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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 - 중국의 잔혹성과 서구의 시선 ㅣ 동아시아와 그 너머 1
티모시 브룩 지음, 박소현 옮김 / 너머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한 시대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가치가 다른 시대에는 분명히 기괴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 ‘문화’ 또는 ‘문명’의 폭넓은 범주 안에도 매우 다른 사고방식들이 지속적으로 공존할 수도 있다. 아마도 한 사회의 역사 안에 다양한 신념들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한 사회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유구한 역사의 끝에 서 있다는 감각-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본문 454p)
이런 서평에서 본문 내용을 처음부터 인용하는 건 아무래도 세련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장이 이 책을 힘들게 읽고 얻었던 해답 같았다. 나는 몇 차례 능지처참에 대해서 블로그에 소개하려고 했다. 일단 사진을 한 장 올리고 관련된 글을 쓰려고 했다. 왜곡되지 않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건 되게 어려운 일이다. 현대에 사는 내가 그 의미를 똑바로 전달하기에는 아는 지식이 너무 없다. 나는 능지처참에 대한 기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왜 그런 형벌이 시행됐고 또 누가 그 대상이었는지 얼마나 시행되었는지? 감형은 없었는지? 단편적인 정보는 이 책 빼고는 한 번도 읽지도 보지도 못했다.
또 어렵게 내가 전보단 덜 왜곡된 정보를 블로그에 쓴다고 해도 그것은 충분히 왜곡되고 날조될 수 있다. 지금 당장 '능지처참'으로 검색하면 사실적이지 않은, 혹은 서구에 의해서 변형된 능지처참에 대한 글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사진 이미지 자체도 우리에게는 이해 불가다. 많은 사람 앞에서 사람을 조각내는 것을 찍은 사진을 보자마자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쉽게 선언하고 만다. 그리고 야만적이고 더러운 짓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나도 그렇다. 책을 읽으며 그 안에 사진을 들려다 볼수록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행위는 너무나 위험하다.
다른 걸로 돌려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요새 텔레비전에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 불과 십 년 전에는 이상하게 여겼던 일이 무척 자연스럽게 보인다. 여성 가수들이 하나같이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10년 전과 비교해보라. 10년 전에 아마 텔레비전에서 그런 가수가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앞서 말한 대로 한 시대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였던 가치에 의해서 그 일은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 가치도 변했다. 지금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어째서 그것을 쉽게 받아 드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가치가 불변할 정도로 확고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킬만한 다른 가치와 공존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그 가치는 변화고 받아들여지고 수용된다.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더욱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고 무감각해졌을 때 그것은 그 시대의 가치가 된다.
옛날에 중국에서는 특정한 범죄, 즉 반역이라던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 능지형이라는 극형으로 다스렸다. 능지형은 일반적으로 서양에서는 수천 번을 토막 낸다고 해서 얇게 저민다고 잘 못 알려지기도 하고 천천한 죽음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사실 어떻게 형이 집행됐는지 풍부한 자료는 없다. 다만, 대다수 사진이나 글은 전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능지처참은 서양인의 시선에서 볼 때 살점을 수천 번 도려내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잔혹한 형벌로 알려졌지만 사실 능지처참은 신체를 훼손함으로써 유교적인 사회의 전통과 가치의 기준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이것은 서양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동양인, 그것도 유교적인 사회 안에서 자란 동양인은 바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문신을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가는 사진 동호회에서 여성의 몸에 작은 문신이 있는 것에 대해 어떤 남성 회원은 덧글로 즉각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것은 그 남성이 이성에 대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성이 유교적인 사회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 조선 시대 선비는 머리도 안 자르고 살았다. 문신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하는 행위므로 불쾌하고 범죄자나 할만한 표식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치관은 변했다. 아니 적어도 변하고 있다. 이런 가치관은 유교적인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능지처참의 잔혹성은 시각적이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물려받은 육체를 조각내서 훼손함으로써 그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가치관을 훼손하는 행위다. 즉 육체의 훼손은 고통이나 고문을 목적으로 한것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 가치의 죽음인것이다.
그러나 당장 능지처참에 관련한 사진을 올려놓는다면 이런 이해는 물 건너간다. 거기에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된 정보는 이런 몰이해를 더 부추긴다.
이 글에서 내가 능지처참이라는 오래된 형벌을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만약 우리 시대의 가치관으로 평가한다면 나도 당연히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능지처참의 왜곡된 이미지는 서구가 제국주의 깃발을 높이 들었을 때 시작됐다. 말하자면 어떤 나라를 침략하고 싶어서 대중을 선동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나라의 이해 못 할 문화를 앞뒤 다 잘라버리고 가져와서 대중에게 보여준다. 이상한 머리모양이라던가 이해 못 할 의식이나 종교, 법체제 같은 게 아주 좋은 아이템이다. 그중에 능지처참은 아주 이용해 먹기 좋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서구도 똑같이 잔인한 형벌을 행했지만, 이제는 형벌이나 고문을 없애고 범죄자를 감방에 처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곤장은 매우 흥미로웠을 것이다. 고문은 더 그럴 테고 참형과 효시, 연좌제, 능지처참은 특히 더 흥미롭고 이용하기 좋았을 것이다. 야만인들이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가 이 야만인을 문명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제국주의자들의 좋은 구실이며 대중을 선동하기 손쉬운 방법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 문화가 한 문화를 침범하고 짓밟을 때 이런 식의 왜곡된 날조가 시작된다. 굉장히 흥미로운 것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며 조선시대까지 거의 비슷한 형벌을 집행한 우리도 이런 왜곡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중국의 잔혹성에 대한 서구의 왜곡된 시선이 흥미로웠던 것보다 이 부분이 더 흥미로웠다. 우리는 언제부터 중국에 대해서 이런 왜곡된 시선을 가졌을까? 조선시대는 분명히 아니다. 해방 이후? 아니면 분단 후? 아마도 이 부분은 학자들이 연구해야 되겠지만, 나의 짧은 지식으로 추론해본다면 아마도 분단 후, 독특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북으로 분단 후 서구인 미국은 우방이었지만 중국은 우리의 적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변했지만, 여전히 중국이 우방은 아니다. 중국의 왜곡된 이미지는 어쩌면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금 홍콩 영화를 보면 중국인이 잔혹하며 복수에 목을 매는 이상한 민족으로 오인하곤 한다. 특히 무협 영화에서 흔하게 잔혹한 죽음이 나오고 아버지나 스승의 복수를 하려 하는 주인공을 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서구에 의해서 변형된, 즉 고착화 된 중국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된 것은 아닐까?
여전히 우리는 웹에서 중국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중에 상당수는 사실과 거리가 멀고 또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이 많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다뤘지만, 중국의 사형에 대한 이미지중에 진짜 사형인 것처럼 올려놓은 사진이 사실은 연출된 것도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이미 서구에 의해서 왜곡되었거나 우리 자신이 왜곡시킨 것이다. 또 그런 왜곡은 서로 단절된 문화일수록 더 손쉽게 일어난다. 중국과 우리는 아는 게 많지 않다. 중국 여행이 가능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박지원이 중국을 다녀와서 <열화일기>를 쓰던 시대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마치 각각 다른 나라의 일같이 느껴진다.
이 책은 무척 흥미롭다. 정말 오랫동안 읽었는데, 중간마다 어려운 용어가 조금씩 나와서 신경을 긁긴 했지만 대체로 짜임새가 있고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능지처참은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졌던 형벌이다. 우리는 그걸 서구인보다 더 빨리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은 대다수 사람은 이해하고 있지 않을 거다. 나도 책을 읽기 전에 그랬으니깐, 능지처참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이 책에서는 직접 문헌을 가지고 설명을 한다. 거기에는 왜곡된 이미지나 지어낸 이야기가 없다. 있는 그대로다. 또 그런 능지처참이 서구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되고 날조되었는지 그 과정이 쓰여 있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서구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한국의 형벌의 역사도 탐구되길 희망했다. 나는 서구인들이 한국 사극 드라마에 고문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모반을 하면 3대를 멸족하거나 노비로 삼거나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했다. 또 그전에 우리는 그걸 어떻게 이해하는 걸까? 앞서 말했듯이 어떤 문화나 가치관은 그 시대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를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 드렸다고는 볼 수 없다. 말 그대로 다수의 사람만이 받아 드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전부 뭉뚱그려서 비약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치관에서 그것을 이해할 뿐이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꼭 안된다는 말은 아니고 굳이 할 필요성은 없다.) 받아들이려고 하는 순간 혐오하고 부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개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권의 사람이 우리를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 사람들이 우리의 음식문화를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좀 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지 이해만 하면 된다.
능지처참에 대한 이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의 가치관에서는 단지 잔혹하고 야만적일 뿐이다. 만약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 책을 읽어볼 준비가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