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우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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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1959년 박이문의 번역으로 소개된 후, 정기수(1968년), 윤영애(1976/2008년), 박철화(2013년)의 번역에 이어, 이번에 황현산의 번역, 주해본이 나옴으로써, 드디어 진본과 다를 바 없는 한국어 판본을 갖게 되었습니다.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혼의 서정적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인 산문’이라는 시인의 기적 같은 꿈이 빚어낸 이 산문시집은 19세기 유럽의 도시적, 현대적 시인의 예술론이자 시학입니다.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서 보들레르는 줄곧 미학과 윤리가 빚어내는 갈등의 한가운데 있다. 그는 윤리적 관점에서 책임 없는 미학을 증오하고 미적 관점에서 깊이가 결여된 윤리적 주장을 경멸한다.’(황현산, 222면)

 

이 번역본의 구성은 기왕의 번역본들과는 다릅니다. 특정 시어나 시구들에 주석을 다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시집을 번역하여 앞쪽에 놓고, 시 한편 한편을 통째로 주해註解하여 뒤쪽에 놓았습니다. 〈주해〉편은 각 시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세밀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주석 뿐 아니라 보들레르의 시세계, 산문시의 정신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깊은 학문, 그리고 디테일들을 엮어 한편 한편의 글을 만들 수 있는 스토리텔링 능력, 이 두 가지를 겸비한 학자만이 실현할 수 있는 문학성이 담보된 학문적 업적입니다. 주해부분만으로도 한권의 책이 될 만한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황현산판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쯤 될 듯싶습니다.

 

33 취하라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이 몇 시인지.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황현산 옮기고 주해, 문학동네, 2015, 99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공분야도 아닌 프랑스 시 강의를 평생 다섯 학기 정도 했습니다. 강의 때마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원문으로 시들을 외울 것을 주문했는데, 졸업 후 만난 학생들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프랑스어로 시를 외우느라 애를 먹던 그 시절의 고생을 이야기합니다. 자기들끼리 모여 선생에게 툴툴거리던 이야기까지. 십년이 지나서도 외울 수 있다며 외워보는데 압도적으로 많은 시가 바로 〈취하라〉입니다. “앙니브레 부, 일포떼트르 뚜주르 이브르, 뚜떼라, 쎄 뤼니크 께스티옹…” 취하라, 무엇에? 술에, 시에, 미덕에… 사랑에, 살에, 정신에, 책에, 그림에, 영화에, 혁명에… 또는 무엇에든! 그러나 어떻든 취하라. 《인공낙원》어딘가에 보면 술 취해 길에 누운 술꾼, 하늘을 보며 주절주절 대는데, 술주정 같고 헛소리 같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모두가 시더라는 대목이 있을 겁니다. 도취상태에서의 고양감 그리고 집중력을 말하는 것일 텐데, 이 시도 언뜻 보기에는 도취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도취상태 또한 빛과 그림자를 갖고 있어 이중적, 양면적이라는 것을. 도취상태는 집중력을 끌어 모으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고 아픈 현실에 눈 감게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시간〉, 취한 우리에게 찾아드는 게 〈시간〉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인지, 〈시간〉을 피할 수는 있다는 위로감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오늘 제 설명은 여기서 멈춥니다.

 

더 좋은 해설은 황현산 선생의 번역/주해본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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