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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 위인전에 속은 어른들을 위한
함현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찌질'과 '위인' 두 단어가 과연 어울리는 조합일까?
[찌질한
위인전] 장난스런 제목같지만 실은
위인이라는 이유로 완벽한 허상을 만들며 한쪽 면만을 바라보려는 하는 우리의 편향된 시각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영웅은 모든 면에서 우월할
것이라는 착각, 그렇게 믿고 싶은 대중 심리에 허울을 저자는 치밀하면서도 예리한 시각으로 논리 정연하게 반박하고 있다. 김수영, 빈센트 반
고흐, 이중섭, 리처드 파인만, 허균, 마하트마 간디, 어니스트 헤밍웨이, 넬슨 만델라, 스티브 잡스까지 한 개인이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 뒤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의 밑바닥, 맨얼굴을 끄집어냄으로써 그들을 신격화하다가 오히려 매몰되어버리기 쉬운 진짜 힘의 원천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다.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는 뜻을 가진 표준어 '지질하다'를 발음대로 표기한 '찌질한'과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뜻을 가진 '위인전'의 결합은 그 자체로 모순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양극의 두 표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범주일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위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면모를 밝힘으로써 그들을 범인(凡人)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 역시 찌질한 모습을 보였으니 우리들 각자의 찌질함 또한 그냥 보아 넘어가주자는 식의 얄팍한 합리화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찌질함은, 한편으로는 대중의 머릿속에 자신을 위인으로 각인시킨 힘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다음을 바라보게 된 이도 있다. 끊임없이 자신의 찌질함과 맞서 싸우면서 생을 살아간 이도
있다. 그들이 위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에게 남긴 어떤 업적이나 작품과 같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닿기까지의 과정
때문일지 모른다."
-p.5~6

책의
시작은 시인 김수영으로부터 출발한다. '위인'이라는 허울좋은 말의 의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뒤이어 나오는 손꼽히는 인물들을
마다하고 왜 하필 김수영을 가장 먼저 배치했을까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김수영 편을 읽은 후에는 물론이고, 책을 끝까지 다 읽은 후에는 왜
가장 먼저 김수영이어야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찌질함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려하지 않는다. 아니, 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찌질함을 인정한 이도 있고, 외면했지만 결국 그 찌질함에 저항하는
힘으로 앞으로 나아간 이도 있다.
그러나 김수영은 그 찌질함을, 인간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보려했던 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 평생을 감추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또다른 찌질한 본성인데 그는 혼신의 힘으로 처절하게 그것과 마주
대하려고 했다. 그리고 '시'라는 도화지에 적나라하게 옮겼다. 전쟁, 배우자의 배신, 그리고 재회... 쉽게 겪을 수 없는 풍랑의 한가운데에서
김수영은 바른 정신으로 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그 찌질한 본성은 더욱더 그를 괴롭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 역시
인간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한 전쟁을 겪은 후 미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노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김수영 역시 극단으로 드러난 자신의 민모습에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똑바로 보려했고, 그럼으로써 육체를 떠난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했다.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애벌레가 고통스러운 탈피를 거듭하며 나비가 되듯, 그는 그 고통의 과정을 거쳐 시라는 자유를 얻고자 했다. 이 책에 실린 위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는 능동적으로, 스스로 그 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인간' 김수영은 '시인' 김수영으로 날아 올랐다.

두
번째 소개된 빈센트 반 고흐, 뒤이어 '이중섭'. 둘은 시대와 장소가 다름에도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정신병력이 있는 집안에 태어나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황이 안좋아지면서 스스로를 놓아 버리기 전까지 그들은
의존과 집착이라는 찌질함에 대항하여 예술혼으로 처절하게 싸우며 작품을 만들어낸다.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는 없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지지않기 위해서 붓을 잡았다.
"이중섭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김수영은 자신의 밑바닥을 똑바로 응시하며 스스로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그러한 고통을 감내하고 똑바로 다시 서기에는 여리고 약했다. 그러나 이중섭의 그런 모습이,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어린아이같이 천진하고 어린아이같이 철없고 어린아이같이 어리숙한 모습이 이중섭을 이중섭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인간 이중섭의 찌질함은
화가 이중섭의 예술성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흔히들 예술은 삶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중섭은 스스로의 찌질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수영의 찌질함은 이중섭의 찌질함과 다르다. 김수영의 삶은 이중섭의 삶과 다르다. 그리고 김수영의 예술은 이중섭의 예술과 다르다. 때문에 누구의
삶이나 예술이 더나은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p.90
인생
말년 자신의 모순된 신념에 대한 흔들림을 고백했던 간디, 영웅으로 추앙되는 것을 경계했던 만델라,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관계를 스스로 파괴했던
헤밍웨이, 버림받음을 특별함으로 만들어버린 극단주의자 스티브 잡스. 책에서 다루는 위인들은 대부분 상처를 가지고 있다. 상처없는 인간이 누가
있으랴만, 이들은 파고 들어가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끝내 똑바로 걸으려고 애쓰며 걸어갔다. 간디나 헤밍웨이처럼 보여지는 것보다 민낯이 더
적나라해서 깜짝 놀란 경우도 있지만 그 상처는, 그 찌질함은 그들을 그자리에 있게 한 힘의 근원이 되었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된
이유가 되었다.

책에는 '외전'이라고 해서 두 명의 특별한 인물이 더 실려 있다. 한 명은 가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진원)'이고 또 한 명은 독일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선동의 주범이었던 '괴벨스'다. 외전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빼었으니
위인의 범주에 넣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두 명의 인물을 다룬 이유는 전자는 가장 보통 사람, 찌질함을 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그의 노래와 삶 모두에서)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후자는 찌질함이 가장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괴벨스 역시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씨앗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위인이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괴벨스를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내가 위인의 시대와 정신적인 배경을 모두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1명의 위인의 시공간이, 정치, 철학적인 사조가
다름에도 그들의 행보를 어렵지 않게, 아니 오히려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저자의 충실한 조사와 보편적이지만 대중적인 설명
덕분이다. 특히나 심리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다소 깊어 보이는 저자가 위인들의 내면을 풀어 헤칠 때면 맛보기나마 심리학에서 접했던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이
안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듯, 저자의 지식의 깊이를 떠나서 그 내용 만큼은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풀어낸 것임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해가 쉬었다.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로 전달을 했기에. 그렇기때문에 위인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이야기를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였다. 무심한 듯 시크한 문체에 박식함을 드러내는 친절한 설명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두고두고 꼭꼭
씹어 읽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