목욕탕, 뒷간은 모두 짙은 밤색이 주된 색깔이었습니다. 어두운 안쪽으로 스며들어 혼자 노는 다락이나 벽장, 광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집 자체가〈깊은 공간〉이었던 풍경이 생생합니다. 이 ‘깊이’는 광선光線에 내부를 홀랑 내보이지 않는 집의 구조 때문에 집안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그늘, 응달과 관계가 있었던 듯합니다.

 

키냐르를 통해 다시 만난 다니자키가 반가웠습니다. 전자서점을 검색하니 《음예예찬》이 새롭게 번역돼 있었습니다(《그늘에 대하여》, 고운기 옮김, 눌와, 2005). 60면에 지나지 않는 ‘그늘’에 대한 이 산문을 다시 읽는 시간은 최근 손에 잡았던 몇 편의 장편소설들을 읽는 시간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운 존재를 만나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휘황찬란할 정도의 밝기에 익숙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존재란 우선 대명천지에 샅샅이 까발리고 들춰보아 추한 부분을 갖지 않은 존재라는 조건이 전제돼야합니다만 그늘의 미학을 아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존재란 아름다운 부분만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한 부분을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촛불이나 칸델라로 비춘 여인의 아름다움을 즐기면 되는 것이지 그림자조차 몽땅 삼키는 현대적 조명 아래 그 여인을 세워놓고 추한 부분을 찾아낼 필요가 어디 있냐는 것이지요.

 

“옛날 일본 여인의 전형적인 나체상[은] 종이처럼 얇은 유방이 붙은, 판자처럼 납작한 가슴, 그 가슴보다도 한층 작게 잘록한 배, 어떤 요철도 없는, 곧바른 등줄기와 허리와 엉덩이 선, 그런 몸 전체가 얼굴이나 손발에 견주면 불균형하게 가늘어서 두께가 없고, 육체라고 하기보다 꼿꼿한 막대기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옛날 여인의 몸통은 대체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나는 그것을 보면 인형의 뼈대를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몸통은 의상을 입히기 위한 뼈대이고, 그 이외의 어떤 물건도 아니다......그렇지만 옛날에는 그것으로 되었던 거다, 어둠 속에 사는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희읍스름한[깨끗하지는 않고 조금 희다] 얼굴 하나만 있으면, 신체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명랑한 현대 여성의 몸매를 칭송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여자의 망령 같은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은 어려우리라. 또 어떤 이는, 어두운 광선으로 치장된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우리 동양인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그늘을 만들기 시작하고 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긁어모아 묶으면 잡목의 암자가 되고, 풀어놓으면 원래의 들판이 되었구나’라는 옛 노래가 있는데, 아무튼 우리의 사색법은 그런 식이므로, 미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고 생각한다......과연 저 균형 잃은 신체는 서양 부인의 신체에 비해 추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한다.”(고운기 번역본, 49-50면)

 

다니자키는 이 짧은 글에서 동서양의 건축, 만년필과 붓, 동양의 뒷간, 칠기와 도기 등을 ‘그늘의 미학’과 연관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번역본에는 〈게으름을 말한다〉,〈연애와 색정〉,〈손님을 싫어함〉,〈여행〉,〈뒷간〉등 다른 산문들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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