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림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깔깔거리고, 감동받고, 공감하고...
제각각의 그림책 판형처럼 그렇게 제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던
그림책의 그림들, 이야기들을 읽으며 한없이 그 세계에 빠져 살았었는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마치 졸업이라도 하는 양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갔었다.
그런데 요즘 부쩍 그림책이 다시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나 역시 일상의 여러 변화들을 겪으며 여유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럴수록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림책으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그림책들을 다시 꺼내 읽노라니
마음이 울컥울컥 해진다.
한없이 넓고 깊게 펼쳐진 그림책 세상 속의
그림들을 응시하며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굳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어렵게 해석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위안이 된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집처럼 그냥 그렇게 마음이 푹 퍼진다.
그림책은 쉬어가라고 넉넉한 품을 내어준다.
잊고 있었던 엄마의 품처럼.
그렇게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그림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한동안 그림책에 소원했더니 어느새 낯선 책들이 많아졌다.
모르는 책들이 많을수록 가슴은 더욱 두근거린다.
안보는 사이 그림책들은 더욱 다양해졌고
더욱 다채로와졌고 내용도 깊어졌다.
눈에 띄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도 꽤 많아졌다.
그 작품들을 하나하나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진다.

[그림책
탱고]는 그림책 에세이를 두 권이나 출간한
'은재야 사랑해'라는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noirejn)를 운영하고 있는
제님의 그림책 에세이다.
저자 역시 아이들과 뒹굴며 그림책의 세계로 들어가
푹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순간 멀어지고 잊고 살았던 나와는 달리
저자는 더 깊이 들어가 그림책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책까지 여러 권 출간했다.
블로그를 방문해보니 연도별로 그림책 이야기를
빼곡히 채워가고 있고,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다.
그림책과 일상의 이야기,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꼭 맞는 그림책을 선물해주고, 추천해주는
저자의 일상이 소박하지만 그 어떤 삶보다 풍요로워 보인다.

책은 주제별로 묶어서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경계는 책을 만들기 위한 기준일 뿐
책을 읽다보면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림책 한권 한권, 작가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 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 시작은 크빈트 부흐홀츠 글, 그림의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여러 번 봐도 별 감흥이 없다가
우연한 계기로 인연이 되는 책들이 있다.
저자에게 이 책이 그랬나 보다.
'그림'과 '여행' 그리고 몽환적이면서 섬세한 그림이
제법 인상적이지만 작가는 무려 네 번이나 만난 후에야
비로서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꽤 잘 어울린다는 책.
화가와 소년의 우정을 다룬 스토리도
고전적인 구조이긴 하지만 흥미를 더해준다.
무엇보다도 세밀한 그림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첫 장부터 가슴을 두드린 작가는
'함께 선물하면 좋을 책선물 꾸러미'를 통해
못다한 이야기를 전할 책을 더 소개해준다.
이렇게 매 꼭지마다 끝에 이야기와 관련된 책을
추가로 소개해주어 책장을 넘기는 아쉬움을 달래준다.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은 꼭 그림책에 국한되지 않고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책을 소개해주어 더욱 풍성한 느낌을 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저자가 구순의 아버지에게 그림책을
소개하고 싶어 안절부절하는 부분이다.
저자의 이야기 자체가 꼭 그림책같다.
생각이 많으셨던, 반듯했던 아버지가
치매로 무기력해진 모습을 봐야 하는 딸.
아버지와 꼭 닮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쑥갓 꽃을 그렸어」를 아버지에게 소개하려고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는 저자의 마음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결국 그림책을 읽으시게 하는데 성공하고
섭섭해하실 것 같은 어머니에게도
책선물 꾸러미에 소개한「엄마의 초상화」를 선물해드린다.

두 분이 책을 읽으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마음을 훈훈하게도 하지만 그림책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준 에피소드였다.

손님들이 왔다가 싹 빠져나갔을 때의 느낌.
마음 한 켠의 아쉬움보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더욱
반가웠던 경험.
「우리 집은 시끌시끌해」는 그런 후련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했던 주인공 피터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현자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는다.
현자는 소 한 마리를 들여놓으라고 조언한다.
더 시끄러운 것은 당연한 결과.
다시 찾아갔을 때는 당나귀,
그다음에는 양, 암탉, 개, 고양이를 들여 놓으라고 얘기한다.
온갖 동물의 소리가 집에 가득해지자
화가 치밀어 오른 피터 할아버지는 다시 현자를 찾아간다.
이 때 그는 다시 동물을 차례로 내보내라고 한다.
모든 동물을 내보낸 집은 그 어떤 집보다 평화롭고 조용해진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이렇게 멋진 유머로 풀어낸 책이
과연 아이들만의 책일까 싶다.

"미술평론가이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신문 컬럼을 읽다가 따뜻한 풍경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칼럼은 덕수궁 관리소 직원에게 받은 휴대폰 문자로 시작했습니다.
"함녕전 꽃 계단에 모란이 만개했습니다. 이번 주말엔 덕수궁에 오셔야 볼
수 있어요. 올해는 일찍 개화해서 벌써 지려고 해요."
꽃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 주는 직원의 살뜰한 마음결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치 제가 문자를 받은 것처럼요.
모란꽃이 지기 전에 덕수궁 함녕전을 꼭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 더불어 덕수궁 함녕전에 모란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p189
백지혜 작가의 「꽃이 핀다」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시작한 글이다.
나 역시 감동에 젖어 한동안 덕수궁 함녕전 꽃 계단에
모란이 만개한 광경을 상상해봤다.
이런 따뜻한 문자를 받았을 유홍준 작가의 모습도.
유홍준 작가는 과연 모란꽃을 보러갔을까.
사는데 꽃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의식주처럼 꽃이 없다고 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도 없다.
그렇지만 자연이란 존재는 숨을 트이게 하는 존재다.
목을 조르는 듯한 일상의 압박이 느껴질 때
꽃은 모든 근심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하는
휴식처가 될 수 있다.
자연이 빚은 비대칭의 자연스러운 색감은
보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여유를 느끼게 한다.
찔레꽃, 민들레, 달개비, 모란꽃, 진달래꽃...
서사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활짝 핀 꽃을 담은 그림책은
그렇게 잠깐이라도 숨통을 열어줄
자연을 담은 책이라고 한다.
직장과 머지 않은 곳에 덕수궁이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가보려다 몇 번을 주저앉았다.
추워서, 미세먼지 때문에, 바빠서...
함녕전의 모란꽃은 언제쯤 필까.
문자를 보내 줄 이는 없지만
그전까지는 꼭 다녀와 봐야겠다.
오는 길에는 근처 서울도서관에 들러
작가가 선물해준 책꾸러미를 한가득 안고 올 참이다.
오랜만에 그림책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