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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집 생활 - 밑줄 긋는 카피라이터의 일상적 글쓰기
이유미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읽으면서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책은 대부분
자기계발서 분야의 책들이다.
한 때 내 스스로를 더 담금질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자기계발서 책을 닥치는대로 탐독했었다.
읽다 보면 용기도 불끈 솟고
게으른 일상도 반성하게 되고
다시 마음을 다지면서 긴장도 하게 되고
이 책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도 하면서
열심히 읽었었다.
그러나....읽다 보니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직도 모자라...모자라...
너무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열심히 살고 있는데...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끊임없이 돋움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읽어대던 자기계발서를 뒤로하고
이제는 책에 관한 책을 주로 읽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떻게 읽었는지가 궁금해서 읽다 보니
독서에세이 자체를 읽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었다.
읽다보면 정말 읽고 싶은 책도 생기게 되고
새로운 책, 새로운 작가도 알게 되고,
또 무엇보다 읽지도 않은 책이 친숙해지기도 하고
부분적이지만 그 책에 대한 지식이 쌓이는 맛도 괜찮았다.

[문장 수집 생활] 역시 책을 소재로 한 책이라는
소개를 읽고 습관처럼 읽기 시작한 책이다.
특히나 소설은 내가 거의 읽지 않고 있는 분야다.
발동 걸리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고
끊임없이 소설의 상황과 공간을 상상해야 하는 부담감,
현실에는 거의 없는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이질감 등이
소설에 몰입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직관적인 정보 위주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재미 부분에서 인정받은 소설 몇 권을 구입해서
읽기에 돌입했다.

이 책의 저자는 나의 성향과는 전혀 반대로 소설을 주로 읽는다.
읽다가 필이 꽂히거나
편집샵 카피에 응용할 만한 문장을 발견하면
필사를 따로 해놓는다고 한다.
당장 쓰지 않더라도 카피가 필요할 때
뒤져보면 제품에 어울리는 문장들을 찾을 수 있고
이를 살짝 비틀거나 가감해서 카피를 뽑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 속 문장들은 허를 찌르는 관점의
새로운 카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툭 던지는 카피는
그럴싸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을 주면서 기억에 오래 남게 된다.

"오후 4시,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 아닐까?
미처 못한 일을 처리하기엔 너무 늦고, 한결
부드러워진 햇살에 유리잔 속의 얼음이 은은하게
빛나는 시간. 낮잠 대신 롱드링크 한 잔을
마시며 자신의 나쁜 습관을 용서하고 보이지
않는 편지를 쓰는 시간. 무의미하게 흘러가버린
하루를 마치고 스스로 자신을 에스코트해 거리로
나서는 시간.
-사사 아랑고【미스터 하이든】 (북폴리오, 2016)
낮 4시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이 문장을 읽고 또 하나의
시간 표현 방식을 배웠다. 오후 4시을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라고 했다. 다 하지 못한 일을 처리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고, 나른해진 몸과 마음으로 하이볼 같은
연한 술이 생각나는. 오늘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는 구나,
오늘 난 뭘 했지? 생각이 드는 시각 오후 4시.
정말 그런가?
시간을 이야기하는 문장이니 '시계'를 파는 카피에
응용해봐야겠다. 이렇게 생활 공감을 이끌어내는 문장은
특별한 기능이 없는 제품일수록 좋다. -중략-

당신의 4시
지금 오후 4시는
집중하지 않으면 야근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각입니다.
내일 오후 4시는
짙어지는 가로수를 보며 커피 한잔 하는 시각이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4시, 라는 타이틀은 구체적인 시간을
어필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집중하게 한다. 여기에
분까지 써줄 수도 있다. ('당신의 4시 32분'처럼.)
이런 구체적이고 평이하지 않은 타이틀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하고
클릭해보게 만든다." ---p.70~73

"신발은 발하고 바닥이 닿는 접점이잖아. 난 그게
익숙해야만 낯선 곳을 밟을 수 있는 것 같아.
-은희경【중국식 룰렛】[대용품] (창비, 2016)
문장을 읽자마자 '신발'에 대한 신선한 카피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누구나 동의할 만한 말이면서도 그 안에
또 역설이 숨어 있다. '신발은 발하고 바닥이 닿는
접점이란 부분을 보자. 알고는 있지만 작가처럼 표현하진
못했다. 이럴 때 우린 소설가의 표현력을 빌려 쓰는
것이다. -중략-

좋은 문장을 읽으면 당연히 어딘가 써먹고 싶은 게
읽는 사람의 본능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만나면 우린
밑줄을 긋고 사진을 찍어 SNS로 공유하는 것이다.
제품을 새롭다, 신선하다, 놀랍다, 라는 말로만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뿐더러 일단 재미가 없다.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보자. 때로는 없는 이유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카피라이터의 역할이다.
바닥과 발이 닿는 접점에 OOO
낯선 곳을 밟을 땐 내 발에 익숙한 OOO을 신는다
---p.89~90
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탓에
저자가 소개한 50권의 책 중에서
읽은 책은 다섯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나마도 이런 문장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소설의 구도니, 주제니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접근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과 감상으로 소개하기 때문에
소설들은 훨씬 가버운 마음으로 접하게 해준다.
소개된 소설의 상당수를
실제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도 먹게 한다.
소설 속에서 어떻게 카피를 건져 올리는 지
저자는 방법을 열심히 소개해주고 있는데
엉뚱하게도 소설의 내용이 꽂히고 만 것이다.
그럼 어떤가.
내가 카피를 쓸 일이 얼마나 된다고.
기껏해야 글을 쓰고 제목을 뽑는 정도나 될까.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저자의 소설 문장 수집하는 일을 감탄을 하면서 봤다.
흔히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인상깊은 문장도 문장이지만
정보책 등에서 직접 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기능적인 목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설의 문장을 그것도 카피에 응용하기 위해
필사한다는 것이 놀랍고 신선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컴퓨터를 막 시작하면서
타자 연습을 할 때 이용했던 글이
'한겨레신문 신춘문학상'에 당선된 글들이었다.
단편이었기에 양이 많지 않았고
그냥 앉아서 읽는 것보다는 타자 연습을 하면서
읽으면 집중도 잘 되고
문장 하나하나의 느낌을 맛볼 수 있어서
종종 이용하곤 했었다.
그때는 요즘같은 필사의 개념도 없었을 때였는데
필사를 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겠구나 생각했었다.
뭔가 그냥 흘러가는 감정들을
꼭꼭 잡아주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소설과 함께 필사도 멀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습관을 꾸준히 유지했으면
지금쯤은 멋진 글 하나 쯤은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시덥찮은 생각도 해본다.
주위에 책이 없으면 불안할 정도로 독서광인
저자는 이렇게 꾸준히 문장을 수집하면서
일에서도 결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뭐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발췌를 해도, 필사를 하더라도
이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물론 감각적인 글을 쓰거나 톡톡 튀는 글을 쓰는 것은
수많은 책들을 읽고 적는 것만으로는 어려울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타고난 재능도 필요하리라.
그럼에도 고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카피는
감각을 키우고 공식이나 규칙을 발견하면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글 속에서 퍼올린 수많은 재료들을
어떻게 버무리고 요리할 수 있는지
그 요리하는 방법에 대해
책의 마지막 장에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책을 뒤집어 뒷페이지부터 읽을 수 있게 구성해서
필요할 때마다 참고해보기 쉽게 해주고 있다.

저자가 다니는 회사의 입점한 물건이
5만 종류 정도 된다고 하니
카피를 기계적으로 뽑아낼 때도 있고
지치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생생한 비법은 조금이라도 더 제품을 돋보이게 하고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물일 것이다.
카피를 처음 접하는 입문자나 초보자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책을 읽을 때 특히 소설을 읽을 때는
빨리 끝내야 하는 숙제처럼
스토리를 좇아 휙휙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아주 귀찮지 않다면 나도 이제
문장을 수집해가며 필사를 해가며 읽어야겠다.
책을 읽으며 빨리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웬만한 자기계발서보다
더 내 마음을,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도 유쾌하고 부드럽고
아주 감동적인 방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