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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 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p.34
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이직한 회사는 경영 악화로 1년을 겨우 넘기고 폐업을 한다.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구직활동을 하면서 취준생대신 백수라고 불린,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한 ‘나’는 약국의 전산원으로 취업을 한다. 면접을 보던 날 김약사에게 들었던 말은 무슨 뜻인지 애매했다.
“유령이 또 왔네.”
유령? 생의 한 자리를 박탈당한 자라는 뜻일까, 이 세상에서 명확한 위치를 잡지 못한 자란 뜻일까, 아니면 정말 말 그대로 유령이란 뜻일까?
처방전을 입력하고, 약 이름을 외우고, 조제를 돕는 날들이 이어진다. 성장을 기대받지 않는,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일을 이어가면서 ‘나’는 또다른 유령인 조부장에게 일을 배우며 일상을 이어간다. 그곳에서 마주치는 약국 손님들의 일상도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도 0으로 자리잡은 단면들은 존재한다. 나와 당신의 삶에도 명확하지 않은 어렴풋한 상황은 늘 존재하니까..
0은 신비한 숫자이다. 아무 것도 없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시작점과 기준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0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가 상당히 중요하다.
0이 1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수 많은 숫자들, 그리고 그 과정들. 그 고단함과 노곤함 그렇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많은 가능성들을 우린 곧잘 잊어버린다.
수많은 시간 0의 자리에 있었고, 여전히 난 0의 자리에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1로 존재할 것이다. 많은 시간동안 1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1이 아닌 0이어도 괜찮다는 것을,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세계는 수많은 0들이 짜놓은 촘촘한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p.12
최저임금으로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아직 서른이라고 해도 살아내는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끝자락이다. 상상력이 고갈되었는지 막다른 길 너머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넓은 해협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 들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p.92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p.146
📮 해당 리뷰는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