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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게서 답을 찾다 - 환경파괴와 빈부격차, 전쟁과 기근에 빠진 세계
브라이언 맥클라렌 지음, 김선일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마 선생님.

오랜만에 소식 전합니다. 지난 몇 개월은 너무 분주하고 바빠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큼직큼직한 일들이 주변에서 있었는데 마치 외계에서 살다온 것처럼 마음을 멀리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덕에 지난번에 보내주신 책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쳐버렸고요. <예수에게서 답을 찾다>라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책요.

이 책이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보는 브라이언의 책입니다. 첫 번째 책에서 워낙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 보내주신 책을 받으면서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 역시 기대 이상으로 우리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집어주더군요. 세상이 번영과 안전과 공정이라는 시스템의 결합에 의해서 돌아가는 곳이라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세상은 번영도 안전도 공정도 없는 자살기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강조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쟁과 기근, 빈부격차 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까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는 지구적인 차원의 모든 염려가 전부 그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인데,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돌리는 시스템이 실제로는 우리 모두를 죽이고 있다는 얘기로 이해했습니다.

저자는 생태적인 관점의 무지와 무책임을 가장 강조하는 것 같더군요.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마치 무한으로 공급되는 자원을 쓰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고, 자연환경이 쓰레기를 처리하는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마치 자연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가지는 이기심이 지속 가능한 세상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저자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현재 공멸로 치닫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합니다. 그래서 책의 원제목을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Everything must change)고 붙인 것 같고요.

저자는 세상이 이렇게 잘못된 방식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길게 설명하면서 <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틀>이라고 하는 게 뭘 말하는지 선뜻 그림이 안 그려졌는데 화란의 철학자 ‘카웃츠바르트’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그게 <세계관>을 의미하는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틀>이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보통 쓰는 표현처럼 <안경>이라고 했으면 더 잘 알아들었겠다 싶었습니다.

브라이언이 이 책에서 도전하는 것은 “지금 자살기계 같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왜 기독교는 항상 딴 세상 이야기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이유를 하나 집어주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해서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틀> 이야기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틀로 세상을 봐야 하는데 그 당시 로마 제국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틀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국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을 상세하게 비교해 주었습니다. 마 선생님께서 책을 추천하실 때는 저자의 관점이나 논조에 동의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브라이언의 지적 자체가 지나친 편견이고 오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그 범위와 정도가 특별히 물고 늘어져야 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자는 두 가지 틀을 그렇게 보여주고는 예수님의 틀로 세상을 보는 법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처음에 말했던 세 가지 시스템 말이지요. 그 안에서 예수님의 틀이 어떻게 대안적인 이야기를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 세상을 회복하고, 희망이 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저자가 <비밀 커리큘럼>이라는 용어를 썼는데요,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Hidden Curriculum을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봤습니다. 교육학에서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하는데 그 개념이 브라이언이 말하는 것과 딱 겹치기 때문입니다. 요지는 교사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학생이 배우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사가 가르치고자 의도하는 것보다 학생에게 훨씬 강력하게 흡수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학교가 정한 교육과정보다 이게 더 무섭습니다. 브라이언은 우리 사회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국의 시선을 배우게 되고 그것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로 바르게 서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도 이런 내재된 커리큘럼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예수님의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피조세계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준의 화목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 더 집중하지요? 이번에 읽은 책의 상당 부분이 평소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부분이어서 저야말로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읽은 브라이언의 첫 번째 책에서 경험했던 유익이 이번에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 몫 했을 것 같고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읽는 과정에서는 왜지 모르는 불편함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감정적으로 글을 쓴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작가의 심정을 이해하기는 합니다. 모던 시대의 기독교가 지나치게 사후 종착지에 대해서만 몰두하고 현세의 난무하는 문제들, 사회적인 불의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단정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인용문이기는 합니다만 저자는 이것을 “평생 교회 다니면서 딱 하나의 설교만 들었다”는 표현을 쓰더군요. ‘예수 믿고 죄를 용서받고 천국 간다’는 설교를 빗댄 말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전 생활방식에 갖다 붙인 신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는 저자의 신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응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달하는 방식이 굉장히 냉소적이었다는 점이 거슬렸습니다.

거기에다 성경을 지나치게 상징적으로 보는 관점과 “재림 같은 것은 없다”라고 단정해 버리는 태도나 신학적인 견해를 대할 때는 제 가슴을 한 대 얻어맞고 저만큼 튕겨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제가 이미 다른 쪽에 서기로 결정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점에서는 이번 책이 저를 완전히 설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의를 실천하고 사람과 사회를 회복시키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절대 공감합니다.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요. 물론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라시엘라와 그의 딸 레띠시아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졌던 경험은 아주 인상적인 사례였다고 생각하는데요... 공동체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우리에게도 그런 전략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선명하게 보이는 게 없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브라이언이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저에게는 여전히 이상만 펼쳐놓았다는 느낌이어서 아쉽기도 하고요.

그래도 기분 좋은 책읽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책을 통해서 ‘브라이언 맥클라렌’을 좀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하고 다른 생각이 어떤 건지도 발견했고요. 어떤 사람은 그 ‘다름’이 너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아직은 브라이언을 좋아합니다. 이후에도 그의 책을 좀 더 읽을 생각입니다. 좋은 책을 접하게 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P.S : 주석도 상당히 좋았어요. 그런데 이게 뒤에 붙어서 책읽기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좀 긴 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각주로 처리했으면 읽는 이에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훌륭한 주석이 어떤 장(章)에서는 상당히 누락되어 있더군요. 25장 같은 경우에요. 이런 건 출판사에 한 마디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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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대특종
닉 페이지 지음, 김성웅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아침 이른 시간. 출근하는 발걸음이 바쁘다. 그런데 그렇게 부지런을 떨고 고 나온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지하철 역 입구에서 ‘메트로’를 나눠준다. 일단 지하철을 타고 난 다음에는 우두거니 시간을 보내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나눠주는 무가지들이 고맙다. 시간 때울 수 있는 읽을거리라 고맙고, 공짜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어서 고맙고, 읽고 난 다음에는 바로 버릴 수 있어서 고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공짜니까 받고, 딱히 읽을 게 없으니까 받는 것이지... ‘메트로’에는 읽을거리가 진짜 없다. 그래서 나는 ‘메트로’ 같은 것은 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받지도 않는다.

“타블로이드 성경”이 나왔다고 했을 때 내가 순간적으로 받은 느낌은 그런 거였다. 내가 ‘메트로’를 무가치한 쓰레기로 여기고 무시하듯이 사람들이 성경을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하는 염려다.

이 책은 진짜 지하철 가판대에서 파는 주간지처럼 생겼다. 주간지가 원색적인 제목을 뽑아서 사람의 마음에 자극을 확 당기듯이 이 책도 어쩌면 그렇게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을 기사 제목으로 뽑았는지 모르겠다. 거기에다 기사마다 삽입된 흑백 사진들은 각각의 기사들을 더욱 그럴듯하게 주간지 기사로 만들었다. 페이지 사이에 드문드문 끼어있는 이벤트 공지와 광고 카피들, 심지어는 사설과 날씨 정보까지... 부피를 좀 더 얇게 하고, 기름 먹인 표지를 두르고, 심심풀이로 읽는 금주의 운세와 두 쪽짜리 만화까지 곁들였더라면 그야말로 꽤나 인기 있는 주간지가 될 뻔 했다. 남는 시간 죽이기 위해서 아무 때나 생각 없이 집어서 재미나게 읽을 수 있고, 다 읽고 나서는 어디에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은 그런 주간지...

그렇지만 이 타블로이드 성경이 그렇게 가볍기만 한 책은 아니다. 아이디어가 기발한 이 성경은 분명히 내용이 있는 잡지다. 먼저 신구약 성경 안에 있는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정말 심사숙고해서 기사를 추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요한 사건들을 잘도 골랐다. 그리고 수천 년이나 된 오래된 그 사건들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꾸며서 옷을 입혔다. 그 모양이 얼마나 이 시대에 적실한지 제목만 보고도 그림이 확 다가올 정도다. 이런 책이 아니었으면 내 머리만 가지고는 가인의 살인사건을 읽으면서 ‘전자 팔찌 채워진 가인’이라는 상상을 죽어도 그려낼 수 없었을 게다.

뿐만 아니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려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에 대한 평가표”나 선지자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한 “전국 선지자 달리기 대회”는 그 자체가 좋은 성경공부 참고서라고 할만하다. 왕들이나 선지자들이 워낙 많아서 그들의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어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데 저자가 그것을 쉽게 정리를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취급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정보전달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신문이나 잡지가 편집자의 관점을 담을 수밖에 없듯이 타블로이드 성경도 어느 정도는 저자의 관점이 덧붙여졌다. 그의 해석이 나에게 완벽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썩 나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가졌던 “타블로이드 판 신문과 같이 믿을 수 없는 가벼운 이야기”라는 감정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성경 이야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성경 이야기를 정보 차원에서는 알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서 모르거나,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52 가지의 크고 작은 이슈들을 다루면서 저자는 다양한 해석으로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성경과 교회를 보는 그의 대표적인 생각은 <부자들만 대접하는 교회> 기사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야고보서 2장에 있는 내용을 기사로 취급한 이 부분이 나에게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다른 기사들이 이야기(Story)를 출처로 하고 있는데 비해 이 기사는 편지를 통한 교훈에서 뽑은 기사거리이기 때문이다. 왜 굳이 이것만인지 궁금하지만 그것이 아마도 오늘의 교회를 보는 저자의 불편한 마음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비록 이 이야기를 낙서장에 갈겨 써놓은 우스개 소리처럼 취급하기는 했지만 오늘의 교회에서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신분에 합당하게 살지 않고 그것이 예수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지적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이 책을 재미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잠깐 동안은 성경 이야기를 코미디처럼 짜 맞췄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를 천년처럼 천년을 하루처럼 여기신다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됐다. 우리의 천년이 하나님의 하루라고 한다면... 하나님 편에서 이런 타블로이드 잡지 하나만 있으면 인류 역사를 어느 정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 속에 담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진지할까? 그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있을까? 성경에는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전혀 다른 웃음이 그 얼굴에 스치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님이 당신의 타블로이드 잡지에 내 스토리를 기사로 싣는다면 어떤 기사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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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하트 - Wild Heart
존 엘드리지 지음 / 포이에마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경험 1 :

몽골의 황량한 사막을 건너오면서 만난 남자가 있었다. 작은 지프에 물건을 잔뜩 싣고 러시아에서 울란바토르로 가는 그를 바얀얼기에서 만났다. 그렇게 만난 자동차 ‘다라까’(주인)는 바얀얼기에서 울란바토르까지 1,800km의 여행에서 나와 아내를 싼 값에 책임져주기로 했다. 짐짝처럼 자동차에 끼여서 길도 없이 삭막한 광야를 가는데 꼬박 5박6일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 다라까는 끊임없이 술을 마셔댔다. 울란바토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독하다고 소문난 러시아산 보드카 두 박스가 비워졌다. 그렇게 오던 여행 중간에 그가 나에게 보드카를 한 잔 권했다. “나는 술을 안 마신다”고 그랬더니 “남자가 술을 안마시고 어떻게 남자라고 할 수 있느냐?”고 했다. 순간 머릿속에 쑥 지나가는 질문 하나. 술만 잘 마시면 남잔가? 술하고 남자하고 무슨 상관이지?...

경험 2 :

우리는 남자를 어떤 모양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해져서 물었다. 어떤 이가 귀띔해주기를 우리나라는 남자의 남자 됨을 호탕함에서 찾는다고 그런다. “그럼 호탕함이 뭐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것은 호색과 방탕”이라고... 허허 웃음이 났다. 호탕함의 진정한 의미는 소심함의 반대쪽에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호색과 방탕도 그럴 듯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색을 밝히고 방탕하게 살았는가? 피는 못 속이는 건지 지금도 입만 벌리면 여성편력을 과시하는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내 기억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색시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경험 3 :

그런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옛날 어른들처럼 주색잡기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남자들도 많이 있고,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중요한 무엇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주방에서 아내의 일을 돕는 남자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쪽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것 자체에 원한을 품은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의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것이 순전히 사회화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키우기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라고... 만약에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나처럼 아무것도 모른 사람은 자식을 키우는데 보통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니다. 자칫 잘못해서 아이를 망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가능하면 주관적 편견으로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애초부터 장난감 같은 것은 백해무익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접촉을 금지시켰지만 성적인 견해가 덧입혀진 것들은 더더욱 멀리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커가면서 자기들이 남자인 것을 배워왔다. 폭력적인 성향을 배울까봐 일부러 보여주지도 않았던 무기류들을 좋아하고, 보자기 하나 어깨에 걸치고 소파 높은 곳에서 자유낙하를 연습하며 자기가 슈퍼맨임을 자랑했다. 아빠하고 나란히 서서 “누구 오줌발이 더 센가?” 내기하자고 달려들 때는 그런 모습을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식한 교육학자들이 내뱉은 씨도 안 먹히는 헛소리에 속은 것을 알았다. 우리 집 아이들은 처음부터 남자였던 것이다.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들의 남성성을 망치고 있다”고 하는 저자의 인용을 처음에 읽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몰라서 한참이나 생각해야 했지만 책읽기의 과정에서 줄곧 이 책은 내가 앞에서 말한 이야기들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상당한 왜곡들을 드러내고 그것이 어떻게 바로잡아져야 하는지를 자기 얘기를 섞어서 실감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와일드 하트』라고 하는 제목 속에 충분히 들어있다. 남자는 처음부터 남자로서의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거친 모험을 좋아하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 동안은 저자가 영화에서나 보는 거친 남자를 남자 됨의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 사람이 너무 나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고 글의 방향이 곧 하나님의 의도를 향하여 맞춰진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마음도 편해졌다.

저자도 책에서 줄곧 하는 얘기지만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남성을 배우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아버지 경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사회적 통계로도 나와 있다.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거의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자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는 심할 경우에 죽이고 싶다는 분노로 표현되기도 하고 그것이 때로는 아들의 인생을 비참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불쑥불쑥 아버지의 모습을 연출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를 통해서 남성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저자는 세상의 남자들이 두려움과 거짓에 갇혀 있다고 한다. 두려움이라고 함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회와 사람들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에서 출발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남자들은 거칠고 강한 척하면서 자기를 거짓으로 포장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통해서 남성을 배운다는 원리는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서 남자로 자라는 아들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다음 걸음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참 남자가 진정으로 싸워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싸움의 진짜 목표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남성성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처럼 진리(영화에서는 자유라는 최고 선)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와 내 아들들을 생각했다. 내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저자가 지적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오면서 두려움에 지배받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을 하든지 잘하지 못할까봐 걱정했고,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나의 본 모습을 들킬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거절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꽤나 걱정을 하면서 살았다.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굳이 대답을 찾자면... 그것은 기질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자라온 과정의 환경문제이기도 하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도 빼놓을 수 없는 큰 덩어리로 작용했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아버지가 되었다. 우리 아들들은 장차 어떤 모양으로 조각될까?

우리 아들들은 아직도 아빠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빠는 뭐든지 다 하고 뭐든지 다 아는 아빠로 여기는 아이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게 된 것이 있다면 나의 감정표현, 나의 말투 하나하나가 아이들을 만들어가는 정과 끌이라고 하는 사실이었다. 이 아이들을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남성으로 키우기 위해서 용기를 북돋우고, 함께 모험하며, 때로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담담함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삼스럽게 아버지로서 가져야하는 용기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용기를 남용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법을 연습시켜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조심해야 하는가도 생각하게 됐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표지가 너무 허름해서 웃음이 나왔다. 요즘에도 이렇게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나 싶어서... 하지만 표지의 허름함이 책의 내용을 허름하게 취급하게 하지는 못했다.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내가 서있는 자리를 여러 방향에서 생각하게 한 책읽기라고 여길 만큼 좋은 시간이었다. 특히 중간 중간에 삽입해 놓은 산(山) 사진은 또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행동할 것을 전하는... 나에게는 고든 맥도널드가 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이후로 만난 남자의 남자 됨을 묵상하기에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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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택한 길에서 뒤돌아보지 마라 - 자신의 재능을 사회적 약자에게 기부한 데이비드 부소 이야기
필리퍼 틴데일 지음, 오희천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난한 집>이라는 제목으로 작문 숙제를 내줬다. 부잣집 아이가 이렇게 썼다. “무척 가난한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얼마나 가난했는지 모두가 가난했습니다. 가정부도 가난하고, 집사도 가난하고, 정원사도 가난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어느 영어 참고서에서 읽은 이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자기 경험으로 만들어진 창틀로만 건너편을 본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사람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신15:11) 구약성경을 보면 인간의 가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꽤나 괜찮은 장치들을 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도 가난을 나라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을 비참하게 하고, 비굴하게도 만들고, 때로는 부도덕하게도 만드는 가난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게으름과 정신상태의 문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부조리한 사회의 잘못된 구조가 문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 전반의 의식 문제라고도 한다. 무엇이 진짜 문제일까? 사람마다 각자 자기가 가진 창틀로만 이 문제를 보려고 하기 때문에 이 질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더욱더 비참해져 간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래 동안 이 질문을 붙잡고 씨름하는 사이에 가난 자체를 붙잡고 씨름한 사람이 있다. 바로 ‘데이비드 부소’(David Bussau)라는 사람이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에 자기 인생의 거의 절반 이상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산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살아야한다고 하는 특별한 사명으로 시작했던 것도 아니다. 아주 우연히, 엄청난 폭풍이 지나간 도시의 폐허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자고 시작했던 일이었고, 자기가 사는 나라의 한쪽 구석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 나머지와 연결되었다. 표지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그의 이야기(The David Bussau Story)다.

부소는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한 점도 없었고 어머니도 그들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떠나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시27:10)에 큰 감동을 받았다. 어쩌면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옛날 고아원 생활이 다 그렇듯이 부소의 고아원 생활은 힘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온갖 일을 다 해봤고 그 과정에서 죽을 뻔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있고 나서 그는 새 부모님을 만났다. 부소라는 성(姓)은 그렇게 새 부모를 통해서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끝까지 좋을 수는 없어서 결국 데이비드는 부소 가문을 떠나게 된다.

부소의 행적을 생각하면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 그가 세상에 공헌할만한 어떤 배경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 학벌을 생각해도 고등학교 중퇴가 그의 학벌 전부다. 다만 그는 독립심이 있었고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면이다. 그래서 가게 하나를 내면 얼마 안돼서 그것을 몇 개로 확장하는 재주를 일찍부터 발휘했다. 이 재능이 나중에는 가난에 묻혀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여정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물질이든지 학벌이든지 부소가 가진 것은 없었지만 그는 바르게 사고할 줄 아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고아원 시절에도 그는 모든 일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부소에게 좋은 기술과 재능을 소유하게 했다. 그는 또 돈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돈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로 이 발견은 그로 하여금 저축하는 습관으로 움직이게 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서 그는 사람이 가진 소유욕이라고 하는 것이 끝이 없다는 것도 발견했다. 돈을 얼마나 벌어야 충분히 벌었다고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결국은 자유를 준다고 생각했던 재물이 사람을 포로로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묻기 시작했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재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에서 종교로써의 기독교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부소가 발견하고 실천한 삶의 방식은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가 예수님의 죽으신 목적(고후5:15)에 맞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의 인생 여정을 바울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바울이 사람을 복음으로 살리기 위해서 자기 인생 전체를 바쳤다면 부소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존엄하게 하기 위해서 인생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그가 직면해야 했던 위험을 보면 바울이 감당했던 위험(고후11:23-28)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가 만난 위험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그들의 사회적 존엄성을 높여줘야 한다는 그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의 소액 대출 사업이 빈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때 사람들이 그를 백자장자로 여겼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약한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든지 그들의 돈을 빌리는 사람들이든지 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고, 계발 사업에서 사람들을 지휘할 때도 먼저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가진 아이디어나 경험의 결과물들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나눴다. 자기를 챙기거나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살 생각은 조금도 없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은퇴할 때는 모두가 아쉬워한 사람이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일을 사람보다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의 관심은 항상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데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나이 어린 딸이 미혼모가 되었을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문제를 처리하는지 보고 싶어 했다. 이럴 때 보통 사람은 감춰진 자기 모습을 본능적으로 드러내기 마련인데 부소는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던 이 사건을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부소의 그런 인격을 높이 샀을 것 같다. 믿음에 대한 구호는 있고 실천은 없는 이 시대에 그의 사고와 삶, 그리고 그의 인격은 오늘을 사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따라 살아야하는가를 배우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자기 창틀로 가난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과 사람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 책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은 모두 부소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고 도움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이다. 부소의 친화력이나 인간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한 권의 책에 담아낼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쓴 ‘필리퍼 틴데일’(Phiippa Tyndale)은 일목요연하게 그들의 역할을 잡아냈다. 그러면서도 부소의 이야기에서 그들을 적절하게 배치했다. 부소가 걸었던 긴 여정을 흐트러짐 없이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와 같은 저자의 집중력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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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1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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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이 10년 전 일이다. 어느 선교사님의 강력추천으로 읽었던 것 같다. 헨리 나우웬의 명성이야 그 이전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한 유명 화가의 그림에 관한 책을 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때 그의 글을 따라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일단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비유가 상당히 긴 이야기인데 비해 렘브란트의 그림은 달랑 한 장짜리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긴 말씀을 한 폭의 그림에 담을 수 없다는 내 나름대로의 단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제로 헨리 나우웬을 대할 때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게 아니고 그림을 묵상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과 불편함이 있었다. 이 불편함은 책을 읽는 기간 내내 떠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붓질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지나치게 자의적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끝까지는 읽었지만 결국 탕자의 귀향에서는 남는 것도 없고 건질 것도 없었다.

어쩌면 그림을 묵상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난 후에 동방교회에서는 기도하는데 이콘을 사용하는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전통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이콘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집중할 수는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카라바조’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를 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도 예수님의 허리에 손가락을 찔러 넣는 도마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바로 너”라고 지적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시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순간에 머릿속으로 휙 지나간 생각이 <탕자의 귀향>이었다. 그림을 이렇게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 경험이 있고 나서 <탕자의 귀향>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2.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정신지체아동 시설에서 나머지 생애를 보냈다고 하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결정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시험하는 기간을 가졌다. 프랑스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에서... 이곳이 그에게 축복의 장소인 것은 그곳에서의 생활이 데이 브레이크로 들어가겠다는 그의 결정을 굳힐 만큼 영향을 준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그 뒤로 끊임없이 <탕자의 귀향>을 묵상하고 그 그림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었다. 그가 쓴 <탕자의 귀향>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자료와 논문, 다른 이들의 해석과 묵상에 귀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렘브란트 자체에 대해서도 꽤나 많이 연구했고, 그의 그림이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어떻게 다른지도 비교했다. 그의 책이 풍성할 수 있는 것은 <탕자의 귀향>을 처음 만난 그 때부터 수 년 동안 땀 흘린 그와 같은 수고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하여 이 그림의 원작을 감상하게 된 것은 그에게 <탕자 이야기>의 이해를 더 깊게 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단락으로 나누자고 하면 누구나 작은 아들 이야기와 큰 아들 이야기로 나눈다. 저자도 그 틀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우리의 이해에 아버지에 대한 단락을 하나 더 추가한다. 그래서 그가 쓴 <탕자의 귀환>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 그리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3.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아버지와 단절하고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은 누가 보더라도 탕자임에 분명하다. 집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고, 쉼과 평화와 풍요를 집만큼 보장해주는 곳이 없지만 작은 아들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아버지에게 속하기를 거절했던 그의 선택은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인 아픔을 주었고,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자신의 인생에서 아들은 고통의 걸음을 걸어야했다. 그리고 그 영상너머에 그것과 겹쳐진 또 다른 영상, 우리는 작은 아들의 가출에서 아담이 저지른 반역을 보게 된다. 

겉모습만 본다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랑감이자 온 동네의 자랑감이다. 그의 변함없는 성실함은 누구든지 그를 믿음직스런 사람으로 보게 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은 맏아들로서 그가 가진 성실함과 책임감이 지금껏 무거운 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집을 떠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 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종처럼 살았고 그의 마음에는 분노가 있었다. 그는 분명 아들이었지만 아들만이 갖는 특별한 자유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결국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의 분노는 폭발했고, 그는 아버지와 단절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다. 큰 아들 역시 심정적으로는 집을 나온 탕자인 것이다. 큰아들의 마음은 독선과 자기연민과 질투로 가득하고, 동생의 죄를 지적하는 그의 얼굴에는 누가가 본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 표독스러움과 낯익음에 놀랐는데 다시 뜯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다.

4.   

누가복음 15장을 읽을 때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비유들이 각각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사람들인데 비해서 이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가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물론 성경 이야기는 좀 다르다. 성경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아들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알아보고 달려가는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다. 헨리 나우웬은 나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보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집에 앉아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였던 것이다. 두 탕자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런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절을 선언한 아들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경험한 원리나 원칙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대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 용납 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향으로 향하는 아들의 걸음에 무겁고 고민스러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보듬어내고 있을 뿐이다. 염치없는 인간들이라도 돌아가야 산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5.
아들들의 탈선이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아픔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지 아들들이 염려되었고, 그런 만큼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아들들이 훌륭하게 성장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이 어린 아이, 철부지 아들로 남지 않고 아버지 이상의 훌륭한 아버지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아버지가 자기들을 감싸 안아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우리의 아버지 경험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게 아니다. 아버지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특히 우리 문화권에서는 아들을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가 경험한 아버지도 그랬고 아들을 대하는 나를 봐도 그렇다. 탕자의 아버지에게서 우리가 한 수 배워야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 배움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로 나아가야 한다. 헨리 나우웬이 아버지를 묵상하며 이 점을 포착했다.
 

6.
책을 다 읽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탕자의 귀향>을 이번에는 잘 따라왔을까...? 일단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새삼 발견한 것이 있다. <탕자의 귀향>을 보는 헨리 나우웬의 묵상은 너무 철저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아버지의 손 모양에서부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 그것을 드러내는 그림의 명암, 붓 자국 하나까지... 그는 화가가 이 그림을 왜 그렇게 그렸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아다녔다. 그의 철저함이 두 번째 읽는 <탕자의 귀향>에서 나에게 그림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지 그림 한 장을 묵상 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이면에 있는 화가의 삶과 그 이전에 그림을 있게 했던 성경 말씀과 그 둘을 다 보고 있는 자기의 생애까지를 묵상한다. 그래서 저자는 끊임없이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에 렘브란트와 자신과 번갈아가며 대비시킨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은 방탕한 작은 아들이 렘브란트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이고, 집에 있는 탕자가 곧 화가이며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를 환영하는 하늘 아버지이면서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아버지의 자리라고 하는 것도 알았다. 저자가 갖게 된 이런 깨달음은 나와 모든 사람들을 그리로 오라고 부르는 초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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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6-0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보려 했는데 좋은 리뷰를 만나 반갑습니다.
얼마 전 한 책을 통해 헨리 나웬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기독교 작가로서 마주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상처입은 치유자>를 읽었는데 그 역시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지 않을까 합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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