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학자의 고향 - 조선시대 학자들의 리더십과 역사 기행
KBS 학자의 고향 제작팀 엮음 / 서교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학자의 고향]은 KBS의 동명 다큐멘터리 <학자의 고향>을 책으로 엮어서 낸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이 프로그램을 보지는 못했었다. 다큐멘터리를 즐기고 자주 보는 편인데 이 프로그램은 책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역사 다큐멘터리의 장점은 상상을 하기 힘든 부분을 시각화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이해가 쉽다는 것과 일반적인 같은 내용이라도 시점과 관점, 형식을 달리해 구성하기 때문에 같은 사건, 같은 인물이라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학자의 고향> 역시 그랬다. 당대 최고 학자의 생가와 유배지, 혹은 일정 기간 머무르며 영향을 미치고 받은 곳을 따라서 인물을 탐색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고향'은 실제의 고향일 수도 있고, 마음의 고향일 수도 있다. 직접 그 곳으로 찾아가 발자취를 밟아가면서 어떻게 성장을 했고,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학문을 정립하여 당대에 영향을 미쳤는지, 눈을 감기 전 말년의 생활까지 일대기를 기거했던 곳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총 45회에 걸쳐 26명의 학자의 삶과 업적을 소개했는데 이 책은 그 중에서 조선시대 16명의 학자를 엄선해 재구성해서 소개하고 있다. TV에서 다 하지 못했던 내용을 좀더 추려 모았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출판한 몇 권 읽은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이미 치밀하게 자료 조사와 구성을 마쳐서 그런 지 책으로 읽을 때는 더 탄탄하고 안정감이 느껴졌었다. 이 책 역시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더 추가된 자료를 보강하여 책으로서의 완성도를 더하고 있었다.
특히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이 기대가 되었던 이유는 이황이나 이이처럼 일찍이 그 출생과 학문의 과정 혹은 그 영향력이 잘 알려져 있는 인물 뿐만 아니라 정철, 윤선도, 조식이나 송시열처럼 대중적인 역사에 잘 드러나지 않은 학자를 다루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또한 역사 속에 대표적인 변절자로 낙인 찍힌 신숙주나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에 대한 재조명도 흥미롭게 느껴졌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일부러 TV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었다. 방송 내용을 먼저 보면 방송 내용의 장면이 머릿 속에 아른거려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할 것 같아 책을 먼저 읽고 방송을 챙겨보았다. 책을 읽고 방송을 보니 책의 내용과 방송 내용이 겹쳐지며, '아하, 책에서의 장면이 이것이었구나' 하고 연결이 되는 것이 꽤 되었다. 책 속에서는 그냥 흘러 갔던 사진이나 내용들이 방송을 보니 하나하나 살아나는 것이 아무래도 방송에 뿌리를 두고 있는 책이기에 방송에서의 비중과 책에서의 중요도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자료의 인용문과 상당히 많이 나오는 시에서 였다. 학자의 풍모가 그대로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당시의 심경을 옮겨 놓은 '시'인데 그냥 읽자니 그 절절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용문 또한 무게감이 덜 느껴졌다. 프로그램에서 같은 부분을 보노라니 원본에서의 발췌하는 장면이나, 장중한 음악 등이 가미되면서 그 내용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방송을 보고, 책을 읽거나 책을 읽고 방송을 보거나 순서는 크게 상관이 없을 듯 하지만, 둘다 함께 읽고 보는 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듯 싶다.
이 책은 조선의 시작을 알리는 '삼봉 정도전'으로 출발을 한다. 그리고 세조 왕위 찬탈의 조력자 '보한재 신숙주'를 거쳐서 단종 폐위 이후 산천을 떠돌았던 '매월당 김시습'의 뒤를 이어 방촌 황희, 서애 류성룡, 오리 이원익 등 시대 순으로 학자의 길을 정리한다. 신숙주에 대한 재조명은 오랜 오해의 뚫고, 그의 업적과 학문의 깊이는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정도전의 깊이있는 추적은 아스라히 사라져간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있었던 것은 어부사시사로 국어책이나 고전에서 더 익숙하게 보았던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의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사 시간에도 국어 시간에도 만날 수 없었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서의 그들의 신념과 행보를 보는 것은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백성을 생각하는 그 마음 그대로를 행동에 옮겼던 정철과 윤선도의 삶은 뛰어난 문학에 묻혀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고, 그러한 삶을 통해서 본 그들의 문학 작품은 이전보다 더 깊은 울림을 전해 주었다. 이 책의 표지로 '송강 정철'의 초상화를 삼은 것은 아마도 이렇게 정치가, 학자로서 새롭게 조명한 책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많은 학자들의 뛰어난 업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위기와 고난의 시절에 만들어진다.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학자가 정치적인 혼란 속에 연류되면서 유배와 좌천을 당한다. 복직과 재유배 등을 반복하며 긴 세월의 고난을 겪어야 했는데 한결같이 이 시기에 엄청난 독서를 하거나 학문을 정립하거나 후대에 길이 남을 책을 저술을 한 것이다.
정약용의 18년 유배를 두고 '개인에게는 불행이지만 조선의 역사에는 행운이었다'고 한 일본인 학자의 평이 과장이 아니었으며, 이는 정약용 외에도 이 책에 소개된 학자들 대부분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타지에서 고독과 절망을 이겨내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학자적 수양이었다. 외롭고 힘겨운 그 시간을 그들은 '책'과 '글'로 견뎌 냈고, 후대에 길이 남을 빛나는 결실을 남기게 된 것이다.
16명 학자의 삶과 발자취를 따라 가노라니 한 사람의 인생은 덧없을 수 있지만, 굵은 신념과 정체성은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넘어 역사의 의미있는 한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개인의 불행이 역사의 행운을 만들어낸 것처럼. 그러므로 파란만장한 삶 끝에 맞은 쓸쓸한 말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반짝이는 그 영혼의 기록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거칠고 어려운 힘든 삶의 여정에서도 찬란하게 빛났던 16명의 학자들의 멋진 삶의 자세를 만날 수 있었던 힘들지만 흥미로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