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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늬 있는 경성미술여행
정옥 지음 / 메종인디아 / 2022년 10월
평점 :
1920~30년대의 경성은 매력적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시대적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시류와 변화를 맞이하며 즐기는 인간의 본능이
슬프고 처절하지만 순수하게 융합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경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매력은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처음 느꼈었다.
어두운 공간에 있던 주인공이 무의식으로 찾은 곳이
극단적으로 화려한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이었다.
다시 한번 경성의 활기찬 사람들 속에서
제 몫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날기를 희망했던 마지막 장면에서 느꼈던 그 낯섬의 충격은
학창시절에 읽었음에도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 역사적 암흑기라서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았음에도
경성이라는 시공간과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생겼었다.
화가, 음악, 문학, 사진 등 예술가들은
제한되고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새로움에 대한 반짝이는 호기심과 열망으로
그 안에서나마 즐기고 향유하려는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복합적인 상황이 더 경성이라는 공간을 매력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터무늬 있는 경성미술여행>이라는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너무 반가웠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막연히 경성의 예술가들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이 활동했던 공간을 찾아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가면서
예술계를 훑는다고 하니
책 제목만 봐도 설레였고, 하루빨리 읽고 싶었다.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물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뒤늦게 미술의 매력에 빠져
10여 년 동안 미술관 도슨트 활동을 했고,
한 때는 갤러리도 운영을 정도로
이제는 미술과는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터무니없다'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 '터무니'는
'터의 무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표현을 인용한다면, 나는 이 책에서
'터무늬 있는' 우리 근대 미술을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이다.
p.7 「여행의 시작에 앞서」에서
처음 이 책의 부재가 왜 '터무늬 있는'인가 궁금했는데
지금은 없어졌을 수도, 흔적만 조금 남겨져 있을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을 따라가며 당시 화려했던 경성의 예술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근대식 건물이 즐비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백화점에
쇼핑객이 넘치는 공간이었으며,
모던보이, 모던 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화려한 도시이면서도 일제의 식민 지배 제도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던 이 시기에 경성은 근대기 미술의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시기까지 포함한 이 책은
그 경성의 미술 관련 장소들을
학습의 터, 창작의 터, 유통의 터로 구분하여 찾아 나선다.
그 시작은 북촌 고희동미술관, 중앙고등학교에서 출발한다.
식민지배의 시각적 도구가 된 조선의 별궁, 경복궁의
동궁 영역, 건청궁 영역을 살펴보고,
가장 많은 곳을 둘러보며 머무는 곳은
북악산과 인왕상에 둘러싸인 창작자들의 동네 서촌이다.
이상범 가옥, 천경자 집터, 박노수미술관, 무계원,
석파정 서울미술관, 환기미술관, 경복고등학교,
진명여중고교 터, 서촌 출구를 지나
세종로, 남촌으로 이동한다.
시각 이미지의 대중화와 미술시장의 확장이 있었던 곳으로
동아일보 사옥, 구세군 중앙회관, 덕수궁,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서울 프린스호텔 : 경성미술구락부 터까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우리 미의 탐구와 문화보국의 현장인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과 간송미술관, 노시산방&수연산방을
끝으로 여정을 마무리한다.
가슴아픈 시대상황으로 인해 흔적이 없어진 곳도 있고,
무지와 잇속을 챙긴 결과로 중요한 공간이
통째로 없어져버린 것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기적같이 그 공간을 유지한 곳을 보면 안도의 한숨이 나오지만
간송미술관처럼 지켜야하는데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여전히 갈 길은 멀구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이 책은 단순히 여정을 따라가며 미술의 에피소드를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꽤나 깊고 넓게
근대미술의 배경과 의미를 탐구한다.
그래서 때로는 한 장소와 연결된 인물와 당시의 상황 등
역사와 비평의 단계까지 들어가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단편적인 에피소드 중심이라면
생각해보지 못했을 질문과 그 배경까지 아우름으로써
진지한 미술사 수업을 듣는 것 같은 깊이감이 느껴진다.
여정을 마치고 저자는 아쉬운 마음에
이 책의 주제에는 살짝 벗어나지만
마지막으로 들른 수연산방에서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한국가구박물관까지 가볼 것을 추천해준다.
전통한옥과 더불어 목가구 중심으로 한
다양한 우리 전통 공예품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슨트 프로그램이나 체험 탐방 같은 프로그램에
종종 참여했었는데 그때도
도슨트 분들은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서
끝나고 어디를 가보시라, 혹은 지금은 시간상 안되지만
나중에라도 어디를 가보시라고 알려주시는데
마치 책으로 그런 열정적인 도슨트를 만난 기분이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나면 진짜 경성을 배경으로 한
미술나들이 체험을 한 기분이다.
인사동, 을지로, 청계천, 북촌, 서촌, 광화문 등
주거상 혹은 업무상 자주 다녔던 곳이다.
늘 역사 속의 거리를 걷고 있는 황홀한 느낌을 받곤 하는데
책을 보면서 더욱더 흠뻑 빠져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가는 여정을 앞에서 부터 표시하고,
이동을 할 때마다 위치를 표시해주었다면
공간의 느낌이 더 실감났을 것 같다.
그림과 사진도 조금 크고, 좀더 많았다면
보고 읽는 재미가 더하지 않았을까 싶다.
가지고 다니며 여정을 쫓아가라는 의도로
작은 판형을 선택했다면
그 또한 의미는 있어보인다.
날이 좀 풀리면 저자가 소개해준 여정대로
다시금 차근차근 따라가 봐야겠다.
이전에 봤을 때의 느낌과는 많이 다를 것 같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