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한 대목]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인민〉은 이제 〈우두머리〉도 〈법〉도 갖지 못하고 오직 〈폭군〉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이 순간부터 괴물은 풍습과 미덕을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정직한 것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cui ex honesto nulla est spes 〈전제군주제〉가 지배하는 어디에서나 괴물은 다른 어떤 주인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괴물이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청렴함이나 의무는 없어지고, 가장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여기가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순환〉을 끝내고 당초 우리가 출발했던 그 지점에 가 닿는 종극점終極點이다. 모든 개인들이 다시 평등해지는 것은 여기에서인데,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신민〉들은 〈주인〉의 의지 외에는 다른 〈법〉을 갖지 않고, 〈주인〉은 자기의 정념 외에는 다른 규범을 갖지 않아 선의 관념과 정의의 원리가 또다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최강자의 단 하나의 〈법〉으로 그리고 결국 우리가 시작했던 〈자연상태〉와는 다른 새로운 〈자연상태〉로 귀결되는 것이 바로 여기서인데 전자는 순수한 〈자연상태〉이나 후자는 지나친 부패의 열매라는 점에서 다르다. 게다가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데 〈정부의 계약〉은 〈전제군주제〉에 의해 그토록 파기되어 〈전제군주〉는 최강자인 동안만 〈주인〉이다. 사람들이 그를 쫓아내게 되면 그는 결코 그 폭력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군주〉를 목 졸라 죽이거나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끝나는 폭동도, 그 전날 그가 〈신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법률적 행위이다. 폭력만이 그를 지탱했고 폭력만이 그를 거꾸러뜨린다. 모든 게 이처럼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뤄진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3, 135-137면. 번역은 부분수정)

 

●●●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최초의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포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까?” 〈소유의 개념〉이 인류를 불행에 빠트린 것으로 진단한 이 유명한 대목으로 시작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제2부〉는 결국 새로운 사회를 향한 혁명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위의 [이 한 대목]으로 끝납니다.

 

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1970년대 초반 읽었는데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의 안쪽에 이 책이, 특히 이 대목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3년 가을 내내 루소의 이 책을 뒤적거리고 있습니다. 1755년 발표됐으니 250년을 훌쩍 넘긴 작품이고 주장입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아이가 노인을 부리고 바보가 현자를 이끌며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 넘쳐나는 것은 분명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 문명사회란 정치사회이고 정치사회는 계약사회입니다. 계약이 파기된 사회는 변형된 - 부패한 - 지연상태일 뿐입니다. 공정한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는 이 상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루소에 따르면 지배자의 논리에 따라 제도가 생겨난 문명사회는 필연적으로 이 지점에 오게 되는데 이는 불평등에 기인한 문명사회의 모든 법의 특성이 ‘제도/체제 수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 ‘법’으로 개선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데에 루소는 부정적입니다. 백과전서파encyclopédiste와 루소가 다른 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백과전서파 사상가들은 개선하고 보수하기를 원했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사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변혁과 개조를 거의 꿈꾸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파렴치한 악폐들이 교정되는 것을 보는 것, 더 나은 정치적 상황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에른스트 카시러) 그들은 개량주의자입니다. 기존의 제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점진적 개선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루소는 개량주의의 기만성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유럽 사회를 윤리의식과 문화현상이 유리된 사회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예절은 노상 요구하고 명령한다......이젠 감히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도 못한다. 이런 끊임없는 강제 속에서는 사회라 불리는 무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환경에 놓이면 더욱 강력한 동기가 그들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지 않는 한 다 똑같은 짓을 하게 돼있다.”(《학문예술론》) 해결책은 혁명뿐입니다. 이 ‘동기’가 기왕의 제도, 즉 파기된 제도로서의 폭력만이 지탱해주는 사회의 보존욕구를 무력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어야 하는데 루소는 새로운 폭력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폭력은 ‘자연의 장애물’처럼 그 자체가 다음 사회의 생존방식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장애물’의 한 도구일 것입니다(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어쨌든 폭력은 본질적으로 합목적적이지는 못합니다. 도구적입니다). 이 폭력을 폭력이라는 이유로 기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는 인간의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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