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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환상의 여자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9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1월
평점 :
흔히 3대 추리소설이라는 것은 책 속의 환상의 여자처럼 그 실체가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누가 그걸 선정했는지, 그 이유도 어떤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글을 보니 일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었는데, 추리소설만큼 일본 중역이 넘쳐 났던 번역이 없었기에 충분히 그럴만하다.
이 번역본도 일본판 중역이 아닌가 읽으면서 끊임없이 의심했다. 몇몇 문장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요즘에야 속 시원하게 어떤 것을 텍스트로 삼아 번역했다. 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근데 그런 당당함은 제대로 번역한, 즉 중역이 아닌 원본 텍스트를 번역한 책의 자랑이다. 아무래도 뒤가 구린, 번역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 번역이 무얼 텍스트로 삼았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처음 해문 출판사의 종이책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포기할 정도로 번역이 엉망이었다. 번역이 엉망인 건 참을 수 있지만, 중간마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를 문장을 발견하자.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자책을 하나 살까 하고 검색을 해보니, 그 당시에는 유일한 번역본은 '솔' 출판사의 <환상의 여인>밖에 없었고 PDF여서 망설이게 되었다. 더더욱 번역을 보니 절대 살 만한 책이 아니었다.
아이리시의 문장은 꽤 별난 구석이 있다. 첫 문장만 봐도 이 작가가 문장이 꽤 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에 좋은 번역으로 다시 나온 '엘릭시르'의 "밤은 젊고 그 또한 젊었다."로 시작된다. 꽤 별난 문장이다. 본서 동서의 첫 시작은 "밤도 젊고 그도 젊었다."이다. (이건 해문 판도 똑같다.) 그러나 '솔' 출판사의 시작은 남다르다. "그의 젊음과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이 번역본을 보면, 역자가 의역을 넘어 스스로 창작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리시의 문장을 유별나다. 좋은 문장이 가득하다. 그걸 살리지 못하는 번역이라면, 아니 최소한 동서와 해문 판은 그걸 잘 살렸다고는 못하겠지만, 나름의 노력이 엿보이지만, 자신이 아이리시보다 문장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그걸 고쳐 쓸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렇다 할지라도 그걸 고쳐서는 안 된다. 그건 번역가의 일은 아니다.
(물론 '밤도 젊고 그도 젊었다'는 국어에 맞지는 않는다. '~도는'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하므로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라고 번역한 엘릭시르의 번역이 더 유려하다.)
그런 이유로 '창'의 번역은 추천하지 않는다. 가능한 엘릭시르의 번역을 추천해야겠지만, 나는 그 번역으로 읽지 않았으므로 함부로 추천할 수가 없다. 내가 읽은 건 반쯤은 해문 판이었고 그걸 포기하고 동서의 번역으로 다 읽었다. 그래서 동서의 번역을 추천해야 맞을 것 같다.
동서의 번역이 좋다는 건 아니다. 적당하다. 이 표현은 좀 웃기지만, 적당한 것 같다. 특히 책 가격을 생각한다면, 적당하다 보다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또 '창'의 번역은 최악이고 '해문'의 번역은 영별로고 결국 남은 건 엘릭시르와 동서뿐이다. 이 둘은 출판 시기도 다르고 책 가격도 두 배나 차이 나기 때문에, 나의 추천은 그런 걸 살폈다.
내가 일반적으로 고전 추리 소설보다, 최근의 추리 소설, 그것도 대부분 하드보일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고전 추리 소설의 일종의 속임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속임수는 대체로 완벽하다. 3대 추리소설 얘기도 나왔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을 보면 '환상의 여인'보다 훨씬 속임수가 많이 나온다. 훨씬이 아니라 이 추리 소설은 속임수가 가장 중요한 주제다. 결국, 속임수는 작품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근데 그 속임수에 큰 흥미가 없다면, 과연 그런 소설에 열광할 수 있을까? 물론 앞서 언급한 3편의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꽤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더는 그런 방식의 추리소설은 읽고 싶지 않은 게,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를 2권쯤 읽다가 포기했는데, 그 이유는 나는 사건 자체나 인물 자체에 집중하고 싶지, 말 그대로 추리에는 별 재능이 없는데다가 속임수는 전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환상의 여자는 뭔가 좀 다르다. 여전히 속임수는 소설의 큰 주제다. 우리는 범인의 깜짝 등장과 반전을 목격하고 중간마다 속임수가 있었다는 걸 눈치챈다. (물론 나는 둔해서 그런 걸 몰랐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내가 살해당하던 날 동행했던 의문의 여인, 그러나 누구도 그 여인을 알지 못한다. 그의 친구와 연인, 형사와 동료는 그 여인과 엮인 사건을 풀고자 동분서주하는 게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인데, 여인을 찾기 위한 과정이 꽤 흥미롭다. 엮인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 마치 필름 르와르의 느낌마저 풍긴다. 감히 추리소설은 잘 모르지만, 속임수를 중심으로 둔 작품에서 미스터리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작품을 옮겨가는 전환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30년대와 40년대 추리 소설 작품을 읽은 게 너무 빈약해서 이런 평가는 어설프다. (환상의 여자는 42년 작품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론 속임수에만 치중한 고전추리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그건 읽는 내내 범인은 도대체 누구지?라는 어려운 질문보다. 이 흥미로운 사건과 인물이 어떻게 흘러갈까? 그런 의문에 나는 책장을 빨리 넘겼다. (물론 이 표현은 관용구이다. 전자책이라 책장은 없다.ㅋㅋㅋㅋ)
그렇다고 이 소설이 완전히 현대 추리소설의 전형을 갖췄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여전히 속임수는 큰 주제고 무엇보다 우연한 일치가 꽤 많다. 그럼에도, 동시대의 추리소설과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근데 이렇게 따져보니 더 오래된 매그레 시리즈는 정말 대단하다.
또 한가지 무척 놀란 것은 중역이 의심되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지만 중간중간, 그것도 자주 아이리시의 문장은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흡인력이 강하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런 힘이 있다. 한마디로 탁월한 문장가다. 번역된 이 작가의 작품이 몇 작품 안 되고 그게 하필 다 해문의 번역으로 나왔고 환상의 여자만 끔임 없이 나오고 있으니 씁쓸하다. 장르소설은 늘 이렇다. 해가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만날 똑같은 유명작가의 대표작만 출판사와 역자만 바꿔서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를 반복한다. 출판사 입장에선 팔라지 않는 장르소설이니 안전장치를 두는 것이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세끼 반찬이 똑같고 어제도 내일도 심지어 십 년이 지나도 똑같으니 지겹고 답답하다.
어쨌든 추운 겨울날, 따끈한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군고구마라도 먹으며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가격도 저렴하니, 번역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속임수에만 맞춰서 읽지 않는다면, 좀 더 사건과 인물 속으로 들어가서 읽는다면 훨씬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 동서미스테리북스 책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겨울 동안은 심심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