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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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 만에 《발원 - 요석과 원효》 1, 2권을 들고 나타난 시인 아니 작가 김선우에게 건넨 내 첫마디는 반갑다거나 애썼다가 아니라 “어디 아파?” 일만큼 그는 말라 있었습니다. 1년 넘게 작품을 퇴고하느라 5kg. 빠졌다는 게 답이었습니다. 얼굴은 병색은커녕,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의 근심은 탐욕에서 나오고 사람의 즐거움은 만족에서 나오나니 만족을 모르면 즐거움이 없나니라.”(1권, 214면)

 

그의 얼굴 표정은 이 작품에 원 없이 공 들였음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시인으로서든 소설가로서든 김선우는 문학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음을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는 드문 작가 중 하나입니다. 김선우의 시 쓰기는 대학생 시절 어느 날,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담은 다큐멘타리를 보고 받은 충격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시를 통해,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지만, 〈근본적 치열성〉의 미학을 대표하는 최승자, 김혜순 등 이전 시대와는 다른 〈유희적 치열성〉이라는 자기 나름의 시의 미학성을 확보함으로써 1970년 즈음에 태어난 시인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시 〈내 몸 속에 잠드신 이는 누구신가〉를 보면, 이만큼 시적 완성도를 실현한 에로틱 포에지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은데, 출발점이 어디였든 김선우는 폭 넓은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자기 시를 어딘가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시를 쓰고 있습니다(자기가 왜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를 한시도 잊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지적해 둬야 합니다).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이 권한 소설가의 길

 

시인 김선우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난쏘공〉의 조세희 선생님의 권유 때문입니다. 현실의 감춰진 민낯을 들춰내는 게 소설이 해야 할 공적 사명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선생님이 보기에, 김선우가 그런 소설을 쓰기에 적격인 글솜씨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이는 김선우가 쓴 글에도 있지만 2010년 5월, 조세희 선생님과의 전화통화로 내가 직접 확인한 일입니다.

김선우가 발표한 그 동안의 소설들, 《캔들 플라워》는 촛불시위의 의미를, 공저 《구럼비를 사랑한 별이의 노래》는 제주도 구럼비 마을 강정의 비극을, 《물의 연인》은 4대강 사업이 저지른 생명/자연 파과의 참혹한 현장을 배경/주제로 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해설을 곁들이지 않으면, 현장/현실을 고발한 소설인지 알아채기 힘들만큼 문학적으로 변용된 소설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소설가로서의 김선우가 지닌 남다른 장점입니다.

‘요석과 원효’라는 부제가 달린 《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촛불시위, 강정마을의 끈질긴 투쟁, 4대강 사업 반대,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결국 정의는 이긴다’ 하는 진실을 증명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지개벽할 정도로 일거에 정의가 실현돼 천국이 찾아오려는 것일까, 세상은 변함없이 개판인 시절, 2012년 봄, 김선우는 〈불교신문〉으로부터 신문연재를 청탁 받습니다. 청탁내용은 간단합니다.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를 써주십시오”.

2013년 봄, 김선우는 연재를 끝냅니다. 그리고 1년이 넘게 작품을 매만지던 중인 2014년 봄, 304개의 생명을 바다 속 깊숙이 처박는 일이 일어남으로써 대한민국은 야만국가임을, 아니 국가도 아님을 만천하에 알립니다. 그리고 이 참사는 소설의 완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 영향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느라 또 1년이 지나, 2015년 봄, 7백면짜리 장편소설 《발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대가였을까, 김선우의 살 5천그램이 고스란히 사라졌음을 다시 한 번 여기 적습니다.

 

소설 《발원》은 김춘추, 신라 29대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과 원효대사의 사랑이야기를 기본 플롯으로 한 연애소설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원래 요석공주와 가약을 맺었던 보현랑이 있습니다. 세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사랑이야기, 플라토닉한 사랑(요석과 원효), 《슬픈 카페의 노래》의 카슨 매컬러스가 지고의 사랑으로 여기는 아가페적 사랑(원효와 요석에 대한 보현랑의 사랑)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쿨하게, 고상함 밑에 숨겨진 터질 듯한 사랑의 격정으로 숨 막히게, 독자들을 한눈팔지 못하게 하며 끝까지 끌고 갑니다.

 

고상하면서 숨 막히게 하는 연애소설

신기하도록 에로틱한 장면 묘사

 

권력을 걸머지기 위해 김춘추는 딸 요석을 정략결혼의 제물로 삼습니다. 궁내의 실력자 알천공의 며느리로 삼습니다. 그리고 김춘추는 무열왕이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요석의 남편인 알천공의 아들 소파용은 전사하고 요석은 과부가 됩니다. 소설의 끝에 이르면 과부인 공주 요석과 온 백성이 우러러 보는 스님 원효는 잠자리를 함께 하고 이제 원효는 파계하고 평복을 입은 불교 신자가 돼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동시에 ‘실천’합니다.

이러한 서사적 구성은 참으로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만으로도, 아가페적 사랑만으로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에로틱한 사랑이 함께 해야 드디어 인간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함께 해야만 진짜배기 사람의 사랑은 이뤄진다는 점을 이 소설은 스토리텔링 면에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석과 원효가 한 몸, 한 마음, 한 정신이 되는 장면의 묘사, 나는 최근 한국 소설에서 이만큼 고상하고 격정적인, 숨 막히며 숨길이 확 트이는, 서로가 자유로우며 동시에 서로가 하나 되는, ‘신기하게’ 에로틱한 묘사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길지만 인용합니다. 

 

‘저는 성심을 다해 넘어지고 성심을 다해 일어날 겁니다. 곁에 있든 없든 제가 언제나 당신과 함께임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내 사람입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저는 당신 사람입니다.’

모든 지나간 일들이 아득했으나 요석의 숨결만은 그날보다 더욱 생생했다.

머뭇거리던 원효의 입술이 열린 순간, 요석의 더운 숨길이 원효의 몸으로 밀려들어 왔다. 삽시간에 온몸에 자욱한 열기가 휘돌았다.

안아 주십시오. 더, 더 꼭 안아 주십시오. 원효의 품을 파고들며 요석이 입속에서 궁굴린 말들을 원효는 마음으로 전해 들었다. 눈물이 배어나오며 심장이 아팠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한 말들이 요석의 몸을 더욱 뜨겁게 이끌고, 몸속에서 회전하던 말들이 격류가 된 숨결로 원효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오래전 죽은 고목처럼 저는 텅 비었습니다. 이 텅 빈 몸이 원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오직 님입니다. 요석은 격렬하게 원효의 몸을 탐했다. 이 마음을 삿되다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오직 내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바닥까지 내려간 삶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바닥이었다.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는 바닥, 떨어진대도 받아줄 이 아무도 없는 바닥이었다. 혼불 없이 그저 텅 빈 몸으로 살았습니다. 죽어서 살았습니다. 요석이 울었다. 원효의 등을 꽉 껴안은 채 벼랑에 매달린 듯 온몸을 붙여 오며 요석이 흘리는 눈물이 원효의 심장을 찢었다. 이렇게는 아니 되겠습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안아 주십시오. 더 꼭 안아 주십시오. 요석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뜨겁게 원효의 몸을 원했고, 가두어 둔 시간의 지층 속으로 온몸을 밀어 넣듯이 원효의 몸으로 자욱하게 밀려들었다. 봉인된 시간을 풀어헤쳐 살과 피와 뼈로 가져오려는 듯 격렬하고 아득한 요석의 몸을 원효가 받아 안았다.

몸이 영혼과 다르지 않았다. 불일불이했다. 원효의 몸은 원효의 영혼이었다. 사랑해 주십시오. 다 가지겠습니다. 지난 세월과 앞으로의 세월까지 모두 이 밤에 가지겠습니다. 이 순간이 저의 영원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쳐 오듯 격렬히 원효에게 내달려 오는 요석을 껴안으며 원효는 온몸, 온 마음으로 요석에게 화답했다. 영혼이라 일컬을 수 있는 시공의 모든 인연들이 요석의 몸과 함께 새로워졌다. 처음 만나는 밤이었고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수만 년 거듭 만나 온 밤이기도 했다. 길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원효는 푸른 바다처럼 자신을 펼쳐 포말을 일으키며 내달려오는 요석의 온몸, 온 영혼을 껴안았다. 온 정성을 다해 만지고 쓰다듬고 입 맞추었다. 살과 뼈와 사랑의 액체들이 뒤섞인 불일불이한 몸의 우주 속에서 몇 번이고 빛이 폭발했고 충만한 어둠이 태어났다. 비리고 달큰한 파도가 수차례 물마루를 이루며 넘실거렸고, 몸이 펼쳐 준 길을 따라 요석이 가슴에 쌓아 둔 이야기들이 은하처럼 풀어져 흘러갔다. 한 물마루에서 다른 물마루까지 포말의 수평이 아득히 펼쳐지고 요석의 신음과 숨결과 환희에 찬 탄성이 물방울들로 흩어져 솟구치다가 다시 수평을 이룰 때, 님이여... 요석이 가끔 중얼거렸고, 그때마다 눈물이 터졌으며, 그 눈물을 원효의 입술이 따스하게 핥아 갔다.”(2권, 249-251면)

 

이 소설은 연애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정치소설로 읽어 손색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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