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서둘러라 - 샘터와 함께하는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재순 지음 / 샘터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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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시작된 인연이었는 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창시절, 월간 <샘터>는 매달 받아보는 즐거움과 설레임을 느끼게 하면서 커다란 위안을 주었던 잡지였었다. 당시 샘터를 처음 받으면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이 바로 뒤표지에 깨알같은 글자로 빼곡히 쓰여 있던 뒤표지글이었다.
때론 예리하게, 때로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시각으로 시대를 읽어내는 발행인의 글은 뒤표지를 광고로 채운 대부분의 다른 잡지들과 샘터를 차별화시켜주는 요소가 되기도 했으며, 부담없는 가격을 묵직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기도 했다.
 
한 20년 간을 잊고 살다 최근부터 샘터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도 간간이 마음의 위안이 필요할 때 전철 가판대에서 사서 보긴 했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강산이 변해도 몇 번 변했을 시간임에도 샘터의 뒷표지글은 여전히 언제나 그 자리에서 시대를 보는 창으로 그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변함이 없어 준 것이, 여전히 건재한 것이 심히 오랜만에 찾은 독자는 반갑고 또 고마웠었다.
 
 
[천천히 서둘러라]-샘터와 함께하는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샘터>의 뒷표지글을 모은 책이다. <샘터>가 쌓아 올린 세월의 두께는 뒤표지글 모음만 벌써 네 번째의 출간이라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샘터>를 받아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뒤표지부터 읽는 습관은 나만의 방법이 아니었나 보다 . 추천사를 쓰신 이해인 수녀님이 그러하셨고, 이원영 중앙대 교수님이 그러셨다고 한다. 아니, 아마도 <샘터>를 즐겨 읽는 많은 독자가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을 목표로 일정한 시간을 두고, 주제를 잡아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한 달 한 달을 뚜벅이 걸음으로 그야말로 '천천히 서둘러서' 걸어온 발자국을 묶은 책이기에 읽는 맛이 좀 색다르다.
다양한 재료가 각기 다른 맛을 내면서도 한 가지의 맛으로 모아지는 샐러드와 같은 느낌이랄까.
또한, 현재에서 과거를 회고하며 쓴 글이 아니라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읽을 때 역시 그 때 그 순간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워낙 주제와 소재도 다양했지만, 그때 그때 떠오른 사회적인 이슈도 외면하지 않고 다룬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만큼 이 책을 읽다 보면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진리를 만날 수도 있고, 세월이 벗겨 버린 진실의 모습과도 마주하게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시간의 흐름으로 달라진 현재의 모습을 글의 끝에 추신으로 달아 놓음으로써 단지 오래된 옛이야기를 다시 꺼내보는 과거형에 놓지 않고, 현재의 관점으로 다시 끌어당겨 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전 나누었던 담론임에도 온고지신의 진행형으로, 지금 여기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2007년 세상을 떠나신 금아 피천득 선생님을 기리는 글에 말미에는 이후에 소식을 들려줌으로 다시금 그를 기리고 추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97세였습니다. 나신 날이 1910년 5월 29일이었고, 돌아가시고 장례한 날도 2007년 같은 날이었습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일지 모르지만, 사람이 나고 죽는 날의 조화(化)는 신만의 뜻이겠습니다.
선생님은 5월을 무척이나 찬미하셨습니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라고 읊으셨지요.
-중략-
선생님을 여의는 영결식은 피아니스트 신수정 님의 애수가 감도는 피아노 선율에 이끌려 시종 엄숙하게 치러졌습니다. 선생님은 "사랑하고 떠난 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라고 하셨습니다.
(2007. 7)
 
-5월에 태어나 5월에 떠나고 마침내 5월이 된 금아 피천득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되었습니다. 2008년 6월 '금아 피천득 기념관'이 서울 롯데월드 내에 문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이 생전에 쓰시던 거실과 서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기념관에는 아직도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 p.179~180
 
그런가 하면 2011년 대규모 지진을 겪으면서도 분열되지 않고 질서를 지키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일본인들의 성숙한 자세에 대해 칭찬과 건승을 기원했던 저자가 최근의 역으로 가는 일본의 행보에 대해 실망하고 비판하며 일침을 가하는 글을 덧붙이기도 했다.
 
 
"각국의 취재진이 제일 먼저 놀란 시선으로 보았던 것은 이 엄청난 재난 속에서도 질서가 유지되고, 절도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호물자를 기다리는 줄이 아무리 길어도 새치기 하는 이를 볼 수 없었고, 앞다투어 제 몫을 차지하려고 큰소리를 내는 이도 없었다. 번화가의 상점에는 손닿는 곳에 상품들이 즐비한데도 누구 하나 훔치려고 하지 않았다. 재해에 편승하여 물건 값을 올리려는 상인도 볼 수 없었다.
-중략-
일본은 지금 엄청난 국난(國難)을 독재가 아닌 자유와 민주주의 틀 속에서 처리하고 있다. 그야말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위기관리 모습이다. 위기에 처할 때면 전체주의나 군부독재가 고개를 들던 일본이 아니었던가. 일본은 이제 성숙한 민주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의 엄청난 재해는 일본인들이 긍지와 자신감을 되새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리라.
"국가나 문명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멸망하지 않는다. 멸망하는 것은 그러한 도전(challenge)에 응전(response)하는 힘을 상실할 때이다."
아널드 J.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의 불후의 명언을 되새기면서 일본인들의 건승을 빈다.
(2011. 5)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고 2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일본은 급속히 우경화로 기울었고, 주변국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또한 원전 오염수 유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아 동북아 지역의 환경적 위기를 확산시켰습니다. 최근 2020년 하계 올림픽 유치로 경제 부흥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만큼 이제라도 올바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성숙한 민주 정치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 p.186~187
 
 
성숙했는 줄 알았는데 2년이 흐른 지금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일본의 태도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이러한 시간 흐름의 변화를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매력 중의 하나일 것이다.
 
워낙 박식한 저자는 그러나 결코 어렵지 않게 글을 쓰기 때문에 깊은 공감을 끌어 낸다. 많은 고민과 다독, 그리고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통찰로 전하는 메시지는 세대를 불문한 묵직한 울림을 전해준다.  
<샘터> 500호에 부쳐 소개한 <샘터>가 그동안 지켜온 글귀는 <샘터>의 지향점이자 동시에 <샘터>와 함께 걸어 온 그의 철학이기도 했으리라.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
-거짓 없이 인생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의 마음의 벗.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모습.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 눈 뜨고 꿈꾸는 사람.
 
"어떤 사람에게든 보다 숭고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좋은 날, 좋은 시간이 있는 법. 최대의 사건은 가장 소란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가장 고요한 시간에 일어난다."
샘터가족이여! 여러분이 믿는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시라.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되고, 자기 자신을 새기는 조각가가 되시라. (2011.11) --- p.20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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