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
장석주 지음 / 마음서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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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책은 이번이 세 권째다.

아니 온전히 읽은 책은 <은유의 힘>에 이어

두번째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의욕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장석주가 새로 쓴 한국 근현대문학사>는

원하는 부분만 뽑아서 읽고는 방대한 양에 잠시 미뤄두고 있고,

부인인 박연준 시인과 6개월동안 함께 써내려간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역시 읽다가 기간이 되어

도서관으로 되돌려보냈다.

다독가로 알려진 저자가 선택한 굵직한 책들과

촘촘하고 반듯하게 짜여진 글과는 대조적으로

감성적이고 연한 커피같은 책들과

부드럽고 느슨한 그녀의 글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읽은 재미는 물론 책의 정보도 함께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마침 바쁜 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아쉽게

다 읽지 못하고 반납을 하게 되었지만

여유가 생기면 다시금 읽으려고 목록에 담아두었었다.

 

 

그러는 사이

신간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가 출간된 것이다.

어느 것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 이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최근 딱딱한 책을 많이 읽다보니 감성적인 책이 그리웠고

갑자기 푹 해진 날씨에 하나 둘 피어나며

색채를 더하기 시작한 담장 위 개나리를 보니

가슴 따뜻해지는 말랑말랑한 글이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이국의 도시를 여행하면서 새벽마다 당신에게 짧은 편지를 썼어요. 삶이란 8할의 우연 속에서 번성하고, 2할의 땀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지요. 운명을 창조하는 그 많은 만남과 이별도 그 8할에 속하겠지요. 아무튼 헤어진 지 오래입니다만 당신을 잊은 건 아니에요. 당신이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잘 있어요, 당신'이라고 안부를 담은 내 편지는 연애편지일까요? 그게 연애편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부칠 수 없는 편지라는 것이이지요. 수취인 불명의 편지라니! 지금 부재의 존재로써 내 안에 그리움의 깊이를 만드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 p.7 <서문 中>

 

 

이 책의 부제 '풍경, 시간, 당신에 관하여'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매 꼭지 '당신, 잘 있어요'로 끝나는 글들은

마치 실제하는 존재에게 쓴 것 같지만

실은 지나간 나에게, 지나간 인연에게

그리고 지나간 날들에게 현재의 풍경 속에서 띄우는

연애편지인 것이다.

그 대상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시인의 상상력과 감성은 먼 타국땅,

계절마저 뒤바뀐 광활한 대지에서 맘껏 발휘된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상대가 된 듯

실감나는 이입감이 든다.

 

그럼에도 많은 '당신'은 시인의 현재 부인인

박연준 시인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은유의 힘>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늦은 나이까지

솔로였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영혼의 짝을 만났음을 알았다.

올 1월에 25살 연하의 박연준 시인과 결혼을 했고,

결혼식 대신 결혼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는 것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책은 그 이전의 감정도 있고,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도 있고,

함께할 때의 즐거움과 낯섬,

불안한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특히 '시'라는 공통분모가 있음에도

젊은 자신을 저만치 멀리 보내버린 나와

아직은 젊음을 간직한 당신 사이의 간극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더위가 절정인 북반구를 떠나 남반구의 겨울 속 풍경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더 낯설게 만들어 버리고

타향에서의 시선은 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나게 하는 것 같다.

우리 모두도 오늘보다 젊은 어제의 나를 보내버린 채

바라보는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창을 통해 비쳐든 햇빛 속에 있는 당신을 바라보면서 새삼 당신이 젊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웬일인지 슬퍼집니다. 당신의 젊음이 슬픈 게 아니라 이 빛나는 찰나들에 영원히 머물지 못한다는 자각과, 우리가 시간이란 유한 자원을 소비하며 사라지는 존재라는 인식이 나를 꿰뚫고 지나갔기 때문이지요. 시간은 흘러가면서 우리를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겠지요. -중략-

하지만 나도 한때 젊었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누구도 처음부터 나이 든 게 아니에요. 며칠 밤을 새우며 글을 쓰고, 혼절한 듯이 자고 깨어나면 피로가 씻겨 가뿐했던 젊은 날은 이제 사라지고 없어요. 나는 규칙적인 수면, 산책, 소식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지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는 탕진할 수 없는 시간을 가진 존재,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 -부재와 상실-에 더 예민해져 싸운다는 뜻이지요.  --- p95~96

 

 

산책을 하며 조촐한 일상을 즐기는 최소주의자였던 저자이지만

여행은 또다른 일상이었다.

이국의 공간에서 풀어놓는 시인만의 감성적인 시선은

또다른 층의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오후 늦게 블루마운틴의 일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저 장엄한 짧은 황혼의 빛 속에 조종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태양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떴다가 지기를 반복한 것일까요? 감히 그 세월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 일몰의 장엄함을 보면서 그 감응을 각자의 기억에 되새길 뿐이겠지요. 우리 안의 이 하염없음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겠지요. 자연의 웅장함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하는 날카로운 인식과 함께 우리를 겸손하게 이끄는 바가 있습니다. 이 세속의 세계에 와 살면서 그런 깨달음 한 점조차 없다면 그는 마소나 다를 바 없겠지요.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주 놀라면서 감응하고, 경이 속에서 깨닫고, 좀 더 나은 사람으로 향상되어야 합니다."--- p.37

 

 

때론 자연 현상은 살아 꿈틀대는 거대한 생명체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경외심. 그런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그 위대함에,

두려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보면 

그 거대한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얼마나 작고 여린 지.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린 존재들이 모여

거대한 자연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노라면

이 톱니바퀴 같은 사회 속에서 힘을 쏟아붓고 있는

젊은 날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와 겹쳐지게 된다.

 

"메가롱 밸리 숲속의 저 어린 나무와 스무 살의 나를 하나로 겹쳐봅니다. 아무 소속도 없이 음악감상실이나 떠돌던 문학청년에게 미래는 우호적이지 않았어요. 밥을 구하는 대신 문학에 꿈을 두고 빈둥거리면서 가족의 적폐가 되어 떠돌던 어느 날, '나는 빛나고 싶다!' 운운하는 유치한 문장 몇 개를 남기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음악감상실 출입을 끊었어요. 무위도식하며 보낸 몇 년간의 무명 시절에 진절머리를 치며 문학이 생계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공사판이라도 나가야 하나, 혹은 구두수선공이라도 돼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한 해만 더 해보고 문학에 대한 꿈을 접기로 했어요. 나는 시립도서관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니체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책들을 꾸역꾸역 읽었어요. 푸른 노트에 시 몇 편을 끼적이고, 봉사가 문고리 잡듯이 평론 두 편을 써낸 것은 스물 세 살 가을의 일이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 스물 세 살이 지나고 난 뒤 문학은 평생의 업이 되었습니다." --- p.101~102

 

 

"백수로 허덕이며 보낸 스무 살 시절, 불안이 수시로 찌르고 미래는 어두웠던 그 시절, 나는 한 점의 희망이라도 품었을까요? 내가 갈망한 것은 자유였어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러나 자유는 가망 없는 꿈이었어요. -중략-

희망은 그 희망의 내역이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 주어지는 절망의 다른 이름인 것을, 닫힌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일찍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는 '개뼈다귀 같은 희망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라고 외쳤지요. -중략-

분명한 것은 희망에 기대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이지요. 무리 중에서 가장 나약한 자들이 희망에 기대는 법이지요. 결국 희망을 버려야만, 희망이 절실함에서 벗어나야만, 절망을 절망으로 견디는 자만이 자유로 나아갈 수 있어요. 나의 고난, 나의 절망, 나의 현전이야말로 희망 없는 현실을 넘어 저 멀리 달아날 수 있는 도약의 받침대인 거예요. 절망을 뿌리치지 말고 그것을 타고 넘어가세요!

 

우리는 멀리 있습니다.

당신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당신, 부디 잘 있어요." --- p.109~113

 

그렇게 단련된 강인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가슴을 녹이는 사랑 앞에서는

천상 약하고 작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나 본다.

 

"당신을 보았을 때 웬일인지 시냇물은 느리게 흐르고, 꽃들은 더욱 화사하고, 마침 피어난 라일락꽃 방향은 더욱 향기로웠지요. 당신의 화사함으로 천지간도 명도가 몇 도 더 높아진 것 같았는데, 폭죽처럼 연신 터지는 그 환한 빛 속에서 심장이 얼어붙었어요. 그 찰나, 나는 떨면서 당신만을 바라보았지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어디에서 이렇듯 내 앞에 벙어리 장미꽃으로, 향기를 잃은 한 마리 백조로 와 있는 걸까요? 그 찰나는 온 우주가 당신만을 바라보는 듯했어요. 얼마나 흘러을까요. 당신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두드렸어요. 한참 동안이라고 느꼈지만 그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신의 목소리는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어요. 내 인생은 그 찰나를 기점으로 전과 후로 나뉘겠지요." --- p.182~183

 

영락없는 사랑꾼의 면모다.

손발이 오그라들 법도 하지만 너무나 진지하고 진솔해서

그럴 틈이 없다.

독자 역시 그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 그 환희의 순간을 함께 만끽한다.

시간이 멈추고, 세상의 빛은 모두 그 대상 만을 비추고 있는 것만

같은 몰입의 순간.

그렇게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된 시인 부부가

어떻게 탄생을 하게 되었는가를 독자들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의 글 역시 그 찰나를 기점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더 깊어지고, 더 윤택해지고, 더 생기가 감도는 글로.

 

이전의 글들도 분명 그 상황 속에서 진실이었을 것이고,

지금의 글들도 현재의 언어로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비교적 다작을 한 저자이기에

여유가 생긴다면 이전의 글들도 찾아 읽어봐야 겠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기록한 결혼책도 읽어볼 참이다.

그렇게 한 중견 시인의 인간으로서의 성장기를

지켜보는 것도 의미있고 즐거울 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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