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애니메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초등학생 때 이후로 별로 본 기억이 없다. 그나마 영상으로는 봤지만 또래 친구들이 좋아하는 책은 거의 보질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만화에 대한 오래된 나이 습관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깨버렸다. 사회 초년병 시절 회사 동료에게서 <원령 공주>를 소개 받고 본 후 <이웃집 토토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고양이의 보은>,<마녀 키키>는 물론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량 위의 포뇨>까지 그의 작품은 거의 다 구해다가 볼 정도로 팬이 되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의 사이였다. 원작보다 먼저 떠올리게 하고, 알프스의 소녀를 전세계의 친구로 만들어주었던 <알프스 소녀 하이디>,<플란다스의 개>, 그리고 독특한 배경과 살아있는 캐릭터, 탄탄한 스토리 구성으로 초등학생 사이에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미래소년 코난>까지 단지 제작자를 몰랐을 뿐이었지 그의 작품은 이미 내게 너무나 친근하고 익숙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그의 철학과 작품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일 것이다. <미래소년 코난>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의 <원령 공주>는 인간의 의해 파괴된 자연과 인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처럼 이제 인간은 뒤틀려 버린 자연과 그로 인해 생겨난 기형의 존재와 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늘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이 용서를 구하고 혹은 적을 물리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신파의 스토리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연은 돌연변이처럼 변했고, 인간은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조금은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동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한다. <원령 공주>,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가 그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랬다.
 
 
서로를 존중하고 '관계'를 재조명하는 것, 굴복과 정복이 아니라 다른 서로을 존중해주며 공존해가는 것, 그것이 그가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은 다른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보고 나면 늘 묵직한 숙제와 같은 감동을 준다. 그러면서도 만화 특유의 발랄함과 상큼함은 그런 무거운 메시지를 중화시켜주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어렵지 않고 경쾌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오랜 파트너 '히 사이시 조'의 음악도 그의 그런 철학과 깊이와 경쾌함을 잘 전달해주고 있다. 
 
늘 있어온 주제이지만, 색깔도 느낌도 다르게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능력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작품이 너무 좋으면 그것을 만든 사람도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책 [책으로 가는 문]이 도착하기 전부터 기다려지고, 받은 후에는 한 장이 아까워 조금씩 나누어 읽은 것도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자신에 대한 얘기 보다는 그의 상상력의 원천인 어린이책에 대한 얘기로 주제가 국한된다. 그의 수많은 작품에 영감을 준 책은 어린이책이었다. 창간 60주년을 맞는다는 일본의 '이와나미 소년문고'는 그가 맘껏 상상의 나래를 뻗어갈 수 있도록 해준 근원이었던 것이다. 400권의 책에서 그가 특별히 추천하는 책 50권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이 책은 원래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발간한 비매품으로 스튜디오 직원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선별해 추천사까지 써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간단하지만 진심이 담긴 추천사는 그래서 더욱 와 닿고, 더불어 그를 좀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책을 소개할 때 일러스트에 대한 언급이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그가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삽화의 관점에서 보는 어린이책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그가 선별한 책들을 보면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이 꽤 많이 있다. 물론 <로빈스크루소>와 같이 나중에 다시 읽으며 그 속에 담긴 진실의 가시를 간파하게 되었을 때 실망감을 주는 책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시대와 나라를 뛰어 넘어 감동을 줄 수 있는 고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작가의 책이나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외국의 책을 제외하고는 공감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설사 모르는 책이라고 해도 그의 사색과 같은 글은 책의 내용이나 배경을 떠나서 책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 오히려 읽어보지 않은 책들은 구해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책의 2부 '나만의 책을 만나다'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생각하는 '책'에 대한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어린 시절의 책읽기부터 책을 통해 얻게 된 것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영화 이야기까지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그의 깊은 속내까지 엿볼 수 있다. 신중하면서도 솔직하고 겸손하면서도 신념과 주관이 뚜렷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포용은 하되 할 말은 분명하게 하는 카리스마도 느껴진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 하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려고 책을 건넨다는 발상은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읽히려고 해도 아이들은 읽지 않습니다. 부모가 열심히 읽으면 아이가 읽지 않는다거나 오빠가 열심히 읽으면 여동생이 읽지 않거나 합니다. 책을 읽는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책만 읽는 아이는 일종의 외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놀면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으니까요.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p.142
 
그가 어린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아직도 잊지 않고 그의 작품에서 재현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어린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노력을 받쳐주었던 것이 바로 '어린이책' 읽기였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불어닥칠 바람의 시대에서도 필요한 것이야말로 '책'이라고 얘기한다. 아이들에게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책'. 삶의 근간을 이루는 나만의 '책'을 만나는 것이야 말로 이 혼돈의 시대를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책이 나만의 책을 만나러 들어가는 '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흰색 표지에 세로로 쓰여진 한글 제목과 일본의 원제,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흑백 사진이 실린 검은색 책띠는 참으로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원서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는 출판사의 노력도 그대로 느껴진다. 요즘에 일반적인 떡제본이 아니라 실로 묶은 양장제본이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처음에는 책장이 떨어지는 줄 알고 조심조심 읽었었다. 그러다가 제본이 다른 것을 알고는 마음 놓고 읽었는데 잘 눈에 띄지는 않는 부분까지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려는 정성이 느껴졌다. 그런 정성과 애정은 한 장 한 장을 아끼며 읽게 해줬고, 이 책을 내게 소중한 한 권으로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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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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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2 1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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