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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뜬 거울
최학 지음 / 문예사조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독서를 할 때 편식을 하는 편이었다.
한동안 로빈쿡의 의학소설에 미쳐 있다가, 추리소설에 푹 빠졌다. 한 장르의 소설만을 독식하다보니 금방 지루해졌고, 나의 관심은 에세이로 이동했다. 연예인들이나 남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드라마 같은 인생 역경이 가득한 이야기들은 소설과는 남 다른 매력으로 날 매료했다. 그러나 그것도 풋사랑처럼 지나가고 다시 나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서점을 돌아다녔다. 그때 나의 시선을 잡은 것은 바로 시였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 내게 시라는 것은 그렇게 찾아왔고, 한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바쁜 일상에 쫓겨 책과 거리를 두었다가 다시 책을 읽게 되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책을 접하다보니 시는 잠깐잠깐, 틈나는 대로, 자투리 시간에 읽게 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갔다. 작가가, 시인이 아이를 낳듯 정성들여 쓴 작품들이기에 이런 대접을 받게 하는 것이 죄스러워 한동안 시집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만남…이별…만남…그리고 이별…다시 만남.
이렇게 멀고 먼 여정을 통해 다시 시의 세계로 초대한 시집은 최 학님의 바다에 뜬 거울이다. 작가님의 친필 사인과 더불어 정성들여 쓴 시 한 수 한 수는 머언 길을 돌아서 온 님을 기다리는 여인네처럼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잠깐이 아닌, 자투리 시간이 아닌, 오로지 시를 읽기 위해 원두커피를 내리고, 실내공기를 환기시키고,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평소가 쓰지 않는 어휘들, 생소한 어휘들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다시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경기가 안 좋은 요즘, 공연이나 문학이나 가벼움이 판을 치게 된다. 어려운 세상, 공연을 보면서라도, 문학을 대하면서라도 어려운 것을 대하기는 싫은 사람들의 심리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르를 불문하고 가벼움이 대세인 것처럼 세상은 가볍게 돌아가고 있다. 시라고 별 수 있을까? 가벼움과 흥미, 사랑과 이별 타령이 난무하는 시들은 한 번은 읽고 감동할지 모르지만 두 권이 되고, 세 권이 되면 금세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최 학님의 시들은 마치 태고적을 기억하듯,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나던 그 시절을 그리듯 나의 감성의 밑바닥을 돌아보게 했다.
요요함, 심상에 일으킨 파문, 피안의 목마름, 하얀 뼈가 되도록 기다리는 마음.
망부석은 기다림의 상징으로 이미 많이 쓰여진 소재이지만 최 학님만의 어휘로 다시 태어났다. 꽃 향으로 피어나리(P24)는 망부석과 또 다른 사랑을 말한다.
이 시집은 십 대의 상큼함도 젊은 이삼십 대의 열정이 없다. 그렇다고 인생을 다 산 사람의 인생철학도 없다. 인간이란 종족이 지구에서 태어나 처음부터 가졌던 본성의 밑바닥에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가득할 뿐이다.
작가의 시선으로, 시인의 손으로 쓰여진 시들은 옛 선조들의 시를 읽는 듯, 우리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달빛보다 맑은 얼로 천년을 산다(P80 ‘나’ 중에서)는 시인의 말처럼, 시인의 시들은 내 가슴 속에 달빛보다 맑은 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