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을 담은 팔레트 - 인류와 함께한 색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23
남궁산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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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의 원인을 추적하는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를 보고 왔다.

고흐 그림의 색채가 워낙 강렬해서 그 어떤 화가보다 '색'하면 먼저 떠오르는 화가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107명의 화가들 손에서 탄생한 애니메이션.

강렬한 그림들이 95분동안 대형 스크린 위를 수놓는다.

주위의 평도 워낙 좋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책 [문명을 담은 팔레트] 때문이었다.

 

 

형형색색의 물감을 짜놓는 '팔레트'가 '문명'을 담고 있다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이 책은 인류 문명 속에서 색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 왔는지를 색깔별로, 다방면에서 다각도로 보여주는 책이다.

과학창의재단의 2017년 우수과학도서 중고등 부문에 선정될 정도로 탄탄한 구성을 갖추었지만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고 에세이처럼 술술 읽힌다. 그렇지만 내용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의 색깔이 인류에 나타나기까지의 역사부터 추출하는 방법과 염색하는 방법, 대중화되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각 색상의 역사적인 의미와 희노애락을 구석구석 보여줌으로써 그야말로 색과 인류와 문명의 관계를 전방위적으로 추적해서 소개한다.

 

 

최초의 색이자 생명의 색인 '빨강'부터 처음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파랑', 노랑, 초록, 검정, 하양, 보라, 주황과 분홍까지 섹션별로 색이 품고 있는 스토리를 만나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되어 있다.

색채의 화가답게 고흐는 '파랑'에서 한번 잠깐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노랑'에서는 아예 대놓고 '노란색을 사랑한 화가, 고흐'라는 한 꼭지를 담당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도 노란색이 화면 가득 물결친다. 고흐가 등장하지 않을 때조차도 장면 자체가 '고흐'임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고흐가 이렇게 노란색에 집착했던 것이 화가의 감각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음을 타당성있는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고흐는 알코올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자신의 귀를 자른 것도 만취한 상태에서 저질렀다고 하지요. 고흐는 당시 유행했던 압생트라는 독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그런데 압생트에 포함되어 있는 튜존이라는 물질은 뇌세포를 파괴하여 환각을 일으키고, 테레빈이라는 물질은 시각 신경을 손상시켜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질환인 황시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압생트에중독된 고흐가 노란색 환각을 작품으로 그려 낸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먹기도 했던 습관 역시 고흐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렸을 겁니다. 고흐가 살던 시기에는 이미 노란색 안료가 인공적으로 합성되어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납 같은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지요. 고흐의 작품을 보면 납 중독으로 의심되는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납에 중독되면 망막에 문제가 생겨 빛이 원을 이루는 식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달빛이 원으로 표현되어 있거든요. 고흐에게 노란색이란 아름다운 작품의 밑거름이 되어 준 동시에 고흐 자신을 비극적으로 밀어 넣은 주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p.71~72

 

아는 것이 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색'의 실체를 알고 나서는 살짝 들기도 한다. 고흐의 그 강렬한 색의 선택이 여러 유해 물질에 중독되어 일그러진 상태로 보인 세상을 옮겨놓은 것이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을 천재적인 재능과 열정으로 예술화시켜서 옮겨놓은 것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에서 얻었던 색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유해판정을 받은 성분들이 물감에 포함되면서 고흐 뿐만이 아니라 많은 화가들이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파란색과 초록색에 포함되었던 비소, 노란색에 포함되어 있던 납, 카드뮴 등 지금은 금지된 성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가격이 저렴해져 환영을 받으면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물감이 대중화되면서 더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만날 수는 있었지만, 그로인해 화가의 수명이 단축되면서 더 위대한 작품들은 더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인류는 색을 발견하고 이를 옮기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연에서 얻어야했던만큼 재료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이를 구현하고 유지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기때문에 색은 돈과 권력을 소유한 상류층이 독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것이 신분의 상징으로 굳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다양한 색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선택이 고민스러운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만 색이 통과해온 역사의 터널의 저편 세상의 빛깔은 이렇게 많이 달랐다.

 

 

색깔의 독점현상은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불러왔다. 물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늘 얽혀있는데 색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절반의 비용으로 빨강을 만들 수 있는 합성 색소가 독일의 화학회사에 의해서 개발되면서 '빨강'은 드디어 대중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파브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파브르는 빨강 천연 색소의 새로운 합성법을 개발해 특허를 등록했다. 그런데 더 혁신적인 방법인 인공 색소가 개발되면서 파브르의 특허는 쓸모없게 되어 버린는 것이다. 그 뒤 파브르는 곤충 연구에 전념하여 『파브로 곤충기』를 썼다고 하니 합성 색소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그의 곤충의 세계에 대한 기록은 한참 뒤에나 볼 수 있었을 지 모르겠다. 어쩌면 영영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우리에게 이렇게 다채로운 색을 선물한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이는 바로 '윌리엄 퍼킨'이라는 왕립화학대학 학생이었다고 한다. 1856년 '모브'라는 보라색 염료를 만들었는데 이 성공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합성염료 개발 경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약 십년 후인 1868년에 파브르에게 피해를 주었던 합성 빨강 색소가 개발된 것도 그 맥락에 있었다.

지금도 신비한 느낌이 드는 '보라'는 처음에는 고동의 점액을 이용해서 얻었다고 한다. 손수건 한장을 염색하는데 1그램의 염료가 드는데 이 1그램의 염료를 고동의 점액으로 얻으려면 무려 고동 1만마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연 신비의 색 답다.

 

 

그런데 이 색을 최초로 합성염료로 만들어냈으니 가히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실은 퍼킨은 합성염료를 발명하기 위해서 모브를 만든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말라리아 치료약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사용되었던 '키니네'는 나무의 껍질로 만들었는데 이 나무가 유럽에서는 자라지 않아서 이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많은 화학자들이 도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퍼킨도 그중에 한 명이었으며 불과 18세밖에 되지 않은 학생이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쌓인 결과물 중에서 보라색 용액을 발견하면서 '모브'라는 합성염료를 만들게 된 것이다. 퍼킨은 염료 회사를 차리고 공장을 만들어 이 모브를 대량 생산했으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이 염료로 염색한 옷을 입음으로써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합성염료의 길을 연 것이다.

 

 

문명을 담고 있는 각 색에 대한 이야기만 풀어냈다면 이 책은 인문학 책으로 분류가 되었을 것이지만,

마지막 장는 '색'에 대한 비교적 과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빛과 색. 우리가 눈으로 색을 볼 수 있는 원리, 눈으로 보이는 것이 진실만은 아니라는 인간 시각의 한계, 색의 속성 등 색이 매커니즘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가끔 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그때서야 내가 숨을 쉬고 있었음을, 산소의 귀중함을 알게 된다.

색도 그렇다. 그 자리에 너무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색깔이 부재인 세상을 떠올리니 주위에 가득한 색이 하나하나 의미있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 색들을 쟁취하기 위해, 소유하기 위해 흘렸던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을 생각한다면 한 번 정도는 의식하고 감사하고, 맘껏 누릴 수 있음에 행복해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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