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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만과 편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외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평점 :
이상한 번역으로 힘겹게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민음사 번역을 우연히 서점에서 봤고 당장 그 책을 샀다. 번역도 좋았지만 군데 군데 세심하게 붙여놓은 주석도 무척 친절했다. 그래서 종종 책장에서 꺼내서 좋아하는 부분을 군데군데 찾아 읽었지만, 전체를 다시 읽진 않았다. 전자책 단말기를 사면 나는 먼저 이 민음사 번역본을 사서 읽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일은 큰 즐거움이 되었다.
200년이나 지난 이 유별난 소설의 매력은 뭘까? 뭐가 그토록 이 소설을 사랑스럽게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이 소설이 완벽한 드라마라서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완벽한 드라마 말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은 내가 보기엔 거의 완벽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현대에 와서 이것보다 더 나은 드라마를 만드는 건 좀처럼 쉬지 않아 보인다. 현대엔 현대에 맞은 사랑 얘기를 한다면 모를까 말이다. 예를 들어 지난번에 언급했던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처럼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사랑 얘기를 쓰는 것이 오히려 현대에 더 어울린다. <오만과 편견>식의 드라마를 만들어봐야 기껏해서 흉내 낸 작품, 혹은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저 그렇고 그런 것밖에 안 될 테니까 말이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일단 개성 있는 등장인물이 다수 나온다는 점이다. 베넷가는 정말 대단한 캐릭터들이다. 정말 못 말리는 주책바가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베넷은 입을 열 때마다 얼마나 웃긴지(때론 냉소적인) 책을 보는 내내 낄낄거리게 된다. 여기에 첫째딸 제인은 세상 모든 걸 다 좋게만 보는 완벽한 천사표에 매력 만점인 엘리자베스(이하 리지)에다가, 나머지 동생은 천방지축이고 여기에 제인과 딱 어울리는 빙리와 오만한 까도남 다아시까지, 게다가 악역도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고 정말 짜증 날 정도로 끔찍한 콜린스도 있으니 이보다 다양하고 이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한군데 모아 놓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개성 강한 캐릭터들은 그냥 대충 놓아둬도 서로서로 사건과 사건을 만들어내고 매력적인 이야기와 플롯을 갖추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드라마의 매력적인 요소를 아낌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리지가 다아시에게 하는 대사 중 하나를 옮겨보면
건방지다고 해도 될 거예요. 거의 그랬으니까요. 실상은 말이에요, 당신은 예절이라든가, 경의라든가, 괜스러운 친절 같은 것이 지긋지긋했던 거예요. 언제나 당신의 인정만 받으려고 말을 건네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이 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여자들하고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이 번쩍 나서 흥미가 생겼던 것이죠. 당신이 진정으로 상냥한 분이 아니었다면, 그 때문에 잘 미워했을 거예요.
그러니깐 왜 요즘 드라마에서 재벌 2세쯤 되는 남자가 가난하고 당찬 여자를 좋아하는지, 혹은 볼품없는 아줌마와 사랑에 빠지는지 리지가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 그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좀 더 정교하다. 다아시가 리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다아시는 정말 오만해 보였고 언뜻언뜻 리지에 대해서 애정이 어린 눈길을 보내긴 했어도 그런 전개는 예상 못 했다기보다는 뻔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이 소설의 인물이 그저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제인이 리지에게 언제부터 그를 사랑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의 대저택을 봤을 때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말을 꺼낸다. 리지의 캐릭터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드라마를 위해서 가공된 그렇고 그런 인물이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또 이 소설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장치)를 설득력 있게 설치하고 나서 그 결과 전개되는 사건들을 조목조목 잘 나열하기 때문이다.
다아시는 정말로 오만했고 또 사교성이 떨어졌고, 비열한 위컴은 적절하게 참견을 했고 리지의 편견과 오해는 억지스러움이 없다. 그것이 해소되는 과정도 매우 설득력 있다.
예를 들어 다아시가 제인과 빙리의 결혼을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베넷 집안 사람들의 무분별한 태도와 사람됨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지가 로징스 대저택에서 무례하고 분별력 없이 구는 캐서린 영부인의 태도에 조카인 다아시는 분명히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에게 자신의 오만을 돌이켜 보게 했을 것이다. 이런 감정과 사건이 서로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서 읽을 때 억지스럽거나 뻔한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완벽한 드라마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부분의 위대한 소설이나 영화는 이렇듯 완벽한 모범을 보인다. 그래서 후대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런 모범에서 잘해봐야 아류작 정도의 평가를 받게 할 뿐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이런 부류의 드라마가 뻔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앞서 말한 다양한 이유가 없거나 몇몇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충실히 재현해봤자 그건 이미 200년 전에 써먹은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오만과 편견>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의 결말에 대해서도 그렇다. 행복한 그저 그런 결말 같지만, 사실 그 안을 자세히 들려다 보면 18세기 영국 여성이 처한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부모로부터 적당한 상속을 받을 수 없는 자식, 그것도 여성은 결혼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기회고 잘못된 결혼, 즉 리디아와 위컴의 예처럼, 적절한 결혼 제인과 빙리의 예를 모두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리지와 다아시의 결혼은 좀 특이한데, 그건 작가 나름의 최선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소설이 끝나갈 부분, 오빠에게 절대적으로 순종적인, 그것은 결혼 전에 불미스러운 일로 말미암아 더더욱 순종적인 조지애나는 오빠를 대하는 리지의 태도에 경악했지만, 여자도 남편에게 막 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그것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비록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사랑스럽고 스스럼없는 결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덧붙여서, 같이 보면 좋은 책.
하나는 <영국인 발견 - 케이트 폭스 / 학고재>이다. 영국인 문화 인류학자가 쓴 책인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영국인들은 콜린스처럼 온갖 것들에 칭찬을 늘어놓고 칭찬에 칭찬으로 응대하는지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교 말고도 영국 문화와 관습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같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하나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 해냄>으로 이건 그냥 가볍게 읽을 만하다. 오만과 편견을 살짝 비틀어서 개작한 건데, 사실 그렇게 신선하진 않았다. 다만, 위컴과 리디아, 콜린스와 샬럿 콤비는 무척 흥미로우니깐 읽을 만하다.
또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게 영화와 드라마인데…. 사실 난 두 개 다 좋아해서 어느 것이 더 좋다 라고는 말 못하겠다. 영화는 좀 더 감각적이고 전개가 빨라서 매력적이고 특히 리지역을 맡은 여배우가 무척 매력적이다. BBC의 드라마는 원작 소설에 아주 충실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둘 다 각각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오만과 편견 팬이라면. 둘 다 챙겨 보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