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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폭풍의 언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평점 :
예전에 비디오를 빌려보던 시절, 친구들과 비디오를 보려고 모였는데, 대여한 영화를 보고 있자니, 첫 장면부터 정말 싫어하는 액션 배우가 등장하는 거였다. 친구 대부분도 이 액션배우를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이 배우가 찍은 거의 모든 영화가 액션에만 치중해서 지루하고 지겹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비디오를 빌려온 녀석에게 온갖 불만과 타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배우가 영화 초반에 갑자기 죽어버렸다. 세상에? 죽다니. 그래도 주연급 배우인데, 영화 <사이코>처럼 유명 배우는 초반에 어이없이 죽어버린 거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정말 너무 재미있어졌다. 그 배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폭풍의 언덕>에서도 히스클리프가 죽자 소설이 재미있어졌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히스클리프는 그 액션배우처럼 극의 초반에 비명행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소설이 끝나갈 때쯤에나 죽는다. 그전에는 우리 모두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힌다.
예를 들어 <폭풍의 언덕>을 검색하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격렬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보게 된다. 하지만, 난 책을 계속 읽으면서 그게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다. 오히려 캐서린이 죽은 후에 히스클리프의 악행이 구역질 나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등장인물조차도 그다지 매력적이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깐 이 소설은 굉장히 특이한 소설임이 틀림없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오만과 편견>이 생각났다. 왜 그런가 하면 둘 다 영국 소설이며 비슷한 시기에 여성작가에 의해 쓰였고 둘 다 영국의 어느 시골이 배경이다. 도시에서 내려온 오만한 사내가 나오는 것까지도 똑같다. 물론 그 사내는 <오만과 편견>에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폭풍의 언덕>에서는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동안 지나치게 세부묘사에 뛰어난 입담꾼 넬리(가정부)의 기묘한 이야기를 듣는 구실을 할 뿐이다.
또, 이야기 자체나 등장인물도 서로 너무 다르다. 어쩜 달라도 이렇게 다를까 싶다. 이게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나라를 배경으로 쓰인 게 맞나 싶다. 소설의 도입부를 읽으면 이게 영국이 배경인지 상상하기도 어려워진다. 마치 환상소설의 어느 한 구절을 읽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게 분위기는 생경하고 그로테스크 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아는 영국인은 다 어디로 갔지? 만나면 날씨 얘기를 하면서 안부를 묻고 칭찬을 시작하면 그걸 받는 대신 자신을 깎아내리고 다시 상대를 칭찬하고 그 상대는 또 칭찬을 받으면서 자신을 비하하며 다시 칭찬으로 응수하고…. 이런 영국인 말이다.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에 쓰인 이 소설은 마치 중세의 어딘가쯤에 쓰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초반에 느낀 호감?도 잠시 막장 드라마의 인간관계처럼 꼬인 사건들을 지켜보다 보면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뭔가 개운하지가 않다. 복수극은 대부분 흥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수극을 좋아한다. 유명한 고전이나 인기있는 이야기 중에 복수극이 많은 건 그래서이다. 근데 이 복수는 뭔가 좀 이해 불가한 게 많다. <폭풍의 언덕>을 읽는 내내 드는 의문점은 어떻게 그렇게 두 주인공이 열열하게 사랑에 빠졌는가이다. 그래서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으며 또 평생을 증오와 복수에 빠지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그 짧은 어린 시절과 헤어지고 나서 유부녀가 된 캐서린과의 짧은 만남에서 그들이 어떻게 지독히 서로 사랑했는지, 그건 단지 운명적인지, 아니면 억지스러운 설정인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두 집안은 어쩌면 그렇게 서로 얽히고 얽히는지도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마지막 한순간에 번쩍하고 번개처럼 이해된다. 남은 아이들, 캐서린(캐서린과 린튼의 딸)과 헤어튼이 마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유년시절 학대받고 서로 의지했고 그 속에서 사랑을 싹 틔웠던 걸 연상케 한다. 히스클리프는 그 둘(캐서린과 헤어튼)을 학대하고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고 나서 그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닫게 된다.
이 유명한 고전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독히 비극적 이야기와 시적인 표현인 것 같다. 비극적 이야기는 정말 비극은 맞긴 하지만…. 비극에는 읽는 사람이 그 비극을 동정하고 측은하게 여겨야 하는데, 사실 나는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 사랑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가? 마지막에 가서 조금은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오랜 세월동안 서로 증오하고 죽일 만큼 그렇게 대단했던가? 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시적인 표현은 사실이다. 이 소설의 180년이 넘었는데, 저자가 시인답게 곳곳에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 물론 소설의 분위기가 어두워서 그 아름다움도 모두 어두운 편이다.
캐서린이 죽고 그녀의 무덤을 파는 히스클리프를 묘사한 문장을 보면 엽기적인 장면인데도 표현이 매우 아름답다.
나 혼자였고, 또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2야드밖에 안 되는 퍼슬퍼슬한 흙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난 혼잣말을 했어. ‘다시 한 번 저 여자를 이 팔로 안아보자! 만약 그녀의 몸이 차면 이 북풍 때문에 내 몸이 차가워진 거로 생각하고,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잠들어서 그런 거로 생각하자.
개인적으론 이 소설을 읽는데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마지막 부분에 가서 약간은 이 난폭하고 지독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의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면 이해한 것 같다. 그리고 갈등이 해소되고 그나마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썩 괜찮은 결말인듯싶어.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