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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들
신주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풍경, 천 개의 눈
-신주희 소설집 『허들』을 읽고-

나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그것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먼발치 비껴나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어떤 장치를 썼는지 만든 사람이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 만들었는지 생각해보는 습관이다. 그렇다고 이 작업이 내가 감상을 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아니다. 나는 그들이 만든 세계를 사랑했고, 그 세계를 더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신주희 소설집 『허들』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러한 시도를 하려다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소설집이다. 다른 책을 읽을 때처럼 나는 첫 단편인 「햄의 기원」부터 해체를 시작했지만, 이는 다음 단편을 거듭할수록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신주희의 소설에는 이미 시선이 있다.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시선. 이면을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그 신비로움이 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허들』은 운동 방향이 수직과 수평으로 다른 두 점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분법적으로 놓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들에 대해 다루었는데, 이 7개의 단편에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햄의 기원」에서 햄은 극한의 예술 작업을 해왔다. 부모님의 알몸이 나오는 영상을 찍어 졸업작품으로 제출하거나 말의 혈청을 수혈 받아 영상으로 기록한다. 「저마다의 신」에서 지영은 사이비 종교의 예배를 다니고, 직장동료를 포교한다. 「허들」 속 주인공은 유서를 쓰는 버릇이 있다. 「휘발, 공원」의 블리는 1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다. 매일 남자가 바뀌는데 이번 남자는 기러기아빠라는 소문이 돌며, 「잘 자 아가, 나무 꼭대기에서」의 윤희는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만 임신에 위험한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다. 「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에서 탈북민 영도는 생동성 실험에서 만난 청년과 다투며, 「로즈 쿼츠」의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을 너무나도 싫어했으나 본인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혼을 한다.
저 마다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다. 저 사람은 왜, 저 사람은 왜.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독자 자신의 삶에 빗대어 공감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그저 말할 뿐이다. 그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사는 삶을 표면적인 것에서 아주 조금, 한층 얇게 벗겨내어 보여줄 뿐이다.
「햄의 기원」에서 주인공은 “햄이 한 가장 잘못된 선택”은 “우리가 숭배하던 것, 그 예술이 주는 멸시와 모욕을 끝까지 견딘 것”이라고 했다. 햄은 폐원된 동물원을 떠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예술은 곧 햄의 삶이었다. 책을 읽는 독자의 시선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만 같다.
「저 마다의 신」에서 지영도 마찬가지다. 여진 언니와의 관계를 놓지 않기 위해서 사이비란 사실을 알면서도 예배를 다녔다. 지영은 타인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SNS에서 받는 ‘좋아요’에 위로를 받는 사람. 언니와의 우정을 놓지 않기 위해 포교를 하고, 언니가 말하는 우연과 필연을 의심하면서도 곧이곧대로 모르는 척 받아들이는 그녀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은 「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영도는 남한을 가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거란 생각으로 북한을 떠나 정착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북한 사람들보다 남한의 사람들이 “쉽게 지치고 아프다고 하”는 건지. 어째서 자신보다 강인하다고 생각해왔던 기은이 자신이 갖고 있던 쥐약을 훔쳐 자살한 건지. 어째서, 자신은 동정 받아야 마땅하고 밥도 굶으며 힘겹게 살았던 사람으로 치부되는 건지. 그러면서도 “탈북자 새끼들이 너무 많다”며 일자리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인지. 영도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무수히 겪으며 ‘같은 방식으로’ 남한에 오려는 한 소녀를 도와주려다 포기해버리고 무리에 섞여 살아간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자 했을 뿐이다. 평범한 삶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평범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해답이 없다는 것은 그들도, 이 소설을 읽는 우리도 안다.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평범’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평범함을 누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요. 언니와 나의 세계에서 안전이란 언제나 나쁘지 않은 것과 괜찮은 것 사이의 선택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쁜 것을 버텨서 최후에는 평범한 상태가 되는 것이요.
_「허들」 부분.
안전한 선택. 이혼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가정을 꾸린다거나, 배우자가 원하는 아이를 갖는 것.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로서 남을 헐뜯거나, 어머니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착한 딸이 되는 것. 한 때 자신의 꿈이었던 그림을 생계로 관두는 것, 온전한 나로 살아보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것.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행동들은 결국 삶을 견디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의 삶을 견디기 위한 방법이 그것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단지 나의 삶과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나의 삶과 멀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조금의 무관심을 보인다. 세계는 그렇게 완성된다. 나의 삶과, 내 것이 아닌 삶으로.
아프기 전에 조심했어야 했다고. 예방이 안 됐다면 참아야 했고, 참지 못할 거라면 애초에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세상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_「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 부분.
자신을 견디기 버거워져서 삶의 허들을 넘어설 수 없을 만큼 납작해지고, 자신이 가졌던 수많은 가능성을 내면의 눈으로 돌려버린 채 고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미가 없다 생각하며 외면한다 여기지만 사실은 필사적으로 의미를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고 다 포기하고 싶지만 사실 울타리를 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유서의 마지막 문장과 마침표가 아니고, 그 유서가 끝이 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허들』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도 끝내 살고자 하는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풍경이, 결국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세계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