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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연인들 ㅣ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장소의 시(時)
⎯이광호 『장소의 연인들』을 읽고⎯
이별 후, 유독 장소와 추억을 연결하여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 가면, 혹은 저곳에 가면 그때 함께 했던 일이 떠올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이렇듯 사랑을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구도 장소의 퇴색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인들에게 장소란 무엇일까? 같은 대상 같은 공간임에도 시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같은 공간에 다른 대상과의 경험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한다. ‘장소’와 ‘공간’은 다르다. 추상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에 개인 주체의 체험과 실존의 관계가 개입되면 ‘장소’가 될 수 있다. 즉 도시에는 수많은 물리적 공간이 있지만, 연인과 함께 그 공간에서의 고유한 시간이 경험되었을 때 그것은 연인들의 장소가 될 수 있다. ‘함께 있음’을 행하는 것이다.
『장소의 연인들』은 연인들의 시간이 장소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책 표지 뒷면에도 쓰여있다시피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라는 문장에 사물을 둘러싼 촉각의 세계와 피부의 시간을 채워 넣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카페, 서점에서부터 각각의 몸,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 낮과 밤의 벤치, 국경과 테라스 등 정지해 있는 장소는 물론 계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장소들 전부를 담고 있다.
계절은 장소에 특정한 시간의 이름을 덧씌운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언제나 그 계절 속에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구체적인 계절의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시간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을 늦출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어떻게 발설되고 잊히는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p.111~112)
이 책의 재밌는 요소는, 장소별로 그 장소가 나오는 소설에 대한 짤막한 줄거리를 소개한다는 점이다. 보통 소설을 읽게 되면 화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 마련인데, 줄거리를 소개할 때 장소의 역할과 효과를 제시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그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더불어 픽션 에세이라고 일컫는, ‘나’와 ‘그’가 어떤 장소와 관련된 짧은 글을 통해 그 장소가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되고 읽히는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나아가 나에게 그 장소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소 중 유난히 <우산 아래의 벤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연인들의 벤치는 연인들을 ‘옆’에 앉게 만든다. ‘앞’의 세계는 시선의 대상이 되는 곳이지만 ‘옆’의 세계는 몸을 나란하게 위치시킨다. ‘옆’의 세계란 건 나와 그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세계다. 나란히 앉아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세계다. 비가 오는 저녁, 한 우산을 함께 쓰고 우리만의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우산 아래의 벤치가 좋다. 가끔은 우산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보면서 잠시 세계의 바깥을 가늠해보다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마저도 우산 아래의 벤치가 만들어내는 의미가 된다.
연인들의 장소의 필연적인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중략) 사라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장소는 고유하다. (p.170)
우연한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것은 연인들이 사랑을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다. 하지만 장소는 절대적이지 않다. 장소는 사라져야만 한다. 사랑이 그 장소에 존재했음을 확인하는 작업을 수없이 거쳐도, 처음 부여되었던 그 장소의 의미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 발명하고 발명하고 다시 발명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연인들의 이 발명하는 행위는 무수한 사랑의 증거로서 끝내지 않을 기나긴 여행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