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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 -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김운하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1월
평점 :
"나는 삶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글을 썼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글도 쓸 수 없다." --- p.15
오스카 와일드의 이 문장은 이 책 [릴케의 침묵]을 쓴 저자 자신의 심정을 완벽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문장이 저자가 오랜 기간 글쓰기에 '침묵'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그 고통의 사유를 걷어내고, 다시 세상 밖으로 언어를 내보내기까지의 과정을 '글쓰기' '침묵'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침묵과 글쓰기...상반된 것 같은 두 개의 관념은 시간차를 두고 이어졌을 때 운명적인 조합이 된다는 것을 저자는 한발한발 침묵의 과정에서 나오는 걸음걸이를 통해서 보여준다.
"혹은 그것을 더 열렬히 사랑하는 수다와 절대적 침묵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며 존재하는 어떤 행위가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모든 존재들의 참된 목소리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문학의 기원이자 글쓰기 최초의 문장이다." --- p.23
"글을 쓴다는 것은 내면의 절대적인 깊이로 침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의 가장 깊은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고독이다. 고독은 침묵의 밀도 높은 근원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로 설명될 수 없다. 태초의 혼돈, 신이 최초로 입술을 열기 전 빛과 어둠이 한데 뒤엉킨 채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그것이 침묵이다. 깊은 동굴이 빛을 삼켜 감추어버리고 있는 상태다."
---p.32
시인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발표하고 나서 <두이노의 비기>를 쓰기까지 10년 간의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릴케의 침묵은 단순한 언어의 부재가 아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침잠해 있을 때가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이다. 침묵이 스스로 넘치고 범람하지 않은 한, 함부로 입술을 열어 외쳐서는 안 된다."
---p.93
동서양의 철학을 통해 깨달은 사유를 풀어 낸 저자의 전작과는 달리, 이 책은 이러한 내면으로 향하는 깊은 침묵 속에서 끌어 올린 진정한 삶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물론 이 책에는 수많은 사례와 인물이 나온다. 무의 형상화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서로가 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인용과 인류 공통의 경험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서 시작한 글쓰기가 아닌 듯. 릴케처럼 터져나오기 전까지의 침묵을 받아 적으며 휘갈려 써내려 간 글은 문학과 철학의 초보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버거움이 있다. 서양 철학의 근간이며, 가장 원초적인 인간을 볼 수 있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에 빗대어 종종 표현되는데, 읽는 도중 '누구였더라, 어떤 상황이었었지?'를 고통스럽게 기억해내야 하기 때문에 저자의 느낌과 한 번에 소통하기가 힘들다.
물론, 앞뒤 전후를 살피며 떠올릴 수는 있지만, 섬세한 감정과 순간을 포착해 표현해 낸 저자의 감상을 온전히 공유하기에는 내 발걸음이 너무 뒤쳐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보자용 책처럼 앞 뒤 설명이 들어가다 보면 감정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겠지만, 침묵과 함축을 통한 공명의 공간 확보를 위해서 필요했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깊게 공감하기 힘든 독자는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저자의 글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짧고, 쉽다. 수식어구가 별로 없는 그의 글은 쉽게 읽혀 내려간다. 그럼에도 글이 빨리 닿을 수 없는 것은 어려운 형식의 글이 아니라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깊은 곳의 이야기들. 시간, 삶과 사랑...그리고 예술.
단순해질수록 정신은 풍요로워진다. 깊은 침묵 속에 집중한 이 세 가지의 주제는 우리 태초의 감정을 건드린다. 오래 전에 남겨 놓은 선비의 글들은 달빛이 드리워진 고요한 수면처럼 숨막히는 정적의 순간을 그대로 전해 준다. 그리고 함께 그 순간을 사유하게 한다.
석양은 맑은 시냇물 다리 위로 내려앉고
낙엽은 떨어져 가을 가는 길을 채우네.
나그네 가는 길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데
말은 차가운 시냇물에 그림자 떨구며 건너고.
"그래, 이 한 편의 시를 얻기 위해 그토록 긴 방랑이 필요했던 것인가 보다. 이 시는 이제 보니 너를 위한 시였구나. 이제 됐다. 이걸로 내 생은 충분하구나. 그만 가자꾸나." --- p.75
출세와 부귀영화에 대한 갈망을 접고,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방랑해야 했던 어느 이름없는 선비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긴장감 넘친다. 안타까울 수도 있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시간과 삶, 예술의 의미와 번뇌가 그대로 담겨있다.
삶이든 예술이든, 시간이든...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입을 닫고 침묵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자는 이 하나의 근원적인 '본질'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전방위적인 접촉을 했다. 결국 다시 돌아와 '침묵'으로 마무리한다. 길었던 그의 긴 침묵의 의미에 대해서.
"신비주의자들은 침국을 숭배하고 언어를 금했다. 그 결과 침묵을 뜻하던 단어 mysticos가 신비mystery로 바뀌었다. 밤은 사회적인 모든 것을 침묵시킨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 자정이 넘은 시간의 대지에는 오직 깜깜한 어둠과 침묵만이 존재했다.
우리가 여전히 밤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는 밤의 어둠만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진짜 얼굴을 되찾아주기 때문이다. 마스크가 아닌 얼굴을. 타자로 변해버린 자기가 아닌 진짜 자기를. 거추장스런 옷 대신 벌거벗은 진짜 육체를.
벌거벗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자들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 우리는 사회인으로서의 역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길고 오랜 세월을 야생의 동물로 살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