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김정운 글.그림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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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이 책의 저자 김정운 교수는(이제는 이 직함이 상관없을 터이지만 여전히 어울리는) KBS의 TV프로그램 <명작스캔들>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어디선가 봤을 테지만 워낙 재미있게 프로그램을 보았기때문에 가장 기억이 생생하다. 개그맨 뺨치는 유머로 사회, 문화 심리학적 해석을 내놓을 때면 고급진 웃음이 절로 나오며 공감이 되었었다. 촌천살인으로 핵심을 짚어내며 듣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만들었던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속물적이면서도 지적인 유머는 청량감과 신선함을 주며 대중에게 인기가 높아졌었다.

 

그렇게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가고 있을 때 돌연 그는 모든 활동(심지어 교수직까지도)을 접고 일본으로 떠난다는 보도가 나왔다.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긴 했지만, 그래서 지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막 봇물이 터질 시점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놀랍기까지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수많은 경제적인 유혹과 보장된 사회적 직위를 내던지고 떠날 수 있을까, 정말이지 그 용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꿈을 꿀 수는 있다. 바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시의 삶을 버리고 귀촌하여 슬로우라이프를 즐기고 싶다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싶다는. 그렇지만 대부분은 현실적인 욕망과 욕구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작건 크건 두손으로 움켜지고 있는 그 현실의 끈을 놓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떠난 것이다. 홀연이.

 

그런 그의 책이 갑자기 온라인 서점 메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제목의 책이.

 

 

표지에서는 피톤치드가 팍팍 나올 것 같은 짙은 초록색의 남자 형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책은 갑자기 떠난 일본에서의 생활을 그가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담은 에세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 초록색의 남자는 저자 자신을 표현한 것 같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이러한 청량한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떠나 있던 시간, 그는 일본 전문대학에서 2년간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갑자기 사라지면서 단절된 그의 일상과 그 시간을 통해서 깨닫게 된 이 생명의 에너지가 궁금하다. 제목이 첫번 째 단서를 주긴 한다. 자발적 고독으로 인한 삶의 변화, 그렇지만 '격하게'라는 표현이 드러내는 결코 그 쉽지 않았을 시간을 시간들. 어쨌든 읽어봐야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떠났으며, 그 기간이 그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책을 받아들었을 때 너무 설렜다. 고급스러운 종이의 재질의 느낌도 좋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 그린 그의 그림도 놀라웠다. 백마디 말보다 더 깊은 말을 하고 있는 듯한 흑백의 사진들도 빨리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다.

 

이 책의 부제는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이다.

그의 전공인 '문화심리학'이 뼈대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림과 사진이 어우러지면서 글은 더욱 풍성해진다.

저자는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념들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어 더욱 좋았노라고 한다.

읽는 사람도 그걸 느낄 수 있다.

그림이 훌륭해서가 아니다(물론 생각보다 너무 잘 그렸다). 말로 표현 가능한 것과 몸짓이나 소리가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의 차이인 것이다.

그림이라는 도구가 추가되면서 그 표현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 느낌이다.

 

 

책은 처음부터 '푸핫'하고 웃게한다. 역시 저자답다.

 

"오늘도 또 부엌 한구석에 주저앉아 울었다. 외롭거나 서글퍼서가 아니다. 진짜 너무 아파서 울었다.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넣으려고 열어놓은 싱크대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그런다. 아주 환장하게 아프다. 눈물이 쏙 빠진다. 부엌 한구석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 잡고 끙끙대고 있는데, TV에서 '고독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p.21

 

고독함에 대한 괴로움일까 잔뜩 기대하고 읽었는데 반전! 역시 가식없이 유쾌한 모습은 그대로다. 이후 이야기의 주제는 고령 사회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인간의 '고독'에 대한 여러 학문에 기초한 학자적 관점을 풀어낸다. 물론 아주 이해하기 쉽고, 재미나게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에서 다루었던 내용 중 핵심 키워드나 용어, 사조 등 배경지식이 필요한 내용을 아주 깨알같은 글씨로 설명해준다. 요즘 상담학을 공부하고 있어서 낯익은 개념들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어렵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앞부분만 읽을까 했는데 배경지식도 쌓고 좋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읽었는데 그 부분도 저자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각주처럼 참고자료인줄 알았는데 강의를 하듯 배경이 필요한 지식에 대해 그의 스타일대로 해설을 넣어준 것이다. 딱딱한 내용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저자 특유의 솔직한 표현이 깨알같이 들어 있다.

 

 

각 주제의 글마다 그에 해당하는 그림이 실려있고, 이어 일본에서의 그의 일상이 담긴 사진으로 마무리되는 패턴이 반복된다.

 

이 책은 3년간 신문에 연재한 컬럼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신문 컬럼을 쓸 때 그림이 꼭 필요하니 함께 실어야 한다고 기자를 설득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림을 보는 눈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담겨져 있는 그릇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더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문화심리학자의 깊고 복잡한 시선이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어떤 그림보다 풍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것이 진정한 융합 시너지가 아닐까 싶다.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는 인간이 왜 격하게 외로워야 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격하게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외로움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정신없을수록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도 좀 적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들 삽니다. 그렇게 사는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모임을 만듭니다. 착각입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바쁠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중략-

 

외로움은 그저 견디는 겁니다. 외로워야 성찰이 가능합니다. 고독에 익숙해져야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인 성찰'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심리학적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야 외롭지 않게 되는 겁니다. 외로움의 역설입니다." ---p.7~8

 

그는 '만 50세부터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꼽아보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거기에 '강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단위 마감이 이뤄질만큼 인기교수였는데 '강의'가 하기 싫은 일이었다니. 그는 더이상 속이고 싶지 않아서 그 길로 모든 것을 접기로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지낸 4년 동안 참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얻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일단 생뚱맞은 학위를 하나 더 땄습니다. 교토 서쪽 끝에 있는 교토사가예술대학의 단기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이제 내 최종학위는 '전문대졸'입니다. 원래 만화를 공부하려 했습니다. 노인용 성인 만화, 변태만화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정상 체위'만 고집합니다. 그래서 삶이 지루한 겁니다"

 

에로틱한 상상력이 다양해야 문화도 다양해집니다. 그런데 내 지도교수이신 기타무라 마사미 교수님이 내 그림 솜씨를 보더니 정말 잘 그린다며, 일본화를 배워보라고 했습니다. 만화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일본화를 배울 기회는 다시 없을 듯해서 교수님의 추천대로 일본화를 전공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3월에 졸업했습니다. 나는 내 전문대학 학위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독일의 박사 학위보다 훨씬 신납니다. 내가 정말 좋아서 한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10년 후면, 정말 세계적인 화가가 될 겁니다. 이 책의 표지도 내가 그린 겁니다. 볼 때마다 너무 자랑스럽습니다."---p.12

 

사람이니 후회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안정을 바라는 인간의 본능이 꿈틀거릴 때마다 헛헛한 마음을 다스려야 했을 수도 있다. 책의 층층이 쌓인 시간들 속에 그런 쓸쓸한 마음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글, 그의 졸업사진을 보니 이제 그는 그런 미련의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음이 느껴졌다.

 

 

타국에서의 외로움, 본질적인 외로움, 막막함의 외로움.... 그런 외로움들을 견뎌내고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연 것이다. 앞으로는 여수로 내려가서 화실을 열고, 그림과 학문에 매진할 거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여수일까?

아무런 연고없는 곳이 또다른 '외로움'을 만들어 낼 공간이기 때문이란다. 낯익은 서울은 함께 보낼 지인이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한번 견뎌낸 외로움의 공식을 다시 새롭게 적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또다른 삶을 얻은 것 같다.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부럽기도 하다. 다시 한국에 돌아왔음에도 예전처럼 그의 모습은 볼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책으로, 그림으로 만날 수 있어서 독자로서 여전히 반갑고 고맙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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