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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만나는 사상 - 역사와 사회를 이끄는 30가지 사상의 향연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 문학, 역사, 음악, 미술.... 인문학과 관련된 책, 그중에서도 특히 철학과 관련된 책을 읽을 때 맨처음 벽에 부딪치는 것은 것은 바로 그 사상적 배경이 되는 '용어'이다. 분명 우리말인데 외국어만큼 직관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읽어도 읽어도 흡수가 되지 않는 용어과 개념들은 책의 속도를 더디게 한다. 그 사상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사상에서 뿌리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해서 들어오는 과정상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내 지식의 부족, 노력의 부족만 탓했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도 아니고 순전히 학문적인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조합한 용어들이 쉽게 인식되는 것이 더 이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용어도 용어지만 그에 대한 설명 역시 외국어처럼 이해 안되기는 매한가지다. 철학 용어를 비롯해 수학, 영문법 등등에는 정말 쉽게 인식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많다. 이들 대부분이 일본에서 번역한 일본어를 다시 번역하는 과정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왜 그토록 이질감이 느껴지는 지 그제서야 납득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용어를 잘 알아도 깊이있는 이해를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지만 용어와 개념 자체에서 오는 심리적인 장벽은 그 벽을 더 두텁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철학은 대중과 소통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형식으로 그 벽을 조금씩 낮춰가고 있는 것 같아 나 역시 조금씩 철학, 인문학 책들을 손에 쥐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 어렵기는 하지만 말이다.
요즘처럼 많은 책이 쏟아지기 전에는 그래서 읽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청소년 대상의 철학, 심리학, 문학 등의 인문학 책이었다. 아무래도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추다 보니 최대한 친철하게 설명이 되어 있고, 아이들이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재미도 가미가 되어 있기 때문에 딱 내 수준이라는 생각에 지금껏 즐겨 읽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만나는 사상] 역시 청소년 대상의 인문학 책을 읽던 중에 만나게 되었다. 앞서 얘기했던 그 용어의 장벽을 이번에는 넘을 수 있을 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책을 받자마자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대한민국 1세대 철학 교사로서 현재에도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한겨레, 경향 신문을 비롯 조선, 동아, 중앙 일보에도 책과 사상에 관련한 다양한 글을 기고했었다는 것이다. 지면이 무슨 상관이겠냐 싶기도 하지만 주제가 사상과 관련된 글인데 보수와 진보 신문을 가로 질러 싣는다는 어째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았었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한다.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공격과 질타도 당했다고 한다. 보수 언론에 실을 때는 진보 쪽에서, 진보 쪽에 실을 때는 보수쪽으로부터. 그는 담담히 밝힌다.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사안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두고 고민한다고. 무색무취, 박쥐라는 비난이 쏟아져도 '철학하는 사람'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익숙한 편견이 아닌 현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냉철하고 최선인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이념과 사상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가치와 평가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쪽으로도 기울지지 않는 객관적인 시각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특히나 가치관을 형성해가는 청소년 대상의 책이니 만큼 냉정한 서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 싶다.
책에서는 구조주의, 해체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개발 독재 등 아직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내용도 그대로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이 아직 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인데 저자가 서문에서 단언한 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러한 입장은 시기적으로 양극이 극도로 분리된 요즘 민감하게 느껴질 부분에 대한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편이건 간에 우리가 무엇을 봐야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이다. 이는 현재 진행중이고 답이 아직 나오지 않은 부분에 고민을 해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2007년, 미국 기업 연구소(AEI)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자유 민주주의보다 개발 독재가 더 효과적이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미국 등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경제 성장률은 2.62퍼센트 정도지만, 같은 시기 중국·싱가포르·러시아 등 개발 독재를 한 나라들의 경제 성장률은 6.28퍼센트로 훨씬 높았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도 개발 독재 시대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개발 독재보다 민주주의가 나은 게 뭐 있는가? 선거 때마다 정치가들은 경제 살리기를 외쳐 댄다. 강력한 지도력으로 경제 성장을 일궜던 개발 독재의 추억은 그들의 주장에 솔깃하게 만든다. 그러나 철학자 김상봉은 "박정희 숭배는 돈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수능 성적을 올리는 데는 야간 자율 학습이 꽤 효과적이다. 하지만 평생 야간 자율 학습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 개발 독재도 마찬가지다. 개발 독재는 영원히 이어지지 못한다. 성장은 공평한 분배와 민주주의라는 열매로 맺어져야 한다. 성장만 있고 분배와 민주화가 없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 제 뜻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부잣집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그렇지만 시끄러운 정치판, 주춤한 경제를 보고 있으면 여러가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진정 개발 독재는 사라져야 하는 악일까? 민주주의는 최상의 정치 제도라고 할 수 있을까?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단순히 더 많은 수입을 바라기 때문일까? 민주주의를 한층 발전시키려면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할 테다." --- p.224~225
길게 인용했지만 이렇듯 독재 정권의 음과 양에 대한 설명을 한 후,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각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서술 형식이다. 시대 착오적인 낡은 사상처럼 치부되기 시작한 민족주의도 그러고, 극단적으로 달려가는 빈부 격차의 원흉 신자유주의 사상 역시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질문 거리를 던지고 있다.
또한 각 장의 끝에는 철학적 화두로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서 생각해볼 거리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다.
"일부러 본문 내용과 조금씩 겹치도록 구성했다. 철학적인 사색은 한 번의 물음으로 끝나는 법이 없다. 거듭 묻고 다시 따져 볼 때 세상을 보는 눈은 조금씩 깊어진다.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내가 던진 물음보다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더없이 반가울 듯 싶다." --- p. 8 <책을 열며 中>
저자는 각 장마다 '더 읽어 볼 책'을 제시한다. 좀더 알아 보고 싶거나 깊이 있는 내용의 이해를 원한다면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교과서에서 만나는 사상]이다. 이는 이러한 사상들이 교과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교과서에서는 이렇듯 사상의 성장, 발전, 그리고 결과 등에 대한 배경이 자세히 실려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개념과 사상을 달달 외우고, 시험의 답을 찾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닐 지... 세월이 흘러도 답보 상태에 있는 철학 교육은 아직도 온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답답한 현실에서 그나마 이렇게 아이들이 자주 접하고 있는 교과서에서 출발할 수 있는 철학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용은 힘들 수 있지만 다양하고 쉬운 예와 풍부한 인용, 그리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설명은 책을 읽는 내내 소설책 읽는 이상의 재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청소년 대상의 책임에도 읽고 나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얄팍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직은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지만 언젠가는 교과서에도 이렇게 다양한 시각의 철학을 학교에서도 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기를 안타깝게 그리고 간절히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