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먼 곳으로 떠나 종적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언제나 매료되었다.” 작가의 말 中

 

김영하의 세 번째 장편소설 [검은 꽃](문학동네,2003)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1033명의 한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시대 작가들 중에서도 현대적인 작가로 인시되어 있는 김영하의 역사소설이란 점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이 소설은 여타의 역사소설과는 구분된다. [검은 꽃]에는 영웅도 없고 특정 주인공도 없다. 소설은 다양한 계층을 사람들- 몰락한 양반가분, 장돌뱅이 고아, 파계신부, 퇴역군인, 좀도둑 등이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겪는 수난의 역사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대한제국 말기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으로 일을 하러 떠난다. 도착하고 보니 사실상 이들은 노예로 팔려온 것이나 마찬가지고 조선에서보다 더 침착하고 혹독한 일을 겪게 된다. 도망도 치고 폭동도 일으키면서 착취에 가까운 농장주와의 계약기간이 가까스로 끝난 후에도 나라없는 이들의 고난의 행군은 계속된다.

 

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암울하지만 혐오스럽지는 않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참혹한 현실을 시종일관 거리를 둔 채 건조한 문체로 서술한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독자보다 먼저 흥분하는 일을 삼가는 작가의 절제력은 이 멕시코 이민 잔혹사가 독자를 거북스럽게 만들어 책장을 덮어버리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한다. 도리어 소설이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작가의 특기인 빠른 사건 전개와 살아있는 캐릭터들의 역할이 크다. 각기 다른 사연과 개성을 가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서로 개연성을 가지고 촘촘이 얽히면서 종내는 거대한 모자이크화가 완성된다.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잃은 채 천애고아로 남겨진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작가의 기조는 무정부주의에 가깝다.

“정말 영원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이봐, 정치는 모두 꿈이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 마찬가지야. 서로 총질을 해대기 위해 만들어낸 거란 말씀이야.”

타국의 혁명에 용병으로 참가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작은 국가를 세우기도 하나 이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려운 시절의 힘없는 이들의 일대기인만큼 소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다. 조선의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에서 제대로 벗어나기도 전에 냉혹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고 종국에는 타국의 혼란스런 정치적 격동에까지 휘말려든 이들에게는 미래를 설계하는 것도 사치요 오로지 생존만이 최우선이 된다

이들이 멕시코로 떠나는 일포드 호에 탑승한 순간부터 생존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계급이 무의미해지면서 가족도 해체된다. 국가의 아버지(왕), 종교의 아버지(그리스도), 사유의 아버지(유교)등 과거의 권위를 지닌 기성세대는 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채 밀려난다.그 이후에 남는 것, 유일하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물질 즉 돈이다. 소설은 원하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않았던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장 저속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섣부른 가치 평가나 도덕적 단죄를 내리지 않고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떠한 논리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분류상으로는 역사소설이라 해야할 [검은 꽃]이 다른 역사소설에 비해 가지는 강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의명분에 불과한 국가와 민족, 영웅들의 역사 대신 가장 낮고 힘없는 이들, 그래서 역사의 거센 흐름에 떠밀려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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