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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예술은 삶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를 취한다." (루카치)
베니스를 본 적이 있는가. 그 아름다운 도시가 사실은 썩은 물 위에 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도 물 위에 비친 신기루를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는가.
명망놓은 대작가 구스타프 아셴바흐는 어느날 갑자기 여행에의 충동을 느끼고 베니스로 떠난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이 꿈꾸던 미의 전형이라 생각되는 한 소년을 만나고 그를 지켜보고 뒤쫓는데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낸다. 심지어 베니스에 콜레라가 돌고 모든 여행객이 그 곳을 떠나는 와중에도 아셴바흐는 소년에게 매혹된 나머지 베니스를 떠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가겠다. 너는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거라. 그러다가 네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거든, 그때 비로소 너도 떠나거라." (p 526)
「베니스에서 죽다」(민음사)를 쓸 당시의 토마스 만은 37세였다. 촉망받는 젊은 작가가 모든 것을 이룬 노작가의 마지막 여행을 소설로 쓴 것인데 말하자면 아셴바흐는 토마스 만의 자전적 모습이 아니라 그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예술가의 전형이며 어쩌면 자신이 바라는 말년의 모습이다.
20세기 초반 독일 시민계급의 적자이자 소설가로써 만은 늘 도덕적인 시민과 정열적인 예술가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런 자신을 '길잃은 시민'이라 자조했던 만이었기에 "소임을 다하는 명철한 성실성과 어둡고 열정적인 충동이 결합"(p 426)하여 탄생한 "한 명의 특별한 예술가"였던 아셴바흐는 바로 그가 바라는 예술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기와 불굴의 삶, 혹독하고 단호하며 절제하는 삶"(p500)을 통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아셴바흐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전생애와 예술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타지오와의 만남이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없다."(p 515)
아셴바흐가 토마스 만이 꿈꾸는 예술가의 상이라면 타지오는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 완벽한 형식과 이국적인 특성의 구현이다. 소설에서 타지오의 외모는 미적 형식의 이상적 형태라 일컬어지는 그리스 조각과 흡사하게 묘사되나 그의 태생이 북구의 미지의 땅, 폴란드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아셴바흐는 타지오와 그의 가족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며 소년의 이름을 인지하는 데도 해석이 필요하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평가할 수 없을 때만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까닭이며, 동경이란 것은 불충분한 인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p 490)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남아있어야 그가 완벽한 미의 구현일 수 있기에 아셴바흐는 타지오와 절대로 말을 주고받지도 않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따라다닌다. 타지오도 이 노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행동하는데 이로써 두 사람 사이에는 "훔쳐보기"의 실행과 묵인에 따른 미묘한 기류가 흐르게 된다.
아셴바흐가 베니스 당국이 콜레라의 발병을 은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도 타지오의 가족에게 이를 알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떠나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베니스가 콜레라를 숨기듯이 아셴바흐도 자신의 사랑을 감추면서 둘은 함께 비밀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
"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비밀과 융화된 이 도시의 사악한 비밀! 그 비밀을 지키는 것은 그에게도 역시 매우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p 495)
비밀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에로티즘으로 연결되고 궁극의 에로티즘은 결국 타나토스로 귀결된다. 출구없는 사랑이 도달할 곳은 죽음의 세계뿐인 것이다. 여행의 신 헤르메스에게 이끌려 관 모양의 곤돌라를 타고 베니스에 입성하던 순간부터, 아셴바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 꿈꾸었던 아름다움 그 자체와 그 댓가로 주어지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래 정말이지 나를 기다린 것은 바다와 해변이 아니었구나. 네가 머물러 있는 동안 나도 여기에 머물러 있겠다!" (p 457)
"세상 사람들이 작품의 원천이나 작품의 생성 조건들은 모르고 단지 아름다운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예술가에게 영감이 떠오르게 된 원천을 알게 되면 그들은 자주 혼란에 빠지거나 깜짝 놀라게 되어 훌룡한 작품의 효과를 없애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484)
「보봐리 부인」이 불륜드라마로 읽히고 「여자의 일생」이 "이것이 인생이다"류의 신파극처럼 보이고 「롤리타」가 소아성애자의 아동납치극이란 소리를 듣는다 해도 변변히 대응할 말이 없듯이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가리켜 소년을 사랑하는 변태 노인의 관음증 행적의 기록이라 한 대도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 소설은 베니스를 가장 환상적인 도시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다. 토마스 만의 찬미자들 중에 "미학의 마르크스"라 불리는 루카치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영화감독 비스콘티가 속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리얼리즘의 옹호자인 이들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탐미적인 토마스 만의 소설을 찬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토마스 만이 자신의 탐미적이고 정열적인 예술가적 본성에 머무르지 않고 한 사회의 시민으로써, 작가로서 이것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예술가 기질의 본성과 특성을 규명할 것인가? 누가 예술가 기질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규율과 무절제의 오묘한 본능적 결합을 이해할 것인가?" (p 485)
토마스 만은 인간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부패와 질병과 죽음까지도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한다.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썩은 물 냄새와 도시를 좀먹는 습기에도 굴하지 않고 베니스에 매혹되는 것 역시 당신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