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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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책 팟캐스트 <요조 장강명 책 이게뭐라고!>를 통해서였다.

작가를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되다니!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아니, 읽지 않아서

특히 국내소설은 거의 읽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유명한 작가를 빼고는 잘 알지 못한다.

장강명 작가는 문학상 4관왕을 수상한

꽤나 유명한 작가라는데.... 나에게는 생소했다.

공대, 신문기자 출신 소설가.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그의 이력이 호기심을 자아냈지만

그럼에도...이공계 출신이지만 달필일 수도 있고,

마이클 클라이튼이나 테드 창처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멋진 과학소설을 쓰는 소설가도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그런 이력보다는

어눌한 말투지만 신문기자 출신다운

날카로운 해석이나 논리가 더 인상깊었었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굳이 찾아서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그의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

소개글을 보게 되었다.

세상 순진할 것만 같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거추장스러운 세상의 관습을 쿨하게 무시하고

자신의 소신과 기준대로 살아가는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잘나가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서

언론고시를 준비해 신문기자가 되고,

11년간 우수기자상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다니다가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소설가가 되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니, 쿨하게 무시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혼인신고만 하는 결혼을 한다.

식을 안올렸으니 신혼여행휴가도 없어

퇴직한 후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정말 이런 용기있는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그가 궁금해졌고

그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에세이는 그의 오디오 음성이 들린 것처럼

간결하고 느릿하다.

역시 소설가는 소설가다.

시선이 함께 움직이는 것같은

생생한 묘사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가 소설가임을 분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에세이는 그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왜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부터 시작한다.

HJ라고 부르는 그의 아내와 처음 만나게 된 때부터.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인 그와 그의 아내는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찐하게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부모님이 둘의 결혼을 반대하자

그는 쿨하게 동거를 선택하고

혼인신고로 결혼을 선언한다.

그리고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합의하고

어영부영 결심히 흔들릴까봐

아예 정관수술을 해버린다.  

어쩌면 사람들이 일상의 피곤함을 떨치기 위해서

상상만 하는 것들을 그들은 그렇게 과감하게 감행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부모님과 HJ를 설득해서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1, 2년으로 될 작업이 아니었다. 양측에 최소한 3년은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그 3년간 아마 나는 HJ에게 부당한 비난을 받고, 부모님의 무리한 요구를 웃어넘기며 진이 다 빠지고 말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선 내 감정이 중요하다. 나는 즐겁게 살고 싶다. 내 인생 3년을 그런 쓸모없는 일에, LPG 가스통과 화기를 서로 친하게 만드는 작업에 낭비하고 싶지 않다. 기회비용도 엄청나다.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해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감정 상태로 스스로를 가꾸면 3년 동안 장편소설을 최소한 다섯 편은 쓸 수 있다. 내가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감정 상태로 있어야 아내도 사랑하고 부모님도 사랑할 수 있다. 남을 사랑하는 일에도 에너지가 든다.

솔직히 내 부모님과 HJ가 왜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명절에 싫다는 아내를 자기 부모님 댁으로 굳이 데리고 가는 남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보기 싫은 친지들을 만나러 큰집에 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해마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상담이 급증하고 형제간 폭행으로 누군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꼭 나오는데, 다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친지들을 만나는 걸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모를 것이다. 그냥 막연히 명절에는 가족이 다 모여야 한다고 하니까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뭔지 알지만, 관습의 압력에 맞설 용기가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동기가

영향을 미친다." ---p.29~30

 

너무 직설적이고 솔직해서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관성으로 용기가 없어서 숙제처럼

그렇게 명절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마음가는대로 살기로 결정한 부부는

드디어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떠난다.

배경 빼고 2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설마 3박 5일동안의 신혼여행에서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다.

역시 소설가다운 면모이다.

3박 5일동안 보라카이의 일정이 섬세하게 담겨있다.

여행에세이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옵션도 두어 가지 밖에 하지 않고

그저 쉬고 먹고, 쉬고 자고, 책읽고 음악듣고,

그것이 전부인 그 일정을 어쩜 그리 생생하게,

세세하고 다이나믹하게 그려놓았는지.

단순한 여행스케치가 아니라 가능할 수 있다.

부부란, 사랑이란, 인생이란, 여행이란,

순간순간 그의 철학이 녹아들어가 있어

그렇게 여행지에서 인생을 생각해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아주 강렬한 한 장면 때문이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화이트 비치로 갔다. 해변의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해가 지는 걸 봤다.

그곳이 '적당한 장소'였던 이유는 어느 필리핀 소년으로부터 적당히 가까우면서도 또 적당히 떨어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스마트폰에 외장 스피커를 연결해서 바닷가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음악이 딱 노을에 어울렸다. 소년은 긴바지를 입고 상의는 벗은 채였다. 모래로 베개를 만들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쿨한 소년이 실제 세계로 나온다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매일 보는 풍경일 텐데 지루하지도 않을까.

우리는 소년의 음악을 훔쳐 들으며 해가 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중략-

소년의 스피커에서는 파 이스트 무브먼트, 아델, 리아나, 싸이가 나왔다. 소년은 무심하게 석양을 보는 듯하면서도 비트가 커지거나 멜로디에 중요한 변환이 있을 때는 다를 흔들거나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음악의 좋은 점을 몰랐다. 곡 길이가 10분, 15분을 넘어가고 박자가 두 번쯤 바뀌고, 기타가 미친 듯이 빨라지는 대목이 있는 '대곡'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쉽고 달콤한 노래들을 우습게 보았다. 친절한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허세만 잔뜩 부리고 다녔다.

'내가 여기 소녀였다면 저 소년과 사랑에 빠졌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소년도 우리도 바다만 바라보았다." ---p.172~174

 

얼굴도 모르는 그 소년이 너무 멋졌다.

주어진다고 모두 다 누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노을'이라고 불리는 곳이라지만

늘 곁에 있는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것을 즐길 줄 아는 소년이 부럽고, 또 멋졌다.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인물같았다.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어쩌면 오랜만에 찾아와서...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자연을 느끼고 음악을 즐길 줄 안다면

그 소년은 분명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것 같다.

 

마치 내가 그 곳에서 함께 석양을 본 것처럼

함께 음악을 들은 것처럼 힐링이 된다.

기분좋은 바람과 파도소리, 그리고 석양의 내음이

음악소리와 함께 어울려 느껴지는 것 같다.

 

마침....나도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았었다.

스피커에서는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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