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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사람들
아일린 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즐거운상상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왜 우리나라엔 ‘아일린 파워’의 책이 별로 번역이 안 된 걸까? 아마도 우리는 영웅 위주의 역사를 더 선호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중세의 사람들'은 2007년에 출간이 되었다.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이고 간단히 비교해보니 본서에는 <중세 이전의 사람들>이란 챕터가 추가된 증보판이다. 원서는 1924년에 출판됐고(근데 전혀 옛날 느낌이 안 난다.) 증보판은 1963년에 출판됐는데 첫 번역서는 왜 증보판으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희한한 일이다. 좀 엉뚱한 생각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코니 월리스를 떠올렸다. 특히 "개는 말할 것도 없고"라는 장편 소설 말이다. 유머러스하고 아름답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리고 옛날의 일들을 생생하게 다시 재현했다는 점도 똑 닮았다.
누가 이걸 역사서로 논문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문장이 매우 좋다. 문장이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다. 거기에 유머가 곳곳에 베어 있어 읽으면서 혼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려운 단어도 거의 안 나오고 (물론 수녀원장이나 상인, 농민을 다뤘으니 그것에 대한 전문용어는 나온다. 하지만, 설명이 충분함으로 이해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중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손에 잡힐 듯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앞서 코니 월리스 얘기를 했지만, 이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작가가 작품을 쓰려고 도서관에서 아주 살림 판을 벌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런 점이 비슷하다. 한 문장 한 단락을 쓰려고 얼마나 많은 고서를 뒤적거렸을까? 책 뒤에 지혜와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진다고 썼는데 아주 딱 맞는 표현이다.
중세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게 뭘까? 왕, 기사, 공주, 성, 전쟁, 전염병, 봉건사회 등등 어둡게 칙칙한 것투성이다. 말로만 들으면 도대체 그런 세상에 사람이 살아갈 수나 있을까? 의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안개가 하나둘씩 거친다. 농노, 여행가, 수녀원장, 가장과 주부, 양모 상인, 직물업자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고 만다. (사실 여행가는 좀 실망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것이긴 했지만 나는 좀 더 평범한 여행가를 따라가고 싶었다.) 물론 이런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있을 거다. 앞서 말했듯이 아직도 배우고 읽는 역사에는 평범한 사람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기존에 역사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흥미가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좋았다. 앞으로 아일린 파워의 책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같은 출판사에서 ‘중세의 여인들’이란 책도 같이 번역됐다.)
올해 최고의 책 후보에 올려둔다. 사놓고 안 읽은 책이 너무 많지만 뽑긴 뽑아야 하니깐…. 간만에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은 책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번역도 좋았고 양장이라 좀 그랬지만, 책 자체도 나쁘지 않았는데 출판사가 좀 성의없어 보였다. 읽다가 갑자기 모르는 단어 옆에 ‘(설명추가)’라고 되어 있지 않나. 갑자기 주석번호가 사라지지 않나. 아무리 찾아도 없다. 주석이 없는 일도 있다. 분명히 번호는 있는데 주석 페이지에 주석이 빠졌다. 오타 나는 거는 솔직히 사람이 하는 일이니 아주 많지만 않다면 봐줄 만하다. 근데 이건 좀 많이 심했다. 좀 더 꼼꼼하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아쉽다.
또 우리의 역사서도 좀 이런 게 많이 나왔으면 싶다. 읽으면서 아쉬웠던 게 유럽의 역사도 흥미롭지만 그래도 우리 땅에 살았던 조상의 역사가 더 흥미롭지 않겠는가? 이제 왕이나 장군의 역사, 전쟁의 역사 말고 삶에 대한 역사를 좀 읽고 싶다.
덧. 여담이지만 이 책이 1924년에 쓰였고 우리나라에서 대단히 많이 팔리는 인류 이야기(헨드릭 빌렘 반 룬)는 3년 전인 1921년에 쓰였다. 단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난 아이들이 '중세의 사람들'을 읽기에는 좀 어려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지도…….) 물론 두 책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좀 많이 다르다. 인류 이야기는 전체적인 큰 그림이고 '중세의 사람들'은 세부 그림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중세의 사람들'가 역사에 좀 더 많이 접근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역사가가 역사를 해석할 때 얼마나 편협해질 수 있다는 걸 가만해 본다면 '중세의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으니 말이다.
책갈피-
오늘날 역사가들은 전쟁과 왕자들의 음모 이외에도 과거의 사회사에 대하여 흥미를 갖는다. 현대의 저술가에게 14세기는 백년전쟁, 흑태자와 에드워드 3세의 세기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그는 영국내의 농노 제도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더 중시한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프랑스의 여러 주를 놓고 벌인 정쟁보다 더 획기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여전히 유명한 사람을 칭송한다.
역사의 페이지에 영광과 로맨스를 가져온 위대한 인물을 생략해 버린다면, 위인뿐 아니라 사람들 전체 혹은 어느 이름 없는 묘지에 지금 잠들어 있는 무명의 대중들이 역사에 등장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낳은 아버지들이 마침내 제대로 평가받게 되었다. 액튼경(영국의 역사학자)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위대한 역사가는 이제 주방에서 식사를 한다.
중세 사람들 - 아일린 파워 p.74
이 '오늘날'이라는 건 영국의 1920년대를 지칭한다. 이 책이 쓰인 연도는 1924년도다. 어렸을 때 국사 시간에 조선의 역대 왕을 모두 외운 적이 있다. 물론 나같이 외우는 건 젬병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참 고생 많이 했다. 세계사도 그렇지만 국사도 참 지루하고 재미없는 과목이다. 만약 역사에서 보통 사람의 삶이 나왔다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니깐 삼국시대를 공부할 때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광개토대왕이 어디까지 영토를 넓히고 이런 거보다 그 시대 평민은 무슨 일을 했고 뭘 먹고 살았고 주거환경은 어땠고 그런 시시콜콜한 걸 배웠다면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다면 어땠을까? 시험 문제 내기 참 곤란했을 거다. 그때의 교육은 그렇게 단순 암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왜 그렇다면 시험을 바꾸거나 시험제도를 폐지해서라도 좀 더 '오늘날'에 걸맞은 역사교육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바꿨을까? 모르겠다. 내가 중고생의 교과서를 본 적이 없고 수업을 참관한 적이 없어서….
서점에 가면 전부 왕이나 장군들 이야기만 있는 걸까?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세계사를 요약한 책을 보면 얼마나 지루한지 끝까지 읽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 책 안엔 누가 누구를 정복하고 전쟁하고 죽이고 그런 내용밖엔 없다. 물론 그런 역사가 하찮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역사란 게 그것보다는 할 이야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그래도 '오늘날'에 들어맞는 책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여전히 그렇지 않은 게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이제 왕의 역사는 시시콜콜한 사극 드라마로 충분하다. 알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자세히는 알고 싶지 않다.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다.
우스터셔의 한 사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 마당에서 밤새 ‘애인이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후렴구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 대는 바람에 한숨도 못 잤다. 그 후렴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사제의 머릿속에도 깊이 박혀버렸다. 그 다음 날 아침 미사 때 그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는 대신, “애인이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해버렸다. 그것은 곧 심각한 스캔들이 되었고 연대기에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중세 사람들 - 아일린 파워 p.95
아, 웃겨. 얼마나 밤새도록 그 노래를 들었으면..ㅋㅋㅋㅋ 로마가 쇠퇴하자 중세가 들어섰다. 중세는 야만의 시대라고 알려졌는데 로마가 분열되고 각종 야만인의 왕조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또 무슬림의 지하드도 유럽을 휩쓸었고, 어쨌든 중세는 봉건사회고 초창기 봉건사회의 농민착취는 주교가 앞장섰다. 왕에게 영지를 받고 조직적으로 착취해서 세금을 나라에 바쳤다. 대신 주일은 쉬게 했는데, 착취 대상의 농노도 교회에 꼭 참석하게 했다. 그날은 미사가 끝나면 교회 앞마당에서 온종일 놀며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게 전통이었다. 한마디로 한 주 내내 착취를 당하다가 하루 맘껏 노는 거다. 그래서 우스터셔의 한 사제 이야기도 나오게 된 거다.
실제로 주교는 마당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까지는 허용했지만, 노골적인 가사의 노래는 금지했다고 한다.1지금 들으면 뭐 그다지 노골적이고 방종하게 들리지 않지만, 그땐 그랬나 보다.
로마가 이교도였을 때는 번성했지만, 주님을 받아들이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사실 중세의 주님은 구원과 자비가 아니라 권력과 착취를 의미했다. 혹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해당 종교인들은 너무 분노하지 마시라. 옛날에 그랬다는 거다. 최소한 옛날엔 그랬다. 요즘엔 어떤지는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