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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 이동진 영화평론집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9월
평점 :
평소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영화평을 좋아했다.
'금요일엔 수다다'부터 어쩜 그 전부터인가.
'무비썸', '영화당'까지 쫓아다니며 그의 영화 해석을 즐겨듣곤 한다.
다소 어렵게 표현을 해서 선뜻 이해가 안될 때도 있지만
촌철살인같은 깊이있는 해석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분석에
어떤 영화평이든 믿고 보게 된다.
영화를 보고 올 때면 그의 블로그를 방문해
개봉영화 별점과 한줄평을 참고해보곤 한다.
그가 극찬한 영화들은 다소 무겁거나 밀도가 꽉찬 영화들이 많아서
찾아서까지 보긴 부담스럽지만
내가 본 영화의 평을 비교해보기에는 유용하다.
영화가 누구 한 사람의 관점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겠지만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내가 놓친 부분이나 또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됨으로써
훨씬 입체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한 번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리뷰나 영화평을 꼭 여러 편 챙겨본다.
좋았던 영화일수록 더더욱.
그런데 그의 영화평론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예약판매를 받고 있다는 온라인서점 홍보 메일을 받은 순간
전광석화처럼 달려가가서 바로 구매버튼을 눌렀다.
한동안은 그를 책과 관련된 방송에서 많이 봤다.
빨간책방을 비롯 비밀독서단 등도 열심히 찾아 보고 들었다.
그것도 물론 좋았다.
그럼에도, 그는 역시 '영화'다.
'영화당'은 한 주에 2편, 그것도 주제를 가지고
진행하다 보니 영화를 자유롭게 다루기에는
제약이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한편 한편에 그의 해석을
보고 싶다는 아쉬운 맘이 있었다.
최근에는 책과 관련된 일을 주로 해서 그런지
책도 주로 책과 관련된 책을 출간해서
약간의 갈증도 있었다.
그런데 그만의 스타일로 풀어낸
정통 영화평론집이 발간된다고 하니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었다.
예약한 후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실물을 손에 쥐었다.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a/hanna524/IMG_o2.jpg)
벽돌보다 더 두꺼운, 맞으면 무기가 될 법한 두께의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 으뜸이었다.
정가가 높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께와는 상관없이 충분히 지불할 의사가 있었지만
막상 묵직한 책을 받고보니 넉넉한 보너스를 받은 느낌이다.
그만큼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제본은 두께때문인지 간지나는 튼튼한 사철제본으로 되어있어
책장이 떨어져 나갈 염려없이 마음껏 펼쳐서 읽을 수 있다.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a/hanna524/IMG_o3.jpg)
책은 1999년의 <벨벳 골드마인>부터 2019년의 <기생충>까지
20년간 그가 써온 208편의 영화평론이 담겨있다.
208편!!!
웬만한 영화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른 내가 봤던 영화들의 제목을 찾아본다.
영화는 봤으되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던 영화들.
그럼에도 깊은 울림을 주거나
풀기 어려운 문제같은 것을 남겨주었던
영화들이 많이 눈에 띈다.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a/hanna524/IMG_o4.jpg)
책에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이 유난히 많다.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도 많은 편이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 변천을
볼 수 있을 정도로 7편이나 실려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많이 보긴 했지만
보고나면 늘 숙제를 받아 든 학생처럼
찝찝함과 함께 의문부호를 붙이게 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 책을 받고 가장 먼저 홍상수 감독 작품만 죽 읽어봤다.
워낙 한참 전에 아리송한 마음으로 봐서 그런지
영화평을 읽으면서도 기억에서 끄집어내기가 힘들다.
영화의 스토리보다 인물의 말과 행동, 장면을
편집으로 정교하게 짜맞춤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감독 스타일의 영화를
스토리를 쫒아가면서 본 내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관점과 숏, 변화 위주로 풀어 쓴
영화평을 읽어보니
영화를 전혀 보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한편 한편 보면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얼마 전 즐겨듣는 팟캐스트에
채소요리전문가가 출연을 해서 한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떠돌았다.
고기요리만 할 때는 삶이 단조롭고 지겹게 느껴졌는데
채소요리를 만난 후 채소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하루 하루 알아가다보니 삶이 의미있어졌다는 내용이다.
요즘 내가 딱 그랬다.
한참 돌진하던 생활이 잠시 주춤하다보니
무기력증까지는 아니지만
하루를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a/hanna524/IMG_o5.jpg)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중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를 보게 되었다.
몇 일전 신문에 책과 관련된 참고사진으로 실려 있던
스틸 사진을 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오늘,
별다른 생각없이 틀어놓고 보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난 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켜켜이 쌓아둔 책더미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이 책으로 옮겨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당장 해결해야 할 여러 일들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읽어보리라 하면서
가끔 눈인사만 하고 있던 터였다.
급히 목차를 살폈다.
역시나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단번에 읽어 내려갔다.
너무 간결하게 영화를 정리해주고 있었다.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웠던
그 생각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20세기 최악의 학살 사건을
가해자의 자리에서 되짚어 반성해보려는 태도이며,
피와 눈물로 반복해서 설명되어온
홀로코스트에 대해 다르게 말해보려는 시도다.
성실하게 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에서 연민의 대상일지언정
면책의 이유가 될 수 없는
무지의 폐해에 대한 경계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와 관련한
모티브들에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p.566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삶은 아직도 길다.
그 하루하루를 모르는 것으로 채워 갈 즐거움이 생겼다.
다시 탈탈 털고 일어나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서야겠다.
이 책은 그 즐거운 재료를 제공해줄 것이다.
내일은 어떤 영화를 볼까?
벌써부터 설렌다.
그러고보니 내일 10시에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기생충>을 다시 한번 볼까?
극장에서 본 후 여기저기서 워낙 많이 다뤄지다 보니
마치 몇 번을 본 듯하다.
이 책에 가장 먼저 실려있는 영화가 바로 <기생충>이다.
영화관에서는 스토리 따라 가기 바빴는데
다시 꼼꼼히 보고 싶어졌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되니까.
내일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