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을 만큼
수많은 종류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처음에는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대리만족하는 마음으로
혹는
앞으로 갈 계획이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여행서를 찾아서 읽었었다.
그러나 너무 비슷비슷한 내용들의 책이 많다보니
이제는 피로감이 쌓여서 최근에는 별로 읽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서
신간이 나왔다고 해도
시큰둥하고 관심을 특별히 갖지 않는데
이다혜 작가의 여행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가 나왔다는
소식에는 귀가 쫑긋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2주마다 한번씩 논픽션 부분에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방송에서 종종 언급했기때문에
얼마나 여행을 많이 다녔었는지 익히 알고는 있었다.
영화주간지 기자이자 책에 대한 방송은 물론
책에
대한 컬럼도 쓰는 북컬럼니스트이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여행'에 대한 얘기를 할 때였다.
틈만
나면 훌쩍 떠난다는 그녀.
기자의 특성상 출장도 많이 다녔을터인데
그럼에도 잔고가 늘 바닥이 날만큼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것도 혼자 다니길 즐긴다고 할 때
그녀의 여행스타일이 궁금했었다.
더구나 운전면허증이 없단다.
그럼에도 수시로 떠나고, 국내고, 해외고 가리지 않고
누비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으면 실로 놀랍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실제 해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장롱면허로 썩어가고 있는 무늬만 드라이버인 나는
이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때가 많은데
굴하지 않고 다니는 저자를 보면
내가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부터 여행을 수시로 다녔다니 이제는 이골이 낫겠지만
마흔
줄에 들어선 지금도 여행을 위해서 돈을 벌고,
미련없이 떠나는 저자야말로 진짜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방송
중간중간 지나가면서 여행 얘기를 한 터라
그녀의 여행스타일과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책이
나왔다니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은 정말 술술 읽힌다.
음성이 지원되는 것처럼 그녀의 말투가
그대로 느껴지는 구어체에 가까운 문장은 살아서 펄떡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방송에서 보다 더더더 솔직한,
지나치게 솔직한 생각과 표현들에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휴양이 아닌 여행을 즐기는 그녀가 쓴 책이기에
잠깐
멋내러 다녀오는 그런 여행자가 아니기에
그녀의 책은 여행지를 나열하고, 소개를 해도
피로감없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책을 펼쳐 읽어내려가는 순간,
웬걸~ 여행지가 주인공인 챕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있다고 한들 그녀의 여행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는
배경에 불과한 경우가 더 많았고, 그나마도 손꼽을 정도로 밖에 없었다.
멋진
풍경 사진도....있긴 하다...
그러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너무 작다. 그저 소품 정도로...

대신 그동안 그녀가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여행과 관련된 단상과 편린들이 조각조각 새겨져
여행이라는 커다란 조각보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찌질한 여행부터, 조금은 풍요로운 여행까지
남에게 얹어가는 여행부터, 혼자가는 여행 등
다양한 여행에 대한 실질적인 속얘기와
여행을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한 편안함,
다녀와서 느끼는 안락함,
악천후의 날씨에서 느끼는 해방감,
같이가서 느끼는 불편함,
여자라서 느껴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친구와 수다떨듯이 풀어낸다.

책, 음악, 음식도
빼놓을 수 없는 수다거리다.
단지
장소만 바뀌었을 뿐 여행도 삶의 한 순간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곳이 어디든 이 책의 제목처럼 '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낯섬을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기어이, 그렇게 번거롭게 짐을 싸고 떠난다.
결국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이곳에서 다시 살아내기 위해.

그리고 기억속엔 아련한
파편 하나가 남는다.
"어쨌든 친구와의 간사이 여행에서 나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를 가져가서 밤새 읽었고, 친구도 가져온 책을 밤새 읽었다. 둘이 호텔 자판기의 맥주를 끝도
없이 뽑아 마시며 책을 읽다가 얘기를 하다가 하며 거의 밤을 새웠다. 눈을 뜨니 이미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조식 시간은 지나 있었고, 어차피
조식을 놓친 김에 다시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사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하루였지만,
교토까지 같이 여행을 간 김에 어디든 가자는 생각이 들어 오사카에서 전철을 타고 니조성으로 갔다. 니조성 출구로 나섰는데, 갑자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오는 것이었다. 나와 친구는 약간 아쉬운 척을 좀 하다가 그대로 오사카로 돌아가서 쇼핑을 하고 식사를 했다. 하루를 완전히 공친
셈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는 친구인데, 근사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친구의 활약을 멀리서 지켜볼 때면, 종종 그날이
떠오른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리고, 그 결과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없이 충만했던." --- p.261
역시 떠나는 것이 더
낫다...아니 떠나는 것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일지라도.
저자는 올 가을 다시 어딘가로 떠날 예정이라고 한다.
어디로 가서, 또 어떤 생각을 담아올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