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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내가 철학자 '강신주'를 처음 알게된 것은 2년 전 한 강연 프로그램에서였다.
철학자라고 하는데...물론 철학이라는 것, 인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을 때였으니 지식의 두께도 얇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는데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통렬하면서도 날카로운 '정의'를 듣는 순간,
'저 사람 누구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에 대해 궁금증을 털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김수영에 대하여]라는 독특한 책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가 철학자로서, 저자로서 점점 파워가 커나가고 있는 사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보다는 그의 강연을 먼저 알게 되었기에 그의 강의를 먼저 찾아 들었다.
의외로 그의 주 전공은 동양철학이었고, 그중에서도 '묵자'에 대한 그의 찬사에 어리둥절했었다.
'묵자?' 아무리 동양철학에 무지해도 그렇지 '묵자'가 누구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 '묵공'으로 그나마 알려졌다는데 이렇게 생소할 수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혁명가였던 '묵자'를 기득권이 받아들이고, 전파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 '묵자'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강의하던 저자의 모습.
어찌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황, 이이 모두 주자의 앞마당에서 놀고 있을 때, 홀로 과감히 그 울타리를 뛰어 넘으려 했던 유일한 인물이 정약용이었다는 것을. 고립된 유배지에서 조롱하듯 주자의 주장 하나하나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돌직구를 날리는 모습은 요즘 그의 수식어 '돌직구 철학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낯설지만, 포장하지 않고, 덧붙이지 않은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 후련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강의가 좋아서 이것저것 찾아 들었던 것 같다.
한참 재미있게 듣고 있었는데 중단된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부터 다시 혜화동에서 부활한 '벙커1'의 '다상담'까지. 벙커1 특강은 방송보다 더 솔직하고, 밑바닥까지 들어간 것 같아 불편하고 힘들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그의 말대로 마주하고 껴안아야만 진정 거듭날 수 있어서 그런가.
그 사연들과 공통 분모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듣는게 녹록치 않고, 도망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들어야만 했다.
어찌되었건 나는 '강신주'라는 철학자에 흠뻑 빠져 있건만 (그는 마지막 강의에서 자신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니까 자신을 믿지 말라고 했지만...ㅎㅎ) 주위에는 사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느낌을 함께 공유하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친구같아 좋기도 했는데...
이런... 어제 'SBS 힐링캠프'에 전격 출연하며 그 이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물론 그전에 'SBS 아이러브인' 강의에도 나오긴 했었지만. 그때보다 파장은 훨씬 더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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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다. 그의 책이, 그의 강의가 많이 알려지면서 가식없이, 솔직하게 이 힘든 세상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음 좋겠다.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 겉모습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이 지쳐 있으니까.
나만의 비밀 친구를 뺏긴 것 같은 아쉬움이 들 때쯤....
맙소사...! 방송 시작하자 마자 그가 하는 말.
"저를 처음 봤다면 잘 살고 계시는 거고, 제 책을 보거나 저를 만나러 온다면 문제가 있는 거죠..."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슬프기도 하다. 뭔가 훔치다가 들킨 사람처럼.
부끄럽게도 그의 책은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먼저 읽었다고 해야 하나. 도서관 반납일에 맞춰 허둥지둥 반납해버려 사실 거의 읽었다고도 할 수 없고, 제대로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영에 대하여]를 읽고 싶었는데 어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직도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강의 외에 책으로 대면한 그의 첫 번째.
500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은 읽기도 전에 압도 당한다.
그러나 [철학이 필요한 시간]보다는 훨씬 편하고 쉽게 읽혔다. 물론 개념을 정리할 때는 한참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수고가 들어가 쉽게 술술 넘겨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살뜰한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를 읽다 보면 여전한 그의 돌직구에 웃음이 나고 '아~' 하며 이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설명보다도 확실하게 이해를 하게 해주는 강력한 힘. 바로 스토리가 가미되었기에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설명하기 어려운 선의 느낌도 온전히는 아닐 지라도 충분한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토리가 있어 감정에 더 잘 몰입이 되고, 그 감정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
500페이지의 분량이 결코 지루하지도, 많게도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는 낯설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인간의 감정이 48가지나 되나?
그토록 많은 감정들을 우리는 느끼면서 살고 있나?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 p.17
"이 모든 감정들의 분출로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에, 내일을 더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으니까. 장차 내게 행복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지." --- p.18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시대, 그래서 감정에 대해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느끼는 일은 어쩌면 이 책의 제목처럼 '감정수업'을 받아야 할 만큼 망각되었는 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동안 왜곡되어 온 감정,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 그대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감정의 윤리학'을 추구했던 스피노자가 정의한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마주하고 들여다 보노라면 그 감정의 감각이 하나 둘 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어떤 한 감정에 꽂히게 되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되살려 내어 느끼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감정의 인식이 나쁜 감정에서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고, 좋은 감정이라면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자, 이제 돛을 펼치고 넓고 깊은 감정의 바다로 항해할 준비가 되었는가? 48명의 세이렌(Siren)의 노랫소리를 마음껏 즐겨라. 하지만 어느 한 감정에만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감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오디세우스처럼, 지금 우리는 나 자신만의 감정에 이르려는 항해를 떠나는 것이니까. Bon Voyage!" --- p.26
책을 읽다 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당황도 하게 된다.
'당황'에 대한 정의... 우스개소리로 당황을 정의했던 기억은 있는데...
과연 '당황'은 어떤 감정일까?
"당황(consternatio)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무감각하게(stupefactum) 만들거나 동요하게(fluctuantem) 만들어 악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된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당황의 감정을 정의하면서,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이 경이로움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요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을 고려하는 소심함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이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멜러즈의 마음 상태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설명 아닌가.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도 새롭게 꿈틀대는 욕망에 대한 놀라움으로 제약되니, 멜러즈는 '무감각해지게' 된 것이다. 동시에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은 여자를 피했을 때 발생하는 악을 고려할 수밖에 없으니, 멜러즈는 '동요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당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신 상태, 요즘 말로 멘붕 상태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당황은 단순히 멘붕 상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수반하는 감정이다." --- p.155
감정의 응용편이자 실전편이라는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는 '당황'이라는 감정에 대해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단순히 후배나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망이 머리를 들 때가 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결혼했지만, 허니문에서 그와 섹스를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혹은 클럽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폄하했던 내가 부득이하게 클럽에 들어갔는데 음악과 조명에 몸을 맡기는 낯선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처럼 전혀 예상치 않았던 욕망을 내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한마디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면의 욕망과 맨얼굴의 욕망이 우리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면, 당황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니 당황에 빠질 때 걱정할 건 없다. 무조건 맨얼굴의 욕망, 즉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경이롭게 생각하는 욕망이 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여린 사람들은 맨얼굴의 욕망을 거부할 수도 있다.
-중략-
뭐,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에게 저항해 보라. 맨얼굴의 욕망을 부정하고 가면의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낯빛은 피폐해지고 삶은 무기력해질 테니까"
심각한 감정의 정리에 머리 아프다가도 저자의 이러한 명쾌한 처방전을 들으면 말그대로 당황스럽지만 마음은 편안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안도감이랄까. 낯선 곳에서 그 감정을 만나더라도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각 감정들에 대한 정의와 소설의 인용 못지 않게 재미있는 것은 그 소설의 저자에 대한 소개이다. 자전적인 소설들이 많다 보니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할 터, 그에 대한 친절한 소개는 책을 더 풍성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고맙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부분은 매 장마다 삽입된 '감정'과 연결선상에 있는 '그림'이다. 처음에는 '뭐지?'하는 느낌으로 봤는데, 책을 읽어 갈수록 그 느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분출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는 느낌이었다. 잘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에 대한 시각화가 되기도 휴식처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림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다. 멋진 문학작품과 함께 48점의 그림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책은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 책이 있는 가하면 어떤 책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한장한장을 아껴가며 읽는 책도 있다. 이 책은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내겐 줄어드는 것이 몹시 아까웠던 책이다.
저자의 강의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가, 책을 읽을 때에도 저자의 목소리, 말톤으로 읽힌다. 그래서 편안하게 앉아서 저자의 개인 강의를 듣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저자 특유의 말버릇이 아마도 글 속에서도 살아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강의가 줄어들어 들어 갈 때마다, 만날 수 있는 문학 작품의 수가 적어질 때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그림의 환의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 때마다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에필로그를 읽어 보니 문학작품을 함께 뒤지고, 그림을 선별하는 작업에 저자 못지 않은 편집자의 고된 수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저자, 편집자의 노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저자, 책 뿐만 아니라 독자 역시 꽤나 운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