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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학 기행 - 방민호 교수와 함께 걷는 문학도시 서울
방민호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 한국 근대 작가에 관한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되었었다.
그 작가들은 학창 시절 외에는 접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사실 기억 속에 잊혀졌었다.
학교 다닐 때조차도 시험을 위해서 해부하는 수준으로
읽었던 터라
감흥이나 감동의 기억은 거의 많이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우연히 듣게 된 강의는 한국 근대 작가들의 매력을
새롭게 알게 만들었다.
한명 한명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시대가 그 배경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지금으로 보면 어린 나이이지만,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격동의 시대는
그들의 정신 세계를 높고 깊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감춰야 했던 생각과 재능은 오히려 더 빛을 발하게 했고,
오로지 그 세계 집중했던 에너지들은 지금의 1년보다 더
강렬한 하루를 보내게 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시대, 그들의 열정, 그들의 고뇌가 그
시대의 시, 소설, 글에
그대로 녹아서 꿈틀대고 있는 것 같다.
싸한 아픔과 함께 뜻모를 아련함도 느껴진다.
아픈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치열하게 현재를 살았던 그
모습이 더욱 가슴뭉클하게 한다.
그 강의를 들은 이후 여행을 가게 되면 주변의 문학관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
이효석, 김유정, 황순원, 윤동주...
문학관에 가면 당시 그들이 느꼈던 그 아픔과 열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마치 그 시대를 함께 살아냈던 것처럼 친숙한 동질감도
느낀다.
글로만 읽는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을 많이 알게 된다.
그래서 문학관을 방문하기 위해 가는 것은 아닐 지라도
가급적 지근거리에 있으면 꼭 들러 보려고 애쓴다.
찾아 보니 우리나라에 설립된 문학관이 꽤 많다.
물론 유수한 작가들의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이지만.
도심보다는 외곽에 고즈넉히 있는 경우가 많아서 사색이나
고요한 침잠을 하기에도 좋다.
앞으로는 주변으로 갔다가 들르기보다는 문학관 자체를 찾아
나서려고 한다.
전국 곳곳에 조용히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는 문학관
기행을.

그렇지만 사는 게 바쁜 현실은 녹록치
않아 서울만이라도 먼저 나서야겠다 하고
마음먹고 있을 즈음, [서울 문학 기행]을 만나게 되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아쉬운 내 맘을 어찌 알고 이런
책이 나왔는지 반갑고 또 반가웠다.
책은 생각보다 두꺼웠지만, 그럼에도 한장 한장 넘어가는
것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조금씩 꼭꼭 씹어가면 아껴아껴 읽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연관이 있는 작가의 발자취나
일대기에 관한 가벼운 내용인줄 알았다.
글을 읽을수록 작품 속 배경인 서울의 특정 공간에서
출발해 작가론까지 깊이가 깊어진다.
국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 소설가인 저자의 시선은
단지 지리학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고,
작품 속을 횡으로 종으로 넘나들고,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엮어가며 그 의미를 깊이 파헤쳐간다.
저자는 이상을 비롯해 윤동주, 이광수, 박태원, 임화,
박인환, 김수영, 손창섭, 이호철, 박완서까지
총 10명의 작가와 작품을 서울이라는 공간에
놓고 소개한다.

기행이라는 특징을 잘 살린 약도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학자로서의 식견과 철학의 깊이가 더해진
촘촘하면서도 깊고 넓은 해석은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압도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자료와
사진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상의 번듯하다 못해 날카롭기까지 한 사진이라던가,
임화의 종로서에 연행되었을 당시의 사진,
손창섭의 정갈한 필체로 쓰여진 한국 국적의 메모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꽁꽁 숨겨두었던 작가들의 새로운
해석이나 관점을 읽노라면
작품에 대한, 작가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고 다양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상의 <날개>에 대한 해석이나 김수영
작품세계의 변천에 대한 견해는
날카로운 통찰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상의 문학을 사적인 관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특히나 「날개」는 매우 통속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지요.
주제 전달마저 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주인공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해석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이상 문학의 핵심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상의 시대는 극단의 시대였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공간 전체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삶 자체, 거처, 사고방식, 행동양식 등이 전부 파격적으로 변해가는 시대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성장해야 했지요. 이상은 바로 그러한
역사를 기록하고, 그 현실을 드러내고, 그 변해가는 시대가 인간 삶에 미친 문제들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p.47
특히나 책을 읽으면서 <잉여인간>의 손창섭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겼다.
저자의 작가에 애정이 흠뻑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손창섭이라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이 생기게
된다.
처음에 저자가 참 재미있는 작가라고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어디까지나 전문가로서의 관심과 흥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소개한 작가 손창섭은 정말 흥미로운
작가였다.
근대 문학사의 딱 한 줄 '<잉여인간>
손창섭' 외에는 알지 못했던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작가들을
이념과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잃어버렸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시인 임호도, 박인환도 그렇고, 손창섭도.
정말 이 책이 아니었으면 결코 관심을
갖지 않았을 작가들이다.

매일 종로의 길을 오고가며 책 속에서 나온 위치를
떠올려본다.
저쯤일까, 이쯤일까...
보신각 앞을 지나며 임화의 시 <네거리 순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이제는 고층빌딩 숲이 된 종로에서 그 옛날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아직 종로의 구석구석에는 옛스러움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안국역에서 종로까지 걸어가는
출근길이
옛스러운 정겨움으로 참 좋았는데,
이 책을 읽은 후부터는 그 너머 작가들의 숨결까지 더해져
더더욱 설렌다.

오늘 출근은 좀더 새로웠다.
책을 모두 읽은 후 아쉬움과 허전함이 들던 차에 북이십일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 [요조, 김관의 이게뭐라고...(http://www.podbbang.com/ch/11897)]에
이 책의 저자인 방민호 교수가 직접 출연해서 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늘은 이어폰을 끼고 종로로 향한다.
저자가 직접 들려주는 책의 에피소드와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들으며...
이제 서울은 어제의 서울이 아니다.
깊고 깊은 역사의 애증이 켜켜이 쌓여 숨쉬고 있는 역사의
보고,
한국 근대 문학의 심장으로 느껴진다.
나는 지금 그 심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