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시습이다 푸른빛 가득한 시리즈
강숙인 지음 / 여름산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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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특이한 책을 만났다.

이 책 [나는 김시습이다]를 읽기 전부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었는데 읽는 내내 이 독특한 형식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순수한 창작의 내용이라면 소설같은 삶을 산 김시습의 삶이

이토록 가슴이 절절하고, 아프게 느껴졌을까?

실제로 역사의 한 귀퉁이에 아직도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그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실존 인물이기에 이야기 속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분노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또한, 세조와 주변 인물들의 만행이 절제되고 건조하게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분노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김시습이라는 인물이 전해들은 이야기 형태로 표현되기에 자세하지도 않고,

결과를 전하는 형식으로 표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 속을 휘젓고 나온 슬픔과 분노, 황망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왜 그렇게 일생을 떠돌고 다니며 마음을 다스려야 했는지

그 자신의 마음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한 편으로 촉망받던 인재로 출사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날만을 기다리다 좌절된 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미련에 방황하는 부분에서도

진정 인간적인 모습과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육신의 안녕이라는 것이 어디 한 순간에 무자르듯 자를 수 있는 것이랴.

하물며 임금을 직접 알현하며 품었던 뜻을 스스로 접어야 했던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깊은 미련은 인간이기에 쉽게 가실 수 없었으리라.

 

세조를 찬양하는 시를 썼을 때는,

헛! 하는 작은 한숨이 나왔지만 긴 시간 방황하며 조금씩 깎이어 가는 분노와

그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범인으로서의 욕망이 이해가 되는 순간,

그래, 긴 세월 그리 방황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만일 문종이 좀더 오래살았거나, 단종이 좀더 보위를 이어 가서,

김시습이 세상에서 그의 능력과 재주를 펼쳤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서도 그가 방황한 세월이 없었다면 <금오신화>와 같은 작품은 나올 수 없었겠지만,

수십년 간 방황하면서도 시와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정작 그 결과는

많이 남지 않아 있어 안타까움을 더 짙게 한다.

책에서는 김시습의 시를 양반들이 가져가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고도 한다.

방황은 차치하더라고 그의 한과 설움, 고뇌가 섞인 세월의 깊이가 담긴

흔적이 잘 보전되었더라면 그의 아픔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그나마 그의 이름 석 자가 남겨진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언젠가 TV에서 김시습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의 행적을 쫓으며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 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는데,

한 발 떨어진 시각으로 봤을 때는 왜 그가 그렇게 방랑을 했는지 와닿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으로 전하는 소설의 형식을 빌은 책으로 읽으니,

비로서 그의 괴로움, 그의 고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처음 도입에 어린 시절 김시습이 할아버지 앞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두목의 시 <산행 山行>이다.

 

멀리 한산의 돌 비탈길 오르니

흰 구름이 이는 곳엔 인가가 있네.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가을 단풍 즐기니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더 붉네.

 

왜 이 시를 좋아하냐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어린 김시습은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답한다.

 

"마지막 구절에 있는 '붉을 홍 紅'자에는 단순히 붉다는 뜻만 아니라,

사실은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한층 품격이 높고 아름답다,

그런 뜻이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중략

 

"사람이 때를 잘 만나면 봄꽃처럼 살 수도 있지만 때를 잘못 만나면

서리 맞은 단풍잎이 될 수도 있는 거거든. 서리 맞은 단풍잎이 왜 봄꽃보다 더 붉은지는

네가 자라면서 직접 느껴 봐야 그 깊은 뜻을 알게 될 게다." --- p. 23

 

처음에는 나도 잘 몰랐다.

서리맞은 단풍잎이 왜 더 붉은지...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세상 풍파를 겪고 난 후 김시습은 죽음을 앞두고 어린 시절의 이 시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비로서 할아버지의 그 말 뜻을 깨닫게 된다.

 

'그래, 출사하여 꿈을 이루면서 봄꽃처럼 화려하게 사는 것도 좋았겠지만

평생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에 안고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 서리 맞은 단풍으로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삶이었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 p. 177

 

책을 읽으며 김시습과 함께 삶의 구비구비를 겪고 난 후에는

나 역시 그 봄꽃 보다 더 붉게 느껴지는 단풍잎의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고 그 단풍잎이 김시습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애잔한 마음에 책의 마지막 구절 <五歲金時習之墓 오세김시습지묘>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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