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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일본 문학 팬들이 믿고 읽는 번역가로 이름 자체가 추천 기능을 하는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권남희 씨.
1990년 25살부터 대리 번역으로 번역을 시작해
1991년 호시 신이치의 <신들의 장난>을 번역하면서 저자 이름의 번역서가 출간되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마스다 미리, 오가와 이토,
무레 요코의 소설과 에세이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 현대 작가의 작품을
우리 말로 옮긴 28년 차 번역가입니다.
2014년 번역가의 삶과 생활 이야기를 담은 <번역에 살고 죽고>를 발표한 후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지 한번 볼게요.

안자이 미즈마루는 30여 년을 무라카미 하루키 책의 삽화로 공동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7년의 나이 차이에, 성격이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절친으로 지내고 있대요.
몇 해 전 안자이 미즈마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는 추도문에서 그를 이렇게 표현했답니다.
'내가 마음을 허락한 몇 안 되는 사람'.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에서 낯선 일러스트를 보면서
안자이 미즈마루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저자.
내가 마음을 허락한 사람은 누구인지 떠올리게 되네요.
유명한 토익 강사가 TV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지금 인맥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당신을 인맥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가? 인맥이란 양쪽이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성립되는 말, 일방적으로 기대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민폐 덩어리일 뿐이다."
라는 말을 하는데, 저자도 저의 마음에도 쏙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수많은 SNS 팔로어 중 한 명일 뿐인데,
나 혼자 인맥이라고 믿고 있었던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번역하던 소설에서 아흔 살 먹은 할머니가 이런 독백을 합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흑백텔레비전처럼 색을 잃어버렸다.'
그 표현에 가슴이 아려 일하던 손을 멈춘 저자.
살다 보면 흑백텔레비전처럼 색을 잃어버리는 시기가 있지요.
인생의 마지막에 삶을 돌아볼 때 '내 인생은 컬러텔레비전처럼 때깔 좋았다'라고
기억할 수 있었으면 저도 바랍니다.
짱짱한 화질의 컬러가 죽을 때까지 나오도록 AS도 받으면서요.
저자가 번역한 책들의 역자 후기 끝줄에서 한 살씩 먹어 가던 딸은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취준생이 되었답니다.
취준생 딸과 갱년기를 겪는 저자의 아슬하면서도 따스한 말과 행동,
딸 없는 저한테는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저자의 일상은 바쁘면서도 무료하대요. 메일 한 통, 카톡 한 줄 오지 않는 날도 있대요.
태생이 집순이인데다가 직업까지 마감, 마감하는 일이다 보니
인간관계가 황폐하다고 말합니다.
외출 준비의 귀찮음보다 외로움이 낫고, 나쁜 일로 연락 오는 것보다
휴대전화 조용한 게 낫고, 즐겁고 신나는 일 없지만
심심했던 어제처럼 별일 없는 오늘이 낫다고.
내일도 무료한 오늘과 같은 날이면 좋겠고,
다음 달도 맹숭맹숭했던 이번 달과 같은 달이면 좋겠다고.
이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대요.
어찌 보면 무료해서 심심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저 또한 이렇게 살고 이런 생각으로 지내고 있으니 완전 공감이 됩니다.
남이 보기에 너무 지루해 보일까 싶어 소소한 행복을 느껴보려고
이것저것 찾아보지만, 남이 볼 땐 저도 행복해 보이나 봐요.
하지만 알고 보면 나도 남들도 마냥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행복할 땐 남을 보지 않아서 그렇게 느낄 뿐이죠.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정의를 보고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란 생각을 하게 된 저자처럼
저도 좀, 아니 조금 더 귀찮지만 평범하게 행복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