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고슬라비아를 대표하는 시인 밀로라드 파비치의 첫 번째 장편소설 [카자르 사전]은 그 내용과 형식 모두 상당히 독특한 책이다. 일단 ‘사전소설’이란 말처럼 이 책은 사건 중심으로 서술되지 않고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항목별로 설명하는 사전 형식으로 씌여졌다. 또한 레드북(기독교), 그린북(이슬람교), 옐로북(유대교)의 합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사전 실린 항목들 중 몇가지는 서로 중복되나 종교에 따라 각기 해석이 다르다.

즉 독자는 개개의 항목에 대한 세 판본들의 어떤 부분은 다르고 어떤 부분은 공통적인 설명을 읽으며 책이 진행되는 동안 이 항목들의 사전적 정의가 서로 교차하며 얽혀 하나의 큰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을 알게 된다.

 

카자르 제국은 7c~10c 무렵 실제로 존재했으며 한때는 상당히 번성했던 고대 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제국은 11c 무렵 갑작스럽게 멸망했는데 이는 카간의 개종으로 카자르 고유의 문화와 언어가 쇠퇴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카자르 사전]은 바로 이 논쟁에 참여한 세 종교의 입장에서 카간의 개종 사건을 다룬다.

 

작가 김영하는 [카자르 사전]을 [100년 동안의 고독]과 같은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로 분류하는데 남미 소설이 해학적인 데 반해 동구권은 비극적 요소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카자르 사전]속 인물들은 신화 속 인물들에 가깝다. 이들은 꿈과 현실을 오가듯 죽음과 삶을 오가고 원인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언행에서 개연성을 찾기는 힘들다. 이들의 연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적 사고’를 응용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속 에피소드들이 정상적인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이 사건들은 원인과 결과가 아닌 문장을 이루는 요소들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한 인간이 왕의 자리에 오르려면 그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상승해야 하고 기성세대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아버지와 싸우는 것은 그가 자신을 버린 폭군이어서가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행위에 가깝다.

하나의 신화를 이루는 것은 문장을 이루는 것과 비슷해 각 사건들이 주어, 목적어, 서술어라는 자신의 위치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카간이나 아테공주, 꿈 사냥꾼의 행동에서 원인과 목적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카자르 사전]이라는 신화 혹은 전설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이다. 각 종교의 신화가 저마다 다르기에 이들의 성격도 조금씩 바뀐다.

 

좋은 소설은 늘 여백을 마련하고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소설을 읽은 데에도 독자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카자르 사전]은 기존의 소설과는 현격히 다르고 사면이 열려있어 독자로서는 이 책을 읽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모험가들을 매혹시켰듯이 이 정체불명의 책은 그 난해함으로 전설이 되었다. 도전정신에 불타는 애독가라면 꼭 한번 도전해 보라. 자신의 독서경력이 아직 미천하다는 겸손함을 얻는 것은 물론이요 머리에 쥐가 나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