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서, 성령이여 - 내면의 불, 생명의 수여자,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는 이
레오나르도 보프 지음, 이정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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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령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의식을 가지고 기껏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시공 안팎을 움직이는 영을 감히 설명할 수 없으리라. 설명할 수는 없고 우리는 다만 이해할 수 있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평화 노래꾼 홍순관의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가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 세월의 무게 … 별빛의 무게 … 생명의 무게 … 온 우주의 무게”  이런 내용이다. 다른 곳에서 이 ‘무게’가 어떤 의미냐는 물음에 홍순관은 “손을 펴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지. 내 손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니까. 이 바람은 어디에나 있거든, 이 무게를 이야기하는 거지. 내가 손을 펴면 온 우주가 다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 하나의 무게가 모든 무게인 겁니다.”  고 했다. 바람(영)이 시간과 별빛과 생명을 있게 하고 온 우주의 무게라는 얘기다. 하나의 생명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다. 이것을 보프는 3장에서 도덕경 4장의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도충이용지 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으로 설명했다. “도는 비어 있음으로 작용하여 언제나 차지 않는다. 그 깊음이여, 만물의 근원같구나.”는 뜻이다. 

서문에서 보프는 서구 전통 신학 담론으로는 성령에 대한 사유에 한계가 있음을 토로하고 현대 우주론과 맥을 같이 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화석화되어 가는 종교들과 근대 이성의 비합리성, 여성성의 배제됨, 그리고, 성직 위계질서와 권력 구조에서는 성령의 작동이 불가능함을 지적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흐르지 않은 강물이고 모든 문이 닫혀 있는 집과 같기에 그렇다.


1.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영역과 깊이가 방대하지만 나름 적절한 정리라고 본다. 여기서 영은 이성과 반대되지 않고 영이 이성을 넘어서 명상과 생명과 역사에 대한 더욱 고차원적 인식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이다. 자연의 힘과 생명은 영을 담지한 실재들이며 그 중 인간은 영을 담은 존재로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p70) 그리고, 하느님을 “항상 관계 속에서 생명, 사랑, 무조건적인 자기수요의 존재”이며, “항상 계시되어지고 있다”(p77)고 하는데 이 부분은 과정신학의 이해와 유사해 보인다. 

루아흐, 프뉴마, 스피리투스Spriritus(바람, 숨, 생명, 운동), 악쎄Axe(보편적 우주 에너지)로 표현된 영은 ‘모든 것은 에너지’라는 현대 우주론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 “우주는 사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심오하고 미묘한 어떤 것으로부터 출현하는 진동에너지의 네트워크로 만들어졌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설명과 현대 과학자들이 선호하는 “가득찬 공허 혹은 모든 존재의 시원적 근원”이란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일까 다석 류영모는 하나님을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했다. 

보프에 의하면 신약성서의 영은 유일신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을 부르는 방식으로, 정적 실체적 개념들이 아니라 과정의 관점, 삶의 방식의 관점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하느님은 단일한 본성의 고독 속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교제로서 사유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p123) 이 부분의 이해에 동의한다. 이것은 디지털 방식이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이어서 좋다.

: 사회학에서는 우리 사회를 파편화시대로 보는데, 이와 같은 성령에 대한 이해를 사회 문제에도 적용해 가야 하지 않을까? 


2. 

우주생성의 원리, 복잡성(분화)와 내면성(주체성)과 내적 관계(교제) 라는 세 가지 특성(p191)은 매우 유익한 이해다. 그래서 창조는 지금도 진행중이고 살아 있는 지구(가이아)는 영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 양자 물리학은 “모든 것은 모든 것과,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순간에 관계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하느님이 관계적 실재라고 보고 만물은 하느님-삼위일체-관계성-교제의 이미지로 창조되었다고 본다.(p195). 아메리카 인디언 다코타족은 인사할 때 “모타쿠예 이야신”라고 한다. “당신과 나는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우분트Ubuntu’라는 말이 있는데,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이다. 모두 ‘연결’의 의미다. 놀랍다. 두 표현은 우주적 의미를 담고 있다. 

몰트만의 설명을 소개하는데 “하늘과 땅의 창조주인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 속에, 우주적 영을 통해 일체 피조물과 교제하는 가운데 현존한다. 하느님의 현존은 전 우주를 관통하고 있다. 하느님은 단순히 세상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영인 것이다. …”(p197) 만물이 단절된 상태가 아니라 영에 의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우주생성 과정의 한 특징이 모든 복잡성, 다양성 그리고 모든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인 것을 기억하라”고 한다.(p198) 이렇게 보프는 우주가 영이 머무는 성전으로서의 영역으로 이해한다. 

: 당연 그래야만 하는데 실제로는 인간이 타자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 거창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고 타자를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교회는 너무 위만 바라보게 한 듯하다. 아래와 옆도 바라보고 자기 안도 들여다 보면서 타자를 인식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3. 

김흥호는 성령을 ‘발효醱酵’로 설명했다. 발효는 공기 어디에나 있는 누룩으로 가능하다. 포도 알에 이미 그 누룩이 묻어 있듯이 성령은 어디나 있어 누구에게나 작용한다는 것이다.  보프는 영을 ‘모든 것에 영감을 일으키며 쏟아 붓는 에너지’로 말하면서 영의 세 측면을 설명한다. 단일하고 거대한 진화과정의 복잡성, 영의 활동을 분별하도록 돕는 상호연결성, 그리고, 팽창을 지속하게 하는 능력인 아우토포에시스autopoesis다.(p227-8) 이 영은 생명의 영이고 자유와 해방의 영이며 사랑의 영이다. 

생명, 자유, 해방, 사랑…, 익숙한 용어들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이 익숙한 용어들을 아주 낯설게 만들어 놓았다. 이 용어들의 개념, 이 개념을 이해하고 품고 지내야 하는 존재들이 그것을 낯설어 하면 성령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겠다. 물론, 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춤 없이 모든 곳에 스며들 것이다. 보프는 ‘사랑은 우주적이며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했다(p241). 사랑은 언어로서 소통의 수단이다. 성령은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고 본다. 어디서부터 가능할까? 그 이해와 앎의 시작은 여기 사랑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해방과 자유, 생명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너무 상투적이고 일반적 결론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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