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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쓰다 ㅣ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학창시절에 배운 니체에 대한 상식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는 저서가 있고, ‘초인’철학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아마 예전의 나라면 이 정도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다음부턴 말문이 턱 막혔을 것이다. 굳이 그 이유를 따져보자면, 우선 철학이란 학문이 무척 난해하기도 하거니와, 살기도 바쁜데 ‘니체 같은 철학자를 더 잘 안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사고방식이 마음속 저변에 깊히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찌 그리 단순하기만 하고, 생각은 늘 한 군데에 머물러 있기만 할 것인가? 어찌어찌 살다 보니 인생의 풍파도 많이 겪게 되었고, 진실은 한 가지 모범답안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몇 년 전, 사이버대학에 편입하여 심리학 과정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심리학(psychology)이 철학(philosophy)에서 파생한 실용학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제학의 기본 흐름을 모르고서는 국제통상학을 공부하기 힘든 것처럼, 니체, 프로이트 등의 인간 본성을 꿰뚫는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깊이있는 심리학을 공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니체를 쓰다》라는 평전의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20세기 초반의 유명한 전기작가이자 시인이다. 세계 3대 전기작가로 꼽히는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을 깊이 탐색하고 인간관계에서 작용하는 심리적 측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미리부터 이야기해 두는게 좋겠다. 츠바이크를 처음으로 접한 이 책에서 나는 그의 감수성 넘치는 유려한 문장과 현란한 비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것을.
이 책의 맨 처음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은 모노드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렇기에 그의 비극은 삶이라는 짧은 무대장면 위에 자신의 형상만을 올려놓는다.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그 모든 행위들에는 고독하게 홀로 싸우는 니체가 있다. 어느 누구도 그의 곁에 다가서거나, 그와 마주치지 않는다. 어떤 여인도 그와 함께 머물며 긴장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다독이지 않는다. 모든 운동은 오로지 그로부터 시작되어 그에게로 되돌아온다.. (후략) 』 (p9 ~ p10)
이 책을 조금 넘기다 보면 츠바이크는 요즘 말로 니체 덕후이자 광팬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금방 든다.
마치 시대를 앞서간 니체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나는 유쾌하오!..”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드니 말이다.
츠바이크의 《니체를 쓰다》는 소설적 전기 형식을 띄고 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마치 니체의 분신인 것처럼 ‘내’가 주어인 1인칭 작가시점에서 글을 쓰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즉, 그의 니체에 대한 평전은 사실적 관계만 기록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주관에 투영된 인물의 재창조를 시도하고 있다. 마치 니체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표현들은 니체의 사상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듯한 묘한 동질감 마저 준다.
츠바이크는 니체의 고독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요약하고 있다.
『니체의 비극은 배우들이나 상대역, 청중도 없이 그 자신의 영웅비극만을 보여준다.』 (p10)
『천재적인 감별사 니체는 항상 심리학자로서 자신의 고통을 통해 신기한 쾌감을 얻고자 했고, “스스로 실험자 및 실험 대상자”가 되고자 했다.』 (p37)
24세의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된 니체는 바그너의 후광으로 쉽게 유명세를 떨쳤으나 10여년만에 교직생활을 끝내고 그는 곧 철저한 혼자가 된다.
잠깐 동안의 종군생활에서 얻은 질병, 이론적인 추종자였던 바그너와의 결별 등으로 인해 그는 얼마 안되는 대학연금에 의존한 혼자만의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핏자국이 밴 넝마를 걸치고 운명과 싸우는 광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헤라클라스처럼 반인반마의 괴물 네수스의 불타는 옷을 찢어버림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p14)
『니체는 온갖 고통을 기교나 육체적 위기의 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 극복했다.』 (p45
『건강한 자들에게는 심리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은 고통으로부터 나왔다. 고통은 늘 원인에 대해 묻는다. 반면에 쾌락은 제자리에 머물러 뒤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점점 더 섬세해진다.』 (p44)
니체가 사랑한 것은 ‘불확실성’, ‘확고하지 않은 것’이었다. 가치전도의 달인인 니체는 어떠한 인식행위도 실제적인 최종지식일 수 없으며 종국적인 의미에서 진리는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붕과 여자, 아이, 하인도 없는 영원한 무산자이고자 했다. 그 대신에 사냥의 쾌감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했다. 그는 지속적인 감정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 후안처럼 “위대하고 황홀한 순간”을 사랑했다. 그를 유혹한 것은 오로지 정신의 모험, 저 “위험한 불확실성”이었다.』 (p54)
『니체에 의하면 “우리는 뭔가 쟁취하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철저히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의 내부에 있는 폭군이 말한다. (우리는 이런 자를 우리의 더 높은 자아라고 부르고 싶다). 바로 이 더 높은 자아가 나의 제물이 된다.”』 (p58)
많은 학자는 19세기 이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 이론으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꼽곤 한다.
(EBS 인문학 특강 –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 중에서)
이 중에서 니체는 그의 삶이 바로 하나의 사상이자 철학이었던 사람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철학자, 전복/혁명/파괴의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백신이 없을 정도로 감염력이 뛰어난 지적인 병균’이라는 표현은 대중들이 끝내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의 가장 핵심을 찌르는 그의 실존 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란 저서에서 말한다.
“내 말을 믿어라.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는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등 학문적 본성의 인간들은 몸과 마음, 운명까지 다 바쳐 인식을 얻기 위한 영웅적인 투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니체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모험에 뛰어들었다. (p59~p60)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니체의 사상과 글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제, 이 책에 나온 구절 중 가장 감명깊은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위대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공식은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는 것이다. 우리가 운명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앞으로, 뒤로, 영원으로도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필연적인 것을 견디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