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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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나는 이러한 책을 읽어 왔다(청어람 미디어, 2001)에서 밝히는 다치바나식 독서론은 독특하다. 정독하고, 통독해야 한다는 기존 통념과는 달리 그는 많이 읽고, 빨리 읽고, 대충 훓어본다. 서평을 '비평형'과 '소개형'으로 나누고 자신은 후자라고 말하는 것과 그의 독서법도 일맥상통한다. 말하자면 그에게 책이란 정보의 집합체이다. 여기서는 그 책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빨리 뽑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고전에 대한 세간의 존경어린 시선에도 부정적이다. 고전, 특히 문학작품의 경우는 현실에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아 읽지 않는다고 말하고 과거의 지의 총체는 고전보다도 최신 보고서 속에 확대되고 집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칼비노의 고전에 대한 정의 중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왜 고전을 읽는가])를 떠올려 볼 때 하나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상이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까지 한다.

다치바나의 주장이 기존 통념을 뒤없는 참신한 발상이긴 하나 그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기는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치바나의 말대로 문학 작품을 사건 위주로 볼 때 그러한 사건 사고는 세상에 널려있다. [보봐리 부인]은 불륜드라마이고 [여자의 일생]은 신파로 가득한 인생극장이며 [로리타]는 아동성애자의 범죄극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특별한 것은 작가가 그 '특수한' 사건에서 인류의 근본적 문제들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위대한 철학과 문학은 늘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이끌어 낸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범죄와 감옥을 소재로 한다. 이 정도는 '범죄백과'식의 르포집에서 더 잘 다룰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감시와 처벌 제도의 근원을 찾아 내려가면서 어떻게 권력이 인간을 훈육시키고 관리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은 늘 미국 남부의 한 작은 마을, 그중 한 가족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마을과 가족에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몰락한 가치체계를 붙든채 함께 매몰되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사회의 인간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고발한다. 과연 이러한 독서가 다치바나의 독서법으로 가능할까?

결국 독서법도 개인의 취향일 뿐, 정답은 없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의미를 탐구하느냐, 아니면 책을 유용한 정보를 뽑아내는 수단으로 삼느냐를 선택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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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평전 - 지울 수 없는 얼굴, 꿈을 남기고 간 대통령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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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자선전을 비롯한 그에 대한 수많은 책이 나왔다. 그리고 3주기를 맞아 또 한권의 책 [노무현 평전](책보세,2012)가 나왔다. 저자는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신채호,김구,장준하,김대중,리영희등의 평전을 집필한 김상웅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대기가 각종 매체를 통해 어느정도 세상에 알려져 있는 만큼 또다른 평전이 나올 이유가 있는가 하는 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이러한 문제제기를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평전을 집필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여전히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고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방인'이었던 인간 노무현을 재조명하기 위해서이다.

 

노무현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있어 독특한 인물이다. 고졸 학력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해 안정된 변호사 생활을 하던 중 35세의 늦은 나이에 사회문제에 눈을 뜨고 시민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력도 그렇지만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그는 늘 튀는 행동으로 주목받고 주류에 의해 배척당하던 '변방인'이었다. 정치 공학, 정치적 제스춰 등의 말이 의미하듯이 대부분의 한국 정치인들이 본심과는 다른 일정한 패턴에 맞추어 말하고 행동했던 것에 반해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늘 직설적이었고 상황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지 않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선택을 함으로써 모두를 당황시키고는 했다. 국회의원이었을 때도 낙선 후 정치 낭인이었을 때도 국민은 그를 사랑했고 차세대 정치인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여든 야든 기존 정치권은 학벌도 낮고 돈과 조직이 없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같은 당 내에서도 늘 무시당하는 비주류였고 그런 그가 민주당의 대권주자를 거쳐 대통령이 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드라마였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바람'으로 탄생한 최초의 '시민' 대통령"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저자 김상웅은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들이 안팎의 권위주의와 기득권의 반발에 의해 좌초된 데 아쉬움을 표한다. 나아가 FTA나 비정규직 확대, 이라크전 파병등의 실정에 대해서는 비판하기도 한다.

정치인은 의도가 아닌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고 인간 노무현에 대한 호오가 정치인 노무현의 실책까지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노무현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거나, 너무 빨리 대통령이 된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민도 깊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운명이다] P332 재인용)

 

참여정부의 실패와 그 이후 MB정권 집권으로 인한 민주주의 후퇴의 모든 책임을 노무현 개인에게 지우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 인간 노무현의 생애를 돌아보면 한 개인으로서의 비극이 아닌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질곡이 보인다. 한국 정치사의 심각한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도출시킨다는 점에서 노무현은 한국 사회의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적 개인'이란 미학자 루카치가 원래 근대 소설의 주인공 유형을 일컫는데 사용한 용어로 '시대와의 불화'를 통해 그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는 인물을 말하며 그는 그 시대를 포용하여 더 좋은 전망을 열도록 애쓴다.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다루어지는 것은 노무현의 실패가 곧 진보의 실패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노무현과 참여정보는 진보진영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실상으로는 참여정부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맹공을 당했다. 갈피를 못 잡은 것이 참여정부의 실책이라 해도 이는 또한 한국사회의 보수/진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불명확한 개념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진보/보수를 떠나 고졸의 노무현은 학벌 위주의 한국 사회에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고그의 탈권위적인 말투와 행동은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대통령답지 않는 경박한 인물이라는 뭇매를 맞았다. "새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에 불과했다는 그의 한탄대로 노무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은 구시대(근대)와 새시대(현대)가 혼재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 김상웅은 노무현을 "정치적 소수파로서 우리 사회의 뒤틀린 권력구조 안에서 정치보복성 토끼몰이에 갇혀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패배자"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김구, 장준하와 같은 "위대한 패배자"였다고 평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함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모순점과 그 모순을 딛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장 잘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무현이라는 인물과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 괴벨스 등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를 펴낸 출판사 [교양인]은 그 기획의도에서 "좋은 평전은 저자가 인물의 심리를 날카롭게 드러내 보여주면서도 객관성을 잃지 말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독자가 인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인물도 인간이 아닌 무엇으로 비쳐서는 안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김상웅의 [노무현 평전] 역시 "객관적인 관찰과 심리 분석을 토대로 이루어진 주관적 평가"(교양인 기획의도 인용)에 최대한 충실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고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죽음을 조장한 이들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어 감정적으로 흐르는 부분도 다소 있으나 저자는 '인간 노무현'의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의 심리 상태와 외부 상황에 대해 사실적으로 꼼꼼히 기술해 낸다.

'대통령 노무현'을 넘어 '인간 노무현'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혹은 시중에 나와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저서들이 너무 단편적이거나 주관적이라고 느낀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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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주니어 클래식 11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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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교수 강독회에 다녀왔다.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출판에 맞추어 열린 행사이다. 주니어 용으로 자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라고 하나 강의를 옮겨놓은 듯한 구어체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담고있는 내용은 결코 녹록치 않다. [자본]자체가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책인 것은 사실이라 아무리 쉽게 풀어놓는다 해도 한계가 있는 듯 하다. 다행히도 저자의 강의를 같이 들은 것이 책 내용을 따라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인문학 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저자의 집필 의도라고 한다. 강신준 교수 역시 “왜 맑스가 자본을 썼는가”를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떤 책이든, 텍스트는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담고 있다. 맑스 역시 1800년대 중반 유럽을 휩쓸었던 노동자 혁명의 발발과 처참한 실패를 목도하면서 의문을 품게 된다.

- 혁명은 왜 발발했으며 왜 실패했는가?

- 성공한 부르주아 혁명(프랑스 대혁명)과 노동자 혁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혁명의 발발]

혁명이 일어난 것은 결국 불합리성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교환이 끼어들어 두 가지자 분리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등가 교환의 법칙이 깨지면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시간으로 만들어낸 가치를 온전히 돌려받지 못하고 이 잉여가치가 자본가에게 이전되면서 불일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노동자들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강신준 교수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교환”이다. 저자는 바로 이 교환의 개입으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체제가 자본주의라고 본다. “교환”을 달리 말한다면 오늘날의 “유통업”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3차 산업이 비대해지면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실물경제보다 금융(돈의 교환)과 유통업(물질의 교환)이 주를 이루는 기형적인 사회가 되어 버렸다. 상행위는 중간 전달자일 쭌 실지로는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혁명의 실패]

그렇다면 1848년의 노동자 혁명은 이전의 부르주아 혁명과는 무엇이 달랐기에 실패한 것일까? 강신준 교수는 혁명이 성공하려면 혁명가들의 의지 뿐만이 아니라 필연적 요소가 반드시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필연”은 자연법칙, 즉 과학이다. 말하자면, 혁명 당시 노동자들은 분노에 차 있었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일을 해도 가난한지, 어떤 속임수가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혁명의 실패에 낙담한 마르크스는 런던 도서관에 아예 돗자리를 깔고 그 윤리-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원리, 노동자들을 평생 노동자에 묶어두는 원리-를 발견해내는 데 매진한다. 그 결과로 그가 찾아낸 해답이 이것이었다. 가치(상품가격)은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생산과 소비가 교환의 개입에 의해 분리되면서 그 가치 중 일부(잉여가치)가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에게 이전된다는 것, 그러므로 생산에 사회적 성격을 도입하여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강신준 교수가 모순을 해소할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관계의 변화라고 보는 강 교수는 자본주의에서 또다른 체제로 이행하려면 연대, 협력이 개입하여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연대는 민주주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강 교수가 굳이 혁명이 아닌 개혁을 통해서도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점들]

그러나 맑스의 시대가 지금과 다르고 [자본]에 담긴 도식들도 이론으로 보면 그럴 듯 해도 막상 현실로 끌고오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 오늘날 가격이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가?

- 생산직보다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관리직, 사무직,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어떻게 가치를 생산하고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 과거에 자본가들은 노동시간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엔 오히려 노동시간을 줄이고 입금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일자리를 얻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현재의 노동시장에 맑스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노동이 배제되고 있다. 가치 창출이 노동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게 된다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사실 이 의문점 중 대부분은 내 사고방식이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 굳어져 버려 다른 사회, 다른 생산양식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자본]은 그래서 어렵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거꾸로 뒤집어 놓아야’ 비로소 그 비옥한 사유 속으로 첫 발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를 들으며 새로웠던 점은 내 생애 최초로 정통 맑시스트를 만났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책의 두께도 그 속에 담겨진 사상도 육중하게만 느껴지는 [자본]의 완역가, 초로의 노교수를 상상한 내 예상과는 달리 이제 환갑이라는 강신준 교수는 젊었고, 밝았고, 마치 신세대처럼 생기가 돌았다. 강의 내내 이른바 신좌파, 포스트 모더니즘즘 계열의 책만 수박 겉핧기로 접해본 내게는 낯설고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필연, 과학등의 단어가 쏟아질 때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짜릿함이 느껴졌다. (이것이 ‘정통’의 힘이던가!) 강신준 교수를 정통 맑시스트라고 한 데에는 저자가 [자본]을 과학이라 칭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강의 중에 인상적이었던 말은 맑시스트들은 must(해야하는 것)가 아니라 can(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시중에 떠도는 그 수많은 담론과 대안들에 저자는 유물론자로서 큰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결국 당위성을 가진 학문으로서의 이야기일 뿐이고 변화의 주체는 이론가가 아닌 노동자여야 하며 그래서 대안도 노동조합을 강화해 경제적 결정권을 노동자에게 이전하는 것이고(정치적으로 투표권이 확대되어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듯이) 이러한 개혁이 계속된다면 세상을 뒤엎는 혁명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사회 체제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강신준 교수는 북유럽의 사민주의를 굉장히 높이 평가했는데(물론 이 유럽국가의 탄탄한 경제가 제3세계를 착취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강신준 교수의 이론이 주로 유럽사회의 발전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미 이러한 사회제도는 자본부의와는 다른 체제로 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하나 의외였던 견해는 공동체적 협동조합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날 생태주의자들은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대안 중 하나로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본주의보다 생산력이 낮은 체제는 대안이 될 수 없다.”(변증법적 논리에 따르면 발전과정은 결코 뒤로 가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현대 사상가들에게 호되게 비판받는 변증법적 논리를 기반으로 이론을 전개해나가는 점이 신선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역사적으로 오류로 판단된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전된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하다는 맑스의 주장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충실한 강신준 교수의 견해 중 어떤 면에서는 탈 맑스적인 대안이 나오고 또 어떤 면은 정통 맑시즘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오직 주류경제학에 대한 이론만 배워 왔고 그래서 현 제체에 모순이 발생해도 다른 체제를 상상하지를 못한다. 어쩌면 아직 사고가 굳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성인보다 더 빨리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에 쥐가 나는 기성세대에게도 새로운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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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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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삶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를 취한다." (루카치)

 

베니스를 본 적이 있는가. 그 아름다운 도시가 사실은 썩은 물 위에 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도 물 위에 비친 신기루를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는가.

 

명망놓은 대작가 구스타프 아셴바흐는 어느날 갑자기 여행에의 충동을 느끼고 베니스로 떠난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이 꿈꾸던 미의 전형이라 생각되는 한 소년을 만나고 그를 지켜보고 뒤쫓는데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낸다. 심지어 베니스에 콜레라가 돌고 모든 여행객이 그 곳을 떠나는 와중에도 아셴바흐는 소년에게 매혹된 나머지 베니스를 떠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가겠다. 너는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거라. 그러다가 네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거든, 그때 비로소 너도 떠나거라." (p 526)

 

「베니스에서 죽다」(민음사)를 쓸 당시의 토마스 만은 37세였다. 촉망받는 젊은 작가가 모든 것을 이룬 노작가의 마지막 여행을 소설로 쓴 것인데 말하자면 아셴바흐는 토마스 만의 자전적 모습이 아니라 그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예술가의 전형이며 어쩌면 자신이 바라는 말년의 모습이다.

20세기 초반 독일 시민계급의 적자이자 소설가로써 만은 늘 도덕적인 시민과 정열적인 예술가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런 자신을 '길잃은 시민'이라 자조했던 만이었기에 "소임을 다하는 명철한 성실성과 어둡고 열정적인 충동이 결합"(p 426)하여 탄생한 "한 명의 특별한 예술가"였던 아셴바흐는 바로 그가 바라는 예술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기와 불굴의 삶, 혹독하고 단호하며 절제하는 삶"(p500)을 통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아셴바흐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전생애와 예술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타지오와의 만남이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없다."(p 515)

 

아셴바흐가 토마스 만이 꿈꾸는 예술가의 상이라면 타지오는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 완벽한 형식과 이국적인 특성의 구현이다. 소설에서 타지오의 외모는 미적 형식의 이상적 형태라 일컬어지는 그리스 조각과 흡사하게 묘사되나 그의 태생이 북구의 미지의 땅, 폴란드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아셴바흐는 타지오와 그의 가족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며 소년의 이름을 인지하는 데도 해석이 필요하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평가할 수 없을 때만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까닭이며, 동경이란 것은 불충분한 인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p 490)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남아있어야 그가 완벽한 미의 구현일 수 있기에 아셴바흐는 타지오와 절대로 말을 주고받지도 않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따라다닌다. 타지오도 이 노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행동하는데 이로써 두 사람 사이에는 "훔쳐보기"의 실행과 묵인에 따른 미묘한 기류가 흐르게 된다.

아셴바흐가 베니스 당국이 콜레라의 발병을 은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도 타지오의 가족에게 이를 알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떠나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베니스가 콜레라를 숨기듯이 아셴바흐도 자신의 사랑을 감추면서 둘은 함께 비밀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

"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비밀과 융화된 이 도시의 사악한 비밀! 그 비밀을 지키는 것은 그에게도 역시 매우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p 495)

 

비밀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에로티즘으로 연결되고 궁극의 에로티즘은 결국 타나토스로 귀결된다. 출구없는 사랑이 도달할 곳은 죽음의 세계뿐인 것이다. 여행의 신 헤르메스에게 이끌려 관 모양의 곤돌라를 타고 베니스에 입성하던 순간부터, 아셴바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 꿈꾸었던 아름다움 그 자체와 그 댓가로 주어지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래 정말이지 나를 기다린 것은 바다와 해변이 아니었구나. 네가 머물러 있는 동안 나도 여기에 머물러 있겠다!" (p 457)

 

"세상 사람들이 작품의 원천이나 작품의 생성 조건들은 모르고 단지 아름다운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예술가에게 영감이 떠오르게 된 원천을 알게 되면 그들은 자주 혼란에 빠지거나 깜짝 놀라게 되어 훌룡한 작품의 효과를 없애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484)

「보봐리 부인」이 불륜드라마로 읽히고 「여자의 일생」이 "이것이 인생이다"류의 신파극처럼 보이고 「롤리타」가 소아성애자의 아동납치극이란 소리를 듣는다 해도 변변히 대응할 말이 없듯이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가리켜 소년을 사랑하는 변태 노인의 관음증 행적의 기록이라 한 대도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 소설은 베니스를 가장 환상적인 도시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다. 토마스 만의 찬미자들 중에 "미학의 마르크스"라 불리는 루카치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영화감독 비스콘티가 속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리얼리즘의 옹호자인 이들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탐미적인 토마스 만의 소설을 찬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토마스 만이 자신의 탐미적이고 정열적인 예술가적 본성에 머무르지 않고 한 사회의 시민으로써, 작가로서 이것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예술가 기질의 본성과 특성을 규명할 것인가? 누가 예술가 기질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규율과 무절제의 오묘한 본능적 결합을 이해할 것인가?" (p 485)

토마스 만은 인간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부패와 질병과 죽음까지도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한다.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썩은 물 냄새와 도시를 좀먹는 습기에도 굴하지 않고 베니스에 매혹되는 것 역시 당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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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990년대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냉전 시대가 끝나면서 이제 탈이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목소리가 세상을 뒤덮었다. 이후 이념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논쟁도 생산적인 논의도 멈춰버린 채 자취를 감추었고 자신의 역사적․사회적․정치적 사상 내지 소신을 밝히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2012년, 바로 지금 한국 사회에는 난데없이 종북주의, 국가관, 사상 검증등의 이념적 단어들이 난무하며 모두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보겠다는 식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탈이념화했다던 시대에서 돌연 몇십년전 사상의 자유가 차단당하던 군사독재 시대로 회귀해버린 것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지 이례적인 일시적 반동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치열한 논쟁을 통해 미흡하게나마 사회적 합의점을 도출해냈어야 함에도 세계정세의 급변 속에 묻어버렸던 중요한 문제들이 한 시대를 돌아 다시 습격해 온 것일까?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누가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가?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어떤 방법으로 그 이상에 다가설 수 있는가? 대한민국을 더 훌룡한 국가로 만들려면 국민은 각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정치를 통해 이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가?”

2011년에 출간된 이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이러한 질문들이 출간 당시보다 지금 현재 더 시의적절해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마치 1년여 후에 우리의 국가관을 검증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듯이, 그리고 그것이 철지난 노래가 아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할 숙제라는 듯 정치 비평가이자 현실 정치인인고 지금 정치 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이들 중 한 사람인 저자 유시민은 이렇게 묻고 자신의 대답을 들려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지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는 데 나름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저자는 “국가”에 대한 책을 내겠다고 공언해왔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저자는 먼저 국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세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여 국민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성립하는 〈국가주의적 국가론〉, 둘째 국가를 공공재 공급원으로 규정하며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자유주의 국가론〉, 그리고 국가를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억압 수단으로 보고 계급투쟁을 통해 국가를 폐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위력을 떨치고 있는〈국가주의적 국가론〉에 대항하여 〈자유주의 국가론〉을 대안으로 제시하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담고 있는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의 꿈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좌절된 인류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혁명과 개량, 두 가지가 제시되는데 이는 양자택일해야 하는 대립자라기 보다는 단계적 차이이다. 모든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고 이 개혁의 길이 봉쇄된 곳에서 사회혁명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 혁명의 길이 요원해 보이는 지금 “정치 무용론”과 “정치적 냉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셈이다.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과 정치인의 책임윤리에 대해 논하는 장은 매일같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애국가 논란〉을 왜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며 공론화시키려 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애국심이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라 인정하면서도 저자는 일반인이 아닌 정치인은 한 개인으로서의 윤리의식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룡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을 주장한 르낭의 말을 인용하며 “정당과 정치인들은 국민들 속에서 이 의지를 북돋울 책무가 있다”는 구절을 보면 애국가 제창에 대한 저자의 문제제기가 돌발 발언이 아니라 ‘정치인의 책임’에 대해 오랜 세월 숙고해 온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저자의 가장 큰 장점은 지식인으로서의 학문적 교양과 정치인으로서의 현실 감각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시민의 저서들은 전문적인 정치사회 비평서로서 손색없을 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실용서로도 읽힐 수 있다.

더구나 이 〈국가란 무엇인가〉는 국가론의 여러 개념들, 사회혁명과 개량, 보수와 진보, 정치인의 자질이란 결코 녹록치 않은 주제들을 동서고금의 학자들이 남긴 다양한 견해들을 망라하며 다루면서도 읽다 보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부분들이 매우 많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이를테면 법치주의라는 미명 하에 공권력의 남용이 자행되고 있는 지금 저자가 한국 사회에 횡행하는 ‘법치주의’의 개념이 오독되었음을 지적하는 “법치주의는 통치받은 자가 아니라 통치자를 구속한다.…법치주의에서 일탈하는 권력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정당성을 잃은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복종할 의미가 없다”와 같은 구절은 저절로 무릎을 치게 만든다.

또한 “진보는 현재 자신의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것과 환경의 변화 사이의 불일치나 부조화를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생각이 막히고 닫히는 순간, 기존의 사유습성에 갇히는 순간, 그 사람은 진보와 멀어진다”며 “진보적 이념도 보수적 본능과 결합하면 경직된 교조가 된다”는 경고는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지적이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는 경계인으로서의 삶이 인정받지 못하고 좌/우의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한국 사회의 폭력적 현실에 절망감을 표한 적이 있다. 스스로를 “진보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저자도 진보/보수의 양 진영에서 날아오는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도 평등도 그 어떤 숭고하다고 말해지는 가치도 “절대화되어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고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는 저자의 호소가 주는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텍스트가 “경전”이 아닌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불신의 시대에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가 훌룡한 국가라고 믿으며 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저자의 탐색이 역시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의 길을 밝히는 작은 반딧불 중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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