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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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장애물에 맞닥뜨릴 때 너무나 편한 해결책이기는 하나 자칫하다가는 막장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든 것이 바로 ‘우연적 요소’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는 작가로서는 금기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우연’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작가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사전설명 하에 [달의 궁전]을 읽어보니 역시나,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우연에 의한 반전이 소설 내내 일어난다. 보통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기 힘든 행운과 불운이 연달아 일어나는 주인공의 삶은 롤러코스터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거부감없이 술술 읽히는 것은 작가가 탁월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언젠부턴가 소설에서 굳이 ‘의미’를 찾으려 드른 것도 너무 경직된 독서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늘 작가는 ‘잘 보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을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세세하게 그리고 독창적으로 보는 것, 이것이 작가의 필수 조건이다. 루카치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작가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가 그 틀을 넘어서서 동시대를 궤뚫는 통찰력을 지기고 있다면 그는 의도하지 않아도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포그가 맹인인 에핑 대신 세상을 보고 설명해 주기 위해 시각적 인상을 언어로 변환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은 작가가 하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설은 다사다난한 3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열기가 들끊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아인 포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발적 파업을 하다가 굶어죽을 위기를 넘기고 에핑의 비서로 취직한다. 그가 맡은 일은 맹인인 에핑에게 책을 읽어주고 산책을 도와주며 그의 사망기사를 쓰는 것. 에핑은 그에게 믿거나 말거나 나옴직한 파란만장한 생애를 들려주고 그의 사망 이후 포그는 에핑의 아들 솔로몬 바바를 만나는데 두 사람은 기막힌 운명의 장난으로 얽혀 있다.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서로 부자 관계이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죽은 후나 죽기 직전에야 알게 된다. 현대 문학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자주 등장하는 테마이나 이 소설에서는 어머니도 일찍 죽거나 미치거나 하는 이유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등장인물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기보다 대체자를 찾거나 그리워한다. 결국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광활한 미국땅을 정처없이 헤매다니는 이들의 방랑은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정과도 같다.

사실 나는 미국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선입견일 수도 있으나 유럽문학만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는 짧다. 오랜 세월동안 켜켜이 쌓여온 문화적 지층의 힘을 갖기에는 부족한 세월이다. 전통이 족쇄가 되는 것은 그것을 맹신할 때이다. 변화를 추구할 때 전통은 도리어 도약의 발판 역할을 한다. 오랜 전통을 지닌 문화권에서 힘차게 발구름판을 디디고 뛰어오를 때 조악한 전통의 문화권에서는 모래 위에서 뛰어오르려 애쓴다.

이런 콤플렉스 탓인지 미국 소설에서는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자주 엿보인다. 흥리로운 것은 이들이 찾은 뿌리가 영국이 아닌 인디언이라는 것이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버로우즈가 멕시코에서 고향을 찾은 듯한 평온함을 느꼈듯이 [달의 궁전]의 주인공들은 인디언에게서 자신의 조상을 본다. 미국의 주류인 백인 사회는 영국 이주자들의 자손이고 아직도 영국과 미국은 국제적 이슈에서 발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이들은 오히려 인디언 문화에서 자신의 뿌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피는 물보다는 진하지만 땅보다는 진하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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