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연인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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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시()

이광호 장소의 연인들을 읽고

 

이별 후, 유독 장소와 추억을 연결하여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 가면, 혹은 저곳에 가면 그때 함께 했던 일이 떠올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이렇듯 사랑을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구도 장소의 퇴색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인들에게 장소란 무엇일까? 같은 대상 같은 공간임에도 시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같은 공간에 다른 대상과의 경험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한다. ‘장소공간은 다르다. 추상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에 개인 주체의 체험과 실존의 관계가 개입되면 장소가 될 수 있다. 즉 도시에는 수많은 물리적 공간이 있지만, 연인과 함께 그 공간에서의 고유한 시간이 경험되었을 때 그것은 연인들의 장소가 될 수 있다. ‘함께 있음을 행하는 것이다.

 

장소의 연인들은 연인들의 시간이 장소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책 표지 뒷면에도 쓰여있다시피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라는 문장에 사물을 둘러싼 촉각의 세계와 피부의 시간을 채워 넣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카페, 서점에서부터 각각의 몸,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 낮과 밤의 벤치, 국경과 테라스 등 정지해 있는 장소는 물론 계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장소들 전부를 담고 있다.

 

계절은 장소에 특정한 시간의 이름을 덧씌운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언제나 그 계절 속에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구체적인 계절의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시간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을 늦출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어떻게 발설되고 잊히는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p.111~112)

 

이 책의 재밌는 요소는, 장소별로 그 장소가 나오는 소설에 대한 짤막한 줄거리를 소개한다는 점이다. 보통 소설을 읽게 되면 화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 마련인데, 줄거리를 소개할 때 장소의 역할과 효과를 제시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그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더불어 픽션 에세이라고 일컫는, ‘가 어떤 장소와 관련된 짧은 글을 통해 그 장소가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되고 읽히는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나아가 나에게 그 장소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소 중 유난히 <우산 아래의 벤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연인들의 벤치는 연인들을 에 앉게 만든다. ‘의 세계는 시선의 대상이 되는 곳이지만 의 세계는 몸을 나란하게 위치시킨다. ‘의 세계란 건 나와 그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세계다. 나란히 앉아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세계다. 비가 오는 저녁, 한 우산을 함께 쓰고 우리만의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우산 아래의 벤치가 좋다. 가끔은 우산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보면서 잠시 세계의 바깥을 가늠해보다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마저도 우산 아래의 벤치가 만들어내는 의미가 된다.

 

연인들의 장소의 필연적인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중략) 사라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장소는 고유하다. (p.170)

 

우연한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것은 연인들이 사랑을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다. 하지만 장소는 절대적이지 않다. 장소는 사라져야만 한다. 사랑이 그 장소에 존재했음을 확인하는 작업을 수없이 거쳐도, 처음 부여되었던 그 장소의 의미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 발명하고 발명하고 다시 발명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연인들의 이 발명하는 행위는 무수한 사랑의 증거로서 끝내지 않을 기나긴 여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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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들
신주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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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풍경, 천 개의 눈
-신주희 소설집 『허들』을 읽고-

 


  나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그것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먼발치 비껴나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어떤 장치를 썼는지 만든 사람이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 만들었는지 생각해보는 습관이다. 그렇다고 이 작업이 내가 감상을 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아니다. 나는 그들이 만든 세계를 사랑했고, 그 세계를 더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신주희 소설집 『허들』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러한 시도를 하려다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소설집이다. 다른 책을 읽을 때처럼 나는 첫 단편인 「햄의 기원」부터 해체를 시작했지만, 이는 다음 단편을 거듭할수록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신주희의 소설에는 이미 시선이 있다.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시선. 이면을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그 신비로움이 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허들』은 운동 방향이 수직과 수평으로 다른 두 점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분법적으로 놓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들에 대해 다루었는데, 이 7개의 단편에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햄의 기원」에서 햄은 극한의 예술 작업을 해왔다. 부모님의 알몸이 나오는 영상을 찍어 졸업작품으로 제출하거나 말의 혈청을 수혈 받아 영상으로 기록한다. 「저마다의 신」에서 지영은 사이비 종교의 예배를 다니고, 직장동료를 포교한다. 「허들」 속 주인공은 유서를 쓰는 버릇이 있다. 「휘발, 공원」의 블리는 1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다. 매일 남자가 바뀌는데 이번 남자는 기러기아빠라는 소문이 돌며, 「잘 자 아가, 나무 꼭대기에서」의 윤희는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만 임신에 위험한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다. 「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에서 탈북민 영도는 생동성 실험에서 만난 청년과 다투며, 「로즈 쿼츠」의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을 너무나도 싫어했으나 본인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혼을 한다.

  저 마다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다. 저 사람은 왜, 저 사람은 왜.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독자 자신의 삶에 빗대어 공감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그저 말할 뿐이다. 그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사는 삶을 표면적인 것에서 아주 조금, 한층 얇게 벗겨내어 보여줄 뿐이다.

  「햄의 기원」에서 주인공은 “햄이 한 가장 잘못된 선택”은 “우리가 숭배하던 것, 그 예술이 주는 멸시와 모욕을 끝까지 견딘 것”이라고 했다. 햄은 폐원된 동물원을 떠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예술은 곧 햄의 삶이었다. 책을 읽는 독자의 시선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만 같다.

  「저 마다의 신」에서 지영도 마찬가지다. 여진 언니와의 관계를 놓지 않기 위해서 사이비란 사실을 알면서도 예배를 다녔다. 지영은 타인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SNS에서 받는 ‘좋아요’에 위로를 받는 사람. 언니와의 우정을 놓지 않기 위해 포교를 하고, 언니가 말하는 우연과 필연을 의심하면서도 곧이곧대로 모르는 척 받아들이는 그녀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은 「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영도는 남한을 가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거란 생각으로 북한을 떠나 정착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북한 사람들보다 남한의 사람들이 “쉽게 지치고 아프다고 하”는 건지. 어째서 자신보다 강인하다고 생각해왔던 기은이 자신이 갖고 있던 쥐약을 훔쳐 자살한 건지. 어째서, 자신은 동정 받아야 마땅하고 밥도 굶으며 힘겹게 살았던 사람으로 치부되는 건지. 그러면서도 “탈북자 새끼들이 너무 많다”며 일자리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인지. 영도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무수히 겪으며 ‘같은 방식으로’ 남한에 오려는 한 소녀를 도와주려다 포기해버리고 무리에 섞여 살아간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자 했을 뿐이다. 평범한 삶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평범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해답이 없다는 것은 그들도, 이 소설을 읽는 우리도 안다.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평범’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평범함을 누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요. 언니와 나의 세계에서 안전이란 언제나 나쁘지 않은 것과 괜찮은 것 사이의 선택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쁜 것을 버텨서 최후에는 평범한 상태가 되는 것이요.
_「허들」 부분.

  안전한 선택. 이혼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가정을 꾸린다거나, 배우자가 원하는 아이를 갖는 것.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로서 남을 헐뜯거나, 어머니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착한 딸이 되는 것. 한 때 자신의 꿈이었던 그림을 생계로 관두는 것, 온전한 나로 살아보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것.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행동들은 결국 삶을 견디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의 삶을 견디기 위한 방법이 그것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단지 나의 삶과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나의 삶과 멀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조금의 무관심을 보인다. 세계는 그렇게 완성된다. 나의 삶과, 내 것이 아닌 삶으로.

  아프기 전에 조심했어야 했다고. 예방이 안 됐다면 참아야 했고, 참지 못할 거라면 애초에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세상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_「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 부분.

  자신을 견디기 버거워져서 삶의 허들을 넘어설 수 없을 만큼 납작해지고, 자신이 가졌던 수많은 가능성을 내면의 눈으로 돌려버린 채 고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미가 없다 생각하며 외면한다 여기지만 사실은 필사적으로 의미를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고 다 포기하고 싶지만 사실 울타리를 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유서의 마지막 문장과 마침표가 아니고, 그 유서가 끝이 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허들』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도 끝내 살고자 하는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풍경이, 결국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세계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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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의 사랑 문지 스펙트럼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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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랑의 단편
-뱅자맹 콩스탕, 『아돌프의 사랑』을 읽고-


1.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아마 『아돌프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보고 흔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모두가 떠올릴 법한 그런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그 속에 담긴 감정선의 파고는 결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오로지 두 주인공을 위해서만 전개되며 그들이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뱅자맹 콩스탕은 소설의 서두에 두 주인공이 현재 처해 있는 환경과 성격, 유년 시절을 거쳐 굳어온 신념을 말해주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그들 인생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2.
편지와 수기 형식으로 작성된 이 소설은 아돌프의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의연하게, 그리고 관대히 대해왔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를 사랑했지만, 자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신랄한 관찰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아버지에게서 아돌프는 고통감을 느꼈다. 유년의 환경은 그가 훗날 엘레노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절대 끝나지 않는 고뇌를 초래했다.

//
나는 혼자가 되었을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런 수줍고 소심한 성격은 줄곧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아무 하잘것없는 것인데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에 처하게 되면, 사람 얼굴 보는 것이 거북해서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려고 사람을 피하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겐,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심한 이기주의 같은 것은 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문제에 골몰해 있었지만 막상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떤 감정의 욕구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대개의 경우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호기심을 끌었던 대상으로부터 차례로 떨어져 나가곤 했다.(p.18~19)
//

특히 아버지가 그에게 제일 영향력을 끼친 것은 여성에 대한 가치관이었다. ‘젊은이는 무분별한 짓을 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재산과 가문과 외적 조건 따위가 대등하지 못한 여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며, ‘여자란⎯결혼 문제가 뒤따르지 않는 한⎯손에 넣었다가 때가 되면 떨쳐버려도 아무 불편이 없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는 괴팅겐을 떠나 D시에서 머물게 된 아돌프는 그곳에서 P백작의 첩인 엘레노르를 만나게 되었다. 엘레노르를 처음 보았을 때 아돌프는 ‘그녀가 내보이는 교양이며 몸가짐, 그리고 그녀 성격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고상한 기품과 자존심, 이런 것들과 견주어볼 때 그녀는 전혀 걸맞지 않은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싫어했고 올바르지 못한 품행을 가진 여자들과 나란히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했기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녀는 헌신했고, 두 아이들을 엄정하게 키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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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해서 엘레노르는 자신의 운명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을 통하여 자신이 처해 있는 계급에 반항하고 있었던 것이다.(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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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르는 아주 젊지는 않았으나 미인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던 인물이었고, 아돌프는 때마침 사랑에 목마르고 허영심이 성공을 탐내고 있었기에 그녀를 ‘한번 정복해볼 만한 여자’로 여겼다. ‘더욱 성공하리라 확신하는 그 무경험의 자만심으로.’ 뜻을 이루고자 했으나, 도리어 제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소심증으로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P백작의 애정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엘레노르 자신도 알고 있었고, 점차 순수하게 불타오르는 아돌프의 정열적인 사랑에 그녀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3.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아돌프와 엘레노르에게 무조건적인 행복이 펼쳐지진 않았다. 나는 이토록 사람의 마음에 솔직한 소설을 처음 보았다. 둘은 사랑의 형태가 달랐다. 각자의 마음은 서로를 향해 있었으나 이는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서로를 가깝게 두기도, 떨어지지 못하게 두기도 했다. 참 잔인했다. 사랑은 정열을 띄다가도 순식간에 동정과 연민으로, 단단한 족쇄로 바뀌었다.

소설 전반에 걸쳐 엘레노르는 죽기 전까지 순수한 사랑을 그에게 쏟았다. 오직 그를 위해 행동하고, 이런 정열을 통해 그녀 자신의 영혼을 드높였다. 엘레노르는 아돌프와 함께하기 위해 자신이 수십 년간 쌓아 온 사회적 지위와 가족, 고향을 버렸고, 폴란드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죽기 직전, 자신이 한때 다투고 나서 쓴 분노가 가득한 편지마저도 보지 말라며 애원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그에게 느꼈으며,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왔다.

그러나 소설 군데군데 영원히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문장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돌프가 현재의 사랑에도 의심과 고뇌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레노르의 사랑이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사랑을 받으면 육체적 피로는 걷히고, 가슴에 발작처럼 솟아오르던 초조한 감정은 진정되곤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옭아매는 사랑은 그를 두렵게 했으며, 엘레노르가 고통을 받는 것 같으면 순종의 태도를 보였다.

대개 그렇듯 초반에 불타던 그의 정열은 해를 거듭할수록 식어 갔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한 게 아니라, 사랑을 성공하기 위해 사랑을 시작해서 그런 것일까?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아돌프의 성격은 끝까지 그를 쫓아다니며, 자신의 모순된 행동을 정당화하고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회피하기 일쑤였다. 소설은 잔인했다. 순수한 사랑만을 쏟는 엘레노르와 대비되게끔 사랑을 해야만 한다고 다짐하거나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그녀를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아돌프의 모습은 너무 적나라했다.

//
만약에 내가 엘레노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우리 두 사람에 대해 쏟아지는 세간의 평판을 유리한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실한 감정이란 대단한 힘을 갖는 것이어서, 그것이 입을 열기만 하면 오해라든가 부당한 인습 따위는 저절로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러나 나는 남에게 감사하고 남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p.74)
//

엘레노르가 죽을 때까지도 아돌프는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행복하게 하고자, 그녀와 조금 더 같이 있고자. 이런 (정당화 한) 마음으로 고뇌한 결과는 더욱 처절한 불행이었다.

4.
도대체 사랑이 무엇일까? 고민은 끝이 없고, 때문에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랑이 존재할까? 소설에서는 아돌프와 엘레노르의 사랑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둘 이외에도 다른 형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먼저,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아돌프의 아버지는 다정하게 대하다가도 냉혹하게 돌변해버리며, 여자에 대해 부도덕한 견해를 갖게 한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아돌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면모를 보이고, 내칠 것 같이 행동하다가도 그가 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자금을 대주고 T남작을 소개시켜준다.

엘레노르를 향한 P백작의 사랑도 볼 수 있다. 그도 나름대로의 애정을 쏟고 있었으며, 엘레노르의 헌신적 태도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녀의 인품에 존경심마저 품었다. 그녀에 대한 우월감 같은 것이 어려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마음을 엘레노르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분명 속으로 느껴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이 아니라고 섣불리 말할 순 없다.

이 둘의 사랑은 아돌프와 엘레노르의 사랑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분명 아니다. 각자의 사랑은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랑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다. 분명한 건, 사랑 자체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P백작의 사랑도 누구에게는 사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단 한순간도 아돌프처럼 행동하지 않았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어떠한 고뇌도 하지 않았나? 사람을 사랑하면서 상처준 적이 없었는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나? 결단코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주인공을 극명히 대비시키는 잔인함을 보여주기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이 마음은 어찌할 수 없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기에, 사랑은 필연적인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
이처럼 마음속에 숨겨진 고통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뒤따라 다니면서, 제아무리 강렬한 인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 마음 위에서 짓뭉개 버리거나, 그 인상을 표현하려는 우리의 언어를 얼어붙게 만들거나, 우리가 나타내려는 뜻을 입 안에서 전혀 엉뚱한 것으로 바꾸어버린다.(p.17)
//

5.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이 사랑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말미,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엘레노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아돌프는 유년 시절 보았던 노부인의 죽음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영혼의 위대함과 재능의 탁월함만 믿고 꿈을 펼치려다 몰락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외따로 들어앉아 자신의 재능만으로 만사를 헤아리던, 인생의 측면을 서로 나누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났던 그 노부인을 아돌프는 그 순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불행, 그리고 죽음에 대해 수없이 사색하면서도 죽음에 이르지 않고서야 절대로 알지 못하는 그 이후를. 이 모든 것은 인생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기에,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통 받을 아돌프의 마음을 나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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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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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내 손을 잡은 손이여, 내 삶을 빚기 위해 나 자신을 그처럼 필요로 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나는 이미 삶을 소유했을 텐데.
그러나 인간의 개념으로 보면 그것은 파괴일 것이다. 자신의 삶이 아닌, 삶 자체를 사는 것은 금지되었으므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바로 그때 사랑이 더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사랑하고 있을 당시의 나는 몰랐다. 우리가 경험하면서 멸시한 것은 사랑의 중립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우리는 막간이라고 불렀다. 막간의 시간은 어떠했는가?

도덕성. 다른 이와 관련된 도덕적 문제가 행동에, 행동하는 방식에 있다고, 그리고 자기 자신과 관련된 도덕적 문제가 느낌에, 느낌의 방식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정말로 너무 단순한 걸까? 해야 할 행동을 하고 느껴야 할 느낌을 갖는다면 나는 도덕적일까? 그러자 갑자기 도덕적 문제들이 숨막힐 뿐만이 아니라 한없이 유치하게 보였다. 그런 문제들은 덜 강제적이고 더 포괄적이어야만 우리가 거기 맞춰나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상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너무 사소하면서 동시에 도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달하면 그것은 사소해진다. 반면에 우리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므로, 결국 도달 불가능하다. "불쾌함은 불가피하지만, 불쾌함의 원인이 되는 자에게는 화가 있도다." 이 말은 신약에 나오던가? 해답은 비밀이어야 할 것이다. 도덕의 윤리는 그것을 비밀로 간직하라고 말한다. 자유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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