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뿌리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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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오직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한 남자가 있다. 혹자에게는 광인, 또 어떤 이에게는 영웅이라 불리는 남자. 확실한 것은 광기에 가까운 그의 열정은 주변인들까지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의 장편소설 『하늘의 뿌리』는 오직 아프리카의 코끼리 보호 하나만을 위해 투쟁하는 모렐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을 묶어주는 것은 수용소와 전쟁터등에서 겪은 극심한 모멸감과 절망감, 외로움의 경험이다. 거창한 인류애도 개인적인 사랑도 아닌 그저 이 세상에서 코끼리를 지키려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모인 이들은 아프리카의 자연을 개발하고 지배하려는 식민 정부와 재미로 코끼리를 사냥하는 밀렵꾼들과 대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과 악의 뚜렷한 구도보다 더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아프리카를 문명화를 통해 독립시키려는 반정부군과의 충돌이다.

“자연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라는 논쟁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지율스님이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만큼 “사람보다 도롱뇽이 중요하냐”라는 비난의 목소리 또한 거셌다. 환경파괴가 극심해지면서 개발 위주의 정책을 보는 시선이 예전만큼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이다. 코끼리로 대표되는 아프리가클 서구처럼 문명화시키겠다는 바이타리의 주장은 서구중심적 사고라는 맹점이 있긴 하나, 가난과 질병에서 신음하는 아프리카의 독립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자연의 희생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문명의 폐해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면서도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쉽게 따를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저자는 이런 민감한 질문을 제기하면서도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모렐과 그의 동료들은 답답할 정도로 “우리의 목적은 코끼리 뿐”이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주인공 ‘모렐’의 이름이 ‘moral(도덕적인,윤리적인)’을 연상시키듯이 로맹 가리는 여전히 근원적인 문제에 머물 뿐이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원칙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저자의 태도는 현명해 보인다. 마치 사형제가 어느 정도의 죄에 어느 정도의 벌을 내려야 하는지, 그 형벌이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를 따지기 전에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듯이 로맹 가리는 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지 못할 정도의 극한에 처했을 때 아주 생뚱맞은 것 - 코끼리, 딱정벌레, 상상 속의 여인 -을 지키면서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초원 위를 내달리는 코끼리가 모두에게 위안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의 질주에서 위안을 받고 생의 희망을 찾은 이가 코끼리를 위해 전 생을 바친다고 할 때 또 어느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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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4 - 무슬림의 역습과 인간 살라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4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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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권의 시리즈로 이어지는 책의 경우 빨리 후속권이 나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하는 책이 있다. 또한 휙휙 넘어가는 책장이 너무도 아까워 일부러 뜸을 들여가며 천천히 보려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이어지는 뒷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참기 힘들어지는 책이 있다. 특별히 애서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책을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일 것이다.

내게는 다행히도 이 두가지에 다 해당되는 책이 있다. 바로 현재 4권까지 나와있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이다. 이 책은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한번쯤 들어는 봤으나 잘 알지 못했거나 서구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던 십자군 전쟁을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한 만화책이다. 1권은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로를 중심으로 십자군 전쟁의 발단을 다루었고 2권은 2차 십자군, 3권의 예루살렘 왕국의 흥망을 거쳐 최근 발간된 4권에는 2차 십자군의 실패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2003년에 첫권이 나왔으니 거의 10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시리즈물인데 작가가 후속권 작업이 늦어지거나 다른 작품을 그릴 때는 [십자군 이야기]의 후속권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원성과 불안감을 토로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저자가 수많은 역사적 사건 중 ‘십자군 전쟁’을 그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처음 발간된 해는 2003년. 바로 그 전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던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미국이 옛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떠올리며 ‘성전’이라 명명한 이 전쟁은 서방이 아닌 제3세계에는 의도와는 정반대로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이슬람에 대한 동정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동시에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적 지식으로는 용감무쌍한 기독교 기사들이 야만족 이단아들을 물리친 영웅담 정도로 알고 있던 십자군 전쟁의 진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슬람에 대한, 혹은 이슬람의 시각에서 쓰여진 많은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저자는 1권 프롤로그를 통해 편협한 종교관과 경제적 탐욕으로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부시 정권을 비판했고 기존의 서구식 관점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역사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물론 저자가 아무리 많은 문헌자료를 참고하고 균형된 시각을 갖추려 노력한다고 해도 독자들 중에서는 역시 십자군은 악으로, 이슬람은 선으로 묘사하는 편향된 이슬람적 시각이 아니냐는 반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역사에 대한 완벽한 객관적 시각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분명히 가해자가 있는데도 기계적인양비론만을 고집하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 그것은 결국 강자에 대한 면죄부가 아닐까? 저자가 이슬람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으로 십자군 전쟁을 풀어나가느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 취향이나 왜곡된 조작이 아니다. 모든 역사가는 자신 고유의 관점으로 역사를 기술하나 이 관점은 엄격하고 객관적인 사실 탐구를 통해 도출된다. 특정한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자신의 관점을 확립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과 자료들을 탐구한다. 그 결과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기계적 균형 대신 합리적 역사 인식을 갖추게 된다. 저자의 역사인식 중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십자군 전쟁이 영웅담이 되지 않도록 기울이는 노력이다. 예술작품에서 폭력을 다루는 올바른 태도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 역시 만화 내내 몇몇 승리자의 무용담이 아닌 전쟁의 참혹함과 민중들의 고난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은 이것이 글이 아닌 만화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쉽고 재미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읽는’책이 아니라 ‘보는’책이다. 글로는 불가능한 표현들이 만화이기에 가능하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의 발단과 전개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환경, 의복, 문화적 배경을 함께 보여준다. 저자의 세심한 고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생동감있는 이야기 전개와 현재를 풍자한 유머들도 만화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렵고 복잡한 역사를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쉽게 풀어보겠다는 시도는 예전에도 심심찮게 있어 왔다. 역사 뿐만이 아니라 교양만화, 지식만화를 표방하는 책들 역시 많이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이 열혈 매니아들을 거느리며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말하자면 이 책이 쉽지 않으면서 재미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내용을 쉽게 다루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그림의 배경, 등장인물의 의복까지 당시 상황을 고증해내기 위해 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다양한 관점을 모두 수용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지식만화’가 갖춰야 할 신뢰성과 재미를 독자들에게 검증받은 셈이다. 내용적으로는 저자의 역사인식과 통찰력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고 형식적으로는 글이 할 수 없는 만화만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다. 이 책은 알찬 내용과 참신한 형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기존의 편향된 역사 관념에 벗어나 우리가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만화라는 형식이 가지는 힘이 유감없이 발휘된 책이다. 듣기로 이 시리즈는 6권이 완결편이라 한다. 후속권을 기다리는 마음과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 교차하는 것은 모든 독자의 공통된 바램일 것이다. 아무쪼록 작가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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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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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장애물에 맞닥뜨릴 때 너무나 편한 해결책이기는 하나 자칫하다가는 막장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든 것이 바로 ‘우연적 요소’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는 작가로서는 금기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우연’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작가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사전설명 하에 [달의 궁전]을 읽어보니 역시나,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우연에 의한 반전이 소설 내내 일어난다. 보통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기 힘든 행운과 불운이 연달아 일어나는 주인공의 삶은 롤러코스터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거부감없이 술술 읽히는 것은 작가가 탁월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언젠부턴가 소설에서 굳이 ‘의미’를 찾으려 드른 것도 너무 경직된 독서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늘 작가는 ‘잘 보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을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세세하게 그리고 독창적으로 보는 것, 이것이 작가의 필수 조건이다. 루카치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작가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가 그 틀을 넘어서서 동시대를 궤뚫는 통찰력을 지기고 있다면 그는 의도하지 않아도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포그가 맹인인 에핑 대신 세상을 보고 설명해 주기 위해 시각적 인상을 언어로 변환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은 작가가 하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설은 다사다난한 3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열기가 들끊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아인 포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발적 파업을 하다가 굶어죽을 위기를 넘기고 에핑의 비서로 취직한다. 그가 맡은 일은 맹인인 에핑에게 책을 읽어주고 산책을 도와주며 그의 사망기사를 쓰는 것. 에핑은 그에게 믿거나 말거나 나옴직한 파란만장한 생애를 들려주고 그의 사망 이후 포그는 에핑의 아들 솔로몬 바바를 만나는데 두 사람은 기막힌 운명의 장난으로 얽혀 있다.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서로 부자 관계이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죽은 후나 죽기 직전에야 알게 된다. 현대 문학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자주 등장하는 테마이나 이 소설에서는 어머니도 일찍 죽거나 미치거나 하는 이유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등장인물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기보다 대체자를 찾거나 그리워한다. 결국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광활한 미국땅을 정처없이 헤매다니는 이들의 방랑은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정과도 같다.

사실 나는 미국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선입견일 수도 있으나 유럽문학만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는 짧다. 오랜 세월동안 켜켜이 쌓여온 문화적 지층의 힘을 갖기에는 부족한 세월이다. 전통이 족쇄가 되는 것은 그것을 맹신할 때이다. 변화를 추구할 때 전통은 도리어 도약의 발판 역할을 한다. 오랜 전통을 지닌 문화권에서 힘차게 발구름판을 디디고 뛰어오를 때 조악한 전통의 문화권에서는 모래 위에서 뛰어오르려 애쓴다.

이런 콤플렉스 탓인지 미국 소설에서는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자주 엿보인다. 흥리로운 것은 이들이 찾은 뿌리가 영국이 아닌 인디언이라는 것이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버로우즈가 멕시코에서 고향을 찾은 듯한 평온함을 느꼈듯이 [달의 궁전]의 주인공들은 인디언에게서 자신의 조상을 본다. 미국의 주류인 백인 사회는 영국 이주자들의 자손이고 아직도 영국과 미국은 국제적 이슈에서 발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이들은 오히려 인디언 문화에서 자신의 뿌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피는 물보다는 진하지만 땅보다는 진하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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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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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를 대표하는 시인 밀로라드 파비치의 첫 번째 장편소설 [카자르 사전]은 그 내용과 형식 모두 상당히 독특한 책이다. 일단 ‘사전소설’이란 말처럼 이 책은 사건 중심으로 서술되지 않고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항목별로 설명하는 사전 형식으로 씌여졌다. 또한 레드북(기독교), 그린북(이슬람교), 옐로북(유대교)의 합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사전 실린 항목들 중 몇가지는 서로 중복되나 종교에 따라 각기 해석이 다르다.

즉 독자는 개개의 항목에 대한 세 판본들의 어떤 부분은 다르고 어떤 부분은 공통적인 설명을 읽으며 책이 진행되는 동안 이 항목들의 사전적 정의가 서로 교차하며 얽혀 하나의 큰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을 알게 된다.

 

카자르 제국은 7c~10c 무렵 실제로 존재했으며 한때는 상당히 번성했던 고대 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제국은 11c 무렵 갑작스럽게 멸망했는데 이는 카간의 개종으로 카자르 고유의 문화와 언어가 쇠퇴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카자르 사전]은 바로 이 논쟁에 참여한 세 종교의 입장에서 카간의 개종 사건을 다룬다.

 

작가 김영하는 [카자르 사전]을 [100년 동안의 고독]과 같은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로 분류하는데 남미 소설이 해학적인 데 반해 동구권은 비극적 요소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카자르 사전]속 인물들은 신화 속 인물들에 가깝다. 이들은 꿈과 현실을 오가듯 죽음과 삶을 오가고 원인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언행에서 개연성을 찾기는 힘들다. 이들의 연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적 사고’를 응용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속 에피소드들이 정상적인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이 사건들은 원인과 결과가 아닌 문장을 이루는 요소들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한 인간이 왕의 자리에 오르려면 그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상승해야 하고 기성세대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아버지와 싸우는 것은 그가 자신을 버린 폭군이어서가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행위에 가깝다.

하나의 신화를 이루는 것은 문장을 이루는 것과 비슷해 각 사건들이 주어, 목적어, 서술어라는 자신의 위치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카간이나 아테공주, 꿈 사냥꾼의 행동에서 원인과 목적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카자르 사전]이라는 신화 혹은 전설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이다. 각 종교의 신화가 저마다 다르기에 이들의 성격도 조금씩 바뀐다.

 

좋은 소설은 늘 여백을 마련하고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소설을 읽은 데에도 독자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카자르 사전]은 기존의 소설과는 현격히 다르고 사면이 열려있어 독자로서는 이 책을 읽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모험가들을 매혹시켰듯이 이 정체불명의 책은 그 난해함으로 전설이 되었다. 도전정신에 불타는 애독가라면 꼭 한번 도전해 보라. 자신의 독서경력이 아직 미천하다는 겸손함을 얻는 것은 물론이요 머리에 쥐가 나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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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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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으로 떠나 종적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언제나 매료되었다.” 작가의 말 中

 

김영하의 세 번째 장편소설 [검은 꽃](문학동네,2003)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1033명의 한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시대 작가들 중에서도 현대적인 작가로 인시되어 있는 김영하의 역사소설이란 점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이 소설은 여타의 역사소설과는 구분된다. [검은 꽃]에는 영웅도 없고 특정 주인공도 없다. 소설은 다양한 계층을 사람들- 몰락한 양반가분, 장돌뱅이 고아, 파계신부, 퇴역군인, 좀도둑 등이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겪는 수난의 역사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대한제국 말기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으로 일을 하러 떠난다. 도착하고 보니 사실상 이들은 노예로 팔려온 것이나 마찬가지고 조선에서보다 더 침착하고 혹독한 일을 겪게 된다. 도망도 치고 폭동도 일으키면서 착취에 가까운 농장주와의 계약기간이 가까스로 끝난 후에도 나라없는 이들의 고난의 행군은 계속된다.

 

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암울하지만 혐오스럽지는 않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참혹한 현실을 시종일관 거리를 둔 채 건조한 문체로 서술한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독자보다 먼저 흥분하는 일을 삼가는 작가의 절제력은 이 멕시코 이민 잔혹사가 독자를 거북스럽게 만들어 책장을 덮어버리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한다. 도리어 소설이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작가의 특기인 빠른 사건 전개와 살아있는 캐릭터들의 역할이 크다. 각기 다른 사연과 개성을 가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서로 개연성을 가지고 촘촘이 얽히면서 종내는 거대한 모자이크화가 완성된다.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잃은 채 천애고아로 남겨진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작가의 기조는 무정부주의에 가깝다.

“정말 영원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이봐, 정치는 모두 꿈이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 마찬가지야. 서로 총질을 해대기 위해 만들어낸 거란 말씀이야.”

타국의 혁명에 용병으로 참가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작은 국가를 세우기도 하나 이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려운 시절의 힘없는 이들의 일대기인만큼 소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다. 조선의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에서 제대로 벗어나기도 전에 냉혹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고 종국에는 타국의 혼란스런 정치적 격동에까지 휘말려든 이들에게는 미래를 설계하는 것도 사치요 오로지 생존만이 최우선이 된다

이들이 멕시코로 떠나는 일포드 호에 탑승한 순간부터 생존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계급이 무의미해지면서 가족도 해체된다. 국가의 아버지(왕), 종교의 아버지(그리스도), 사유의 아버지(유교)등 과거의 권위를 지닌 기성세대는 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채 밀려난다.그 이후에 남는 것, 유일하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물질 즉 돈이다. 소설은 원하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않았던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장 저속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섣부른 가치 평가나 도덕적 단죄를 내리지 않고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떠한 논리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분류상으로는 역사소설이라 해야할 [검은 꽃]이 다른 역사소설에 비해 가지는 강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의명분에 불과한 국가와 민족, 영웅들의 역사 대신 가장 낮고 힘없는 이들, 그래서 역사의 거센 흐름에 떠밀려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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