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러운 고백 ㅣ 박완서 산문집 1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7년에 발표한 박완서작가의 첫 산문집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를 재편집한 책이다. 작가가 떠난지 4주기를 맞아 7권의 산문 전집이 나왔다. 표지는 작가의 유품을 찍은 사진으로 디자인한것이라고 하니, 작가를 아끼는 분들에게 남다르게 느껴질것 같다. 책 자체도 예쁘게 잘 나왔다. 판형도 아담해서 한손에 쏙 들어오고 본문 편집도 예쁘다. 튼튼한 양장에 제본도 아주 잘되어서 신경을 많이 썼구나 싶다.
​
표제작은 왜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쑥스러운 고백>으로 바꿨는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알것 같다. 분명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는 아주 강렬한 산문이여서 표제작으로 충분히 손색이 없지만, 지금은 이 책이 발표된지 40년이 다 되어 가기 때문에, 이 산문집 전체의 느낌을 대표할 수 있는 표제작으로 아마도 <쑥스러운 고백>이 잘 맞지 않았을까? 당시 작가는 데뷰한지 7년밖에 안되었고 많은 글에서 자기 고백과 성찰이 엿보인다. 작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또 한 여자로서 그 시대, 197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는데,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지금와 읽어보면 무척이나 새롭게 느껴졌다. 지난 몇년전부터 갑자기 복고 바람이 불었는데, 드라마라던가 영화에서 그런 복고 코드가 유행인듯 하다. 거기에 사회도 약간 꺼꾸러 흘러가는 기분이라 그런지 더욱더 복고가 유행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걸 추억거리로 치부하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겠지만,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좀 우숩다. 물론 과거의 역사를 우숩게 보는게 아니다. 그저 그 옛날이 좋았지, 라던가 혹은 그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게 웃길 뿐이다. 과거로 돌아가는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만큼 억지스러운게 또 있을까. 그저 우리는 과거를 쳐다볼 뿐이다. 이 산문집은 70년대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내가 태어나기전에 일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도 해당될꺼라 생각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왠지 친숙하기도 또 낯설기도하다. 친숙한것은 앞서 말한 드라마와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친숙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연을 하기 위해 만든 무대장치처럼, 70년대나 80년대의 이미지가 있다면, 작가가 실제로 느끼고 기술한 산문은 그 이미지와는 또 달라서 낯설게 느껴진다. 첫 산문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등장하는 버스안내양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블로그에 주로 들어오는 연령이 20대, 30대, 10대 순으로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마도 영화속이나 드라마에서나 봤을 것이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버스안내양에 대한 기억이 있긴 한데, 그것조차도 기억이 또렷해지는 나이가 됐을때는 이미 다 사라졌다. 친숙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낯설었고, 또 낯설다고 했지만, 왠지 상당수 많은 부분은 또 요즘의 우리 사회를 연상케 하는 부분도 있다. 200년쯤 전에 쓴 <목민심서>에서도 다산은 머릿말에서, 당시 조선이 성인의 시대와 그 거리가 멀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거둬들이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고 한탄한다. 책 전체에서 우리 사회, 그것도 군주제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한 타락과 부폐와 쏙 빼닮은 부정들을 지적한다. 그러니 나라의 거대 여당의 수장이 왜 기업이 부정하고 정치인과 공직자가 부패한가?라는 질문의 해답으로 국민 복지의 과잉을 그 이유로 내세우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백성을 기른다, 즉 백성을 양육하는, 지금에 와서는 국민을 섬기고 잘 보살펴야할 의무를 지는 자의 몰상식함은 왜 예전이나 지금이 똑같을까? 어쩌면 조금씩 변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엔 너무 더딘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
박완서작가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좋은 부분은 작가와 세대차이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또 이처럼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있다. 첫 산문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우리는 마라톤 하위 그룹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는 작가를 발견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스포츠 경기에 늘 시들하다. 챙겨 보지도 않고 열열하게 응원하는 팀도 없다. 그러나 가끔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가족이나 식구와 함께 티비를 보다가 열열히 응원하고 박수를 칠때가 있다. 그 경기가 꼭 결승전은 아닐때도 많다. 게다가 그것은 집단애국의 발로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다. 순위에 상관없이 노력했던 한 인간에게 보내는 갈채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한번 열광을 하고 싶을 때, 불완전한 동질감을 느끼고 싶을 때, 그저 한바탕 박수를 쳐서 응원을 하고 싶을 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것 뿐이다. 작가의 글을 조근조근 읽다보면 이런 뜻밖의 공감을 발견할 때가 자주 있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작가의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
우리는 70년대를 살아내지 않았고 (물론 70년대를 살아낸 분들도 이 글을 볼것이다.) 그 안에서 작가가 느꼈을 것들을 이렇게 좋은 문장과 좋은 편집으로 만나 볼 수 있다. 그 시대 작가가 느낀 시대상, 각종 사건들, 여성운동에 대하여, 교육열에 대하여, 도시의 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늦깍기 작가의 첫번째 산문집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나는 이 서평을 쓰기전에, 어떻게 쓸까 궁리를 했는데, 작가의 좋은 문장들, 또 인상 깊은 구절을 몇개 넣어서 써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런게 너무 많다. 어떤걸 골라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렇다고 그 문장만 쏙 빼서, 혹은 한 단락만 쏙 빼서 넣는것도 전체의 느낌을 다 전달하기 어려울것 같았다.
​
표제작 <쑥스러운 고백>에서 작가는 여공(女工)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그러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총력을 다해 추구하고 있는 번영이 결코 어느 특정인을 위한 거나 또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전시용이 아닌, 우리 모두가 잘살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번영일진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근로에 충분한 보답을 받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으리라는 걸 믿으며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렇게 돼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돼어가는 과정이라면 과정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치르지 않는 부정이 너무 많다. 그것은 명백한 기업주의 부정인데도 앞서 말했듯이 집권당의 대표는 그 기업주를 비난하거나 그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뿐더라 그것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있다고도 하고 또 복지의 과잉이라고도 하는 괴변을 늘어놓았다. 한때 근면한 노동은 좋은 선전거리였다. 그것은 아직도 이용되고 있다. 때론 상업적인 추억팔이로 이용되며 또 한편으론 무언가를 억압하려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과거의 부모세대의 노력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이 온전히 그들에게 돌아갔는가를 반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온전히 쓰였다면,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더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박완서작가의 글에서 시대를 초월한 공감이 앞서 좋기 때문에 작가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하자면 작가가 왜 글을 쓰는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확고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산문 <나는 왜 소설가인가>의 한구절에 그 부분이 명확하게 들어나 있다. 이 또한 내가 작가를 사랑하는 두번째 이유기도 하다.

​

"내가 인간이기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과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 시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를, 그 후에 쓴 소설을 통해서도 내가 살아온 분단 시대. 산업화, 정보화 시대가 어떻게 인간성을 속물화, 황폐화시켜가는가를 증언하는 걸로 일관되게 유지돼왔다. 또한 이 나이까지 꾸준히 소설을 써온 건, 이야기가 지닌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위안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대통령의 시간 2008-2013
이명박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에이치코리아의 수준.... 앞으로 살 일은 없겠다. 출판사 이름이나 바꾸지 말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 손으로, 발리 BOOK + 내 손으로 NOTE 세트 - 전2권 (도서 + 노트) - 일러스트레이터 이다의 카메라 없는 핸드메이드 여행일기 ㅣ 내 손으로 시리즈
이다 지음 / NEWRUN(뉴런)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고백하자면, 최근에 책을 거의 읽지 않고 있다. 그게 두달은 넘은것 같은데, 겨우겨우 독서 모임 때문에 한달에 책 한권을 읽는 정도였다. 당연히 오랜만에 독서 모임과 무관하게 읽은 책이며, 올해의 첫 책이다. 또 우연하게도, 어제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란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 발리가 나온다. 마치 그 느낌이, 꼭 쇼생크 탈출에서 마지막 장면처럼 낙원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난 발리에 대해서 잘 몰랐고, 인도네시아도 몰랐고 관련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동남아시아에 대해서 전혀 아는게 없었다. 게다가 나는 기행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우연히 <열하일기>를 읽고 단숨에 기행문에 매료되었다. 전에는 기행문이라는 건 내가 거기에 가지 않으면 읽어볼 필요가 없는 책 정도로 취급했다. 난 여행을 많이 안하니깐 당연히 기행문을 읽을 생각을 안해봤다. 아마도 내가 여행을 좀 즐긴다고 해도 기행문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왜 전자제품 사면 설명서 안읽어보고 일단 몰라도 무작정 써보는 타입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근데 좋은 기행문은 그런 생각을 변하게 했다. 기행문이란 여행에서 느낀 것들, 그것이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그것을 산문 형식으로 쓴 것인데, 꼭 여행의 기록으로만 얘기할 수 없다. 그 안엔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물론 모든 기행문이 내 구미에 맞는 건 아니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를 제외하곤 요즘 기행문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아보이질 않았다. 요즘엔 블로그에 올라오는 기행문조차도 너무 사진이 많다. 한마디로 디지털 사진의 과잉 시대라서 그런지, 생각해보면 나도 포스팅 하기전에 늘 사진없이 글을 올리는 건 좀 뭔가 허전해서, 어떻게든 사진을 준비한다. 마치 짤방없이 글을 올리면 큰일 나는 것처럼, 최근 여행의 기록들을 보면 온통 사진뿐인데, 사진은 참 편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그 만큼 재미는 없다. (사진 자체가 재미없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진이 너무 흔해서 그럴꺼다. 영국의 근대회회사를 읽다보면 풍경화가 발전한 것이, 그때는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풍경화가 상업적으로 발달했다고 한다. 낯선 곳의 이국적인 풍경, 주로 자연풍광을 사실적으로 그린것에 사람들이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근데 따지고 보면 여행의 기록을 동영상으로 남기든 사진으로 남기든, 글로 남기든 그림으로 남기든, 각각의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기록적인 면에선 다 똑같다. 물론 여기서 조금씩 차이는 있다. 각각의 형식에서 저마다 구사하는 능력도 다를것이고 그림을 통해서 포착해내는 것이 사진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고 그 반대도 있을것이고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그냥 갔다와서 사람들에게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더 잘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방식은 사실 상관없다. 단지 요즘에 기행의 기록이 사진이 너무 많아서 흔해빠지고 지루하다는 것일 뿐이다. 그 안에서도 물론 옥석은 있을 것이다. <내 손으로 발리>를 펴 들었을 때 놀란 점은 모두 손으로 쓴 책이란 점이다. 마치 중세시대 부자들을 위해 기도서 같은것과 비슷하다. 거기에는 손으로 쓴 글씨와 정교한 장식이 그려졌고 더 비싼 책에는 화려한 채색화까지 그려져 있다. 예전에 딱한번 작가의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몰스킨 노트에 그려진 홍콩 풍경들을 본적이 있는데, 나는 완전히 거기에 매료되었다. 하필 나도 전에 홍콩을 갔다왔는데, 수백장의 흑백사진을 갖고 돌아왔고, 생각해보면 나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아니였다. 만약 그 때 내가 짧은 홍콩 여행의 기록을 남겨야 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사진을 포기하고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내가 사진보다 글을 더 잘 쓰기 때문이다.(물론 잘쓴다라는 뜻은 상대적인 의미다.) 어쨌든 이 책은 글자가 번진것까지 인쇄되어 있어서... 책을 계속 읽다보면 마치 내가 길을 걸어다가다 우연히 길에 떨어진 <발리 여행의 기록을 상세하게 적은 노트>를 줏어서 나도 모르게 읽어본 그런 느낌이 든다. 이것은 사실 책의 본질이라고 할만한다. 작가는 글이든 사진이든 그림든, 그런 방식을 통해서 내가 느낀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캔버스나 필름, 혹은 원고에 담겨지고 다시 그것은 가공된다. 수정을 하고 보정을 보며, 전시를 위해 액자에 넣어지고 조명을 설치한다. 인쇄를 하기 위해 타이포작업을 하고 편집을 하고 갖가지 과정을 통해서 사진들에게 보여진다. 그러나 이 책은 후반부에 어떤 작업이 생략되어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생략되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종의 속임수라고 하면 속임수인데... 작가가 작성한 노트의 원고의 초고 상태를 수정없이(수정없는 것처럼) 펼쳐 보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언뜻 새로울것이 없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또 굉장히 새롭게 느껴진다.

​

글을 쓰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편안하다. 종종 나는 블로그 포스팅을 할때도 늘 형식적인 면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단순히 잡담하는게 아니라 좀 더 형식을 갖추고 써야 할 때는 어려움을 느끼는데, 아무래도 글쓰기라는게 좀 그런면이 있다. 소설을 쓸 때도 소설의 형식에 벗어나지 않지만 좀 더 참신하고 매끄럽게 쓰려고 노력한다. 서평도 그렇고 모든 글에는 그런게 있다. 책 앞 페이지의 지도 그림을 보면, 기행문의 형식을 지킨것 같지만, 곳곳에 산문들은 굉장히 자유롭다. 발리 역사 요약이나 정보 요약, 쇼핑한 물품들, 음식 소개, 등등.. 일기 형식 중간중간에 자유롭게 배열되어 있는데, 읽기 편하다. 기행은 사실 대부분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서술하는게 보통이고 이 책도 그 형식을 따른다. 다만 중간 중간 다양한 주제들을 끼워넣었다. 재미난건 열하일기도 이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열하일기도 일기처럼 기록들을 서술하다가 갑자기 책목록이 나오고 소설이 나오고 골동품 리스트가 등장한다. 이런건 사실 기행의 기록과 큰 상관은 없지만 매우 흥미롭다. 그런게 빠졌다면 왠지 아쉽지 않았을까? 어쩌면 기행산문의 독특한 형식일지도 모르겠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나는 기행문을 읽지 않았다. 예컨데 발리에 대한 기행문을 읽는것보다 발리에 대한 역사책을 읽는걸 더 선호했다. 근데 잘 써진 기행문을 읽고 나서 내가 느낀점은 기행문이 단순히 여행의 기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같은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읽는 책이 아니라, 그 여행에서 작가가 뭘 보고 뭘 느꼈는지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다른 산문이나 소설과 맥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 소설도 그렇지만, 작가가 허구를 통해서 자신이 뭘 보고 뭘 느꼈는지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똑같다. 좋은 기행문을 읽으면 나도 기행문을 한번 써보고 싶다. 문제는 기행문을 쓰는 문제라기보다는 여행, 즉 낯선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능력? 그런 노력을 기행문에선 요구하기 때문에, 그건 쉽지 않을 것같다. 앞서 내가 요즘 여행의 기록은 디지털 사진의 과잉이다라고 한것은 단순히 사진이라는 매체로 기행을 기록한 것을 비판한것이 아니라 그 기록에는 작가가 뭘 봤는지 뭘 느꼈는지 와닿는게 없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발리>라는 책은 글과 드로잉을 통해서 작가가 발리라는 낯선 여행지에서 뭘 보고 뭘 느꼈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그 방식은 작가가 원했던 방식이라는 점이 받아들이는 독자에게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변희재의 청춘투쟁 - 돌직구로 승부한 슬램덩크 세대의 좌충우돌 성장기
변희재 지음 / 도전과미래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종이가 아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전자책] 환상의 여자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9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3대 추리소설이라는 것은 책 속의 환상의 여자처럼 그 실체가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누가 그걸 선정했는지, 그 이유도 어떤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글을 보니 일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었는데, 추리소설만큼 일본 중역이 넘쳐 났던 번역이 없었기에 충분히 그럴만하다.
 
이 번역본도 일본판 중역이 아닌가 읽으면서 끊임없이 의심했다. 몇몇 문장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요즘에야 속 시원하게 어떤 것을 텍스트로 삼아 번역했다. 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근데 그런 당당함은 제대로 번역한, 즉 중역이 아닌 원본 텍스트를 번역한 책의 자랑이다. 아무래도 뒤가 구린, 번역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 번역이 무얼 텍스트로 삼았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처음 해문 출판사의 종이책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포기할 정도로 번역이 엉망이었다. 번역이 엉망인 건 참을 수 있지만, 중간마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를 문장을 발견하자.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자책을 하나 살까 하고 검색을 해보니, 그 당시에는 유일한 번역본은 '솔' 출판사의 <환상의 여인>밖에 없었고 PDF여서 망설이게 되었다. 더더욱 번역을 보니 절대 살 만한 책이 아니었다.
 
아이리시의 문장은 꽤 별난 구석이 있다. 첫 문장만 봐도 이 작가가 문장이 꽤 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에 좋은 번역으로 다시 나온 '엘릭시르'의 "밤은 젊고 그 또한 젊었다."로 시작된다. 꽤 별난 문장이다. 본서 동서의 첫 시작은 "밤도 젊고 그도 젊었다."이다. (이건 해문 판도 똑같다.) 그러나 '솔' 출판사의 시작은 남다르다. "그의 젊음과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이 번역본을 보면, 역자가 의역을 넘어 스스로 창작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리시의 문장을 유별나다. 좋은 문장이 가득하다. 그걸 살리지 못하는 번역이라면, 아니 최소한 동서와 해문 판은 그걸 잘 살렸다고는 못하겠지만, 나름의 노력이 엿보이지만, 자신이 아이리시보다 문장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그걸 고쳐 쓸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렇다 할지라도 그걸 고쳐서는 안 된다. 그건 번역가의 일은 아니다.
(물론 '밤도 젊고 그도 젊었다'는 국어에 맞지는 않는다. '~도는'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하므로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라고 번역한 엘릭시르의 번역이 더 유려하다.)
 
그런 이유로 '창'의 번역은 추천하지 않는다. 가능한 엘릭시르의 번역을 추천해야겠지만, 나는 그 번역으로 읽지 않았으므로 함부로 추천할 수가 없다. 내가 읽은 건 반쯤은 해문 판이었고 그걸 포기하고 동서의 번역으로 다 읽었다. 그래서 동서의 번역을 추천해야 맞을 것 같다.
동서의 번역이 좋다는 건 아니다. 적당하다. 이 표현은 좀 웃기지만, 적당한 것 같다. 특히 책 가격을 생각한다면, 적당하다 보다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또 '창'의 번역은 최악이고 '해문'의 번역은 영별로고 결국 남은 건 엘릭시르와 동서뿐이다. 이 둘은 출판 시기도 다르고 책 가격도 두 배나 차이 나기 때문에, 나의 추천은 그런 걸 살폈다.
 
내가 일반적으로 고전 추리 소설보다, 최근의 추리 소설, 그것도 대부분 하드보일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고전 추리 소설의 일종의 속임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임수는 대체로 완벽하다. 3대 추리소설 얘기도 나왔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을 보면 '환상의 여인'보다 훨씬 속임수가 많이 나온다. 훨씬이 아니라 이 추리 소설은 속임수가 가장 중요한 주제다. 결국, 속임수는 작품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근데 그 속임수에 큰 흥미가 없다면, 과연 그런 소설에 열광할 수 있을까? 물론 앞서 언급한 3편의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꽤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더는 그런 방식의 추리소설은 읽고 싶지 않은 게,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를 2권쯤 읽다가 포기했는데, 그 이유는 나는 사건 자체나 인물 자체에 집중하고 싶지, 말 그대로 추리에는 별 재능이 없는데다가 속임수는 전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환상의 여자는 뭔가 좀 다르다. 여전히 속임수는 소설의 큰 주제다. 우리는 범인의 깜짝 등장과 반전을 목격하고 중간마다 속임수가 있었다는 걸 눈치챈다. (물론 나는 둔해서 그런 걸 몰랐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내가 살해당하던 날 동행했던 의문의 여인, 그러나 누구도 그 여인을 알지 못한다. 그의 친구와 연인, 형사와 동료는 그 여인과 엮인 사건을 풀고자 동분서주하는 게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인데, 여인을 찾기 위한 과정이 꽤 흥미롭다. 엮인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 마치 필름 르와르의 느낌마저 풍긴다. 감히 추리소설은 잘 모르지만, 속임수를 중심으로 둔 작품에서 미스터리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작품을 옮겨가는 전환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30년대와 40년대 추리 소설 작품을 읽은 게 너무 빈약해서 이런 평가는 어설프다. (환상의 여자는 42년 작품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론 속임수에만 치중한 고전추리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그건 읽는 내내 범인은 도대체 누구지?라는 어려운 질문보다. 이 흥미로운 사건과 인물이 어떻게 흘러갈까? 그런 의문에 나는 책장을 빨리 넘겼다. (물론 이 표현은 관용구이다. 전자책이라 책장은 없다.ㅋㅋㅋㅋ)
 
그렇다고 이 소설이 완전히 현대 추리소설의 전형을 갖췄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여전히 속임수는 큰 주제고 무엇보다 우연한 일치가 꽤 많다. 그럼에도, 동시대의 추리소설과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근데 이렇게 따져보니 더 오래된 매그레 시리즈는 정말 대단하다.
 
또 한가지 무척 놀란 것은 중역이 의심되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지만 중간중간, 그것도 자주 아이리시의 문장은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흡인력이 강하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런 힘이 있다. 한마디로 탁월한 문장가다. 번역된 이 작가의 작품이 몇 작품 안 되고 그게 하필 다 해문의 번역으로 나왔고 환상의 여자만 끔임 없이 나오고 있으니 씁쓸하다. 장르소설은 늘 이렇다. 해가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만날 똑같은 유명작가의 대표작만 출판사와 역자만 바꿔서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를 반복한다. 출판사 입장에선 팔라지 않는 장르소설이니 안전장치를 두는 것이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세끼 반찬이 똑같고 어제도 내일도 심지어 십 년이 지나도 똑같으니 지겹고 답답하다.
 
어쨌든 추운 겨울날, 따끈한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군고구마라도 먹으며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가격도 저렴하니, 번역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속임수에만 맞춰서 읽지 않는다면, 좀 더 사건과 인물 속으로 들어가서 읽는다면 훨씬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 동서미스테리북스 책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겨울 동안은 심심하지 않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