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향 -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1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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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이 10년 전 일이다. 어느 선교사님의 강력추천으로 읽었던 것 같다. 헨리 나우웬의 명성이야 그 이전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한 유명 화가의 그림에 관한 책을 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때 그의 글을 따라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일단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비유가 상당히 긴 이야기인데 비해 렘브란트의 그림은 달랑 한 장짜리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긴 말씀을 한 폭의 그림에 담을 수 없다는 내 나름대로의 단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제로 헨리 나우웬을 대할 때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게 아니고 그림을 묵상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과 불편함이 있었다. 이 불편함은 책을 읽는 기간 내내 떠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붓질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지나치게 자의적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끝까지는 읽었지만 결국 탕자의 귀향에서는 남는 것도 없고 건질 것도 없었다.

어쩌면 그림을 묵상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난 후에 동방교회에서는 기도하는데 이콘을 사용하는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전통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이콘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집중할 수는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카라바조’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를 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도 예수님의 허리에 손가락을 찔러 넣는 도마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바로 너”라고 지적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시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순간에 머릿속으로 휙 지나간 생각이 <탕자의 귀향>이었다. 그림을 이렇게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 경험이 있고 나서 <탕자의 귀향>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2.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정신지체아동 시설에서 나머지 생애를 보냈다고 하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결정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시험하는 기간을 가졌다. 프랑스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에서... 이곳이 그에게 축복의 장소인 것은 그곳에서의 생활이 데이 브레이크로 들어가겠다는 그의 결정을 굳힐 만큼 영향을 준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그 뒤로 끊임없이 <탕자의 귀향>을 묵상하고 그 그림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었다. 그가 쓴 <탕자의 귀향>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자료와 논문, 다른 이들의 해석과 묵상에 귀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렘브란트 자체에 대해서도 꽤나 많이 연구했고, 그의 그림이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어떻게 다른지도 비교했다. 그의 책이 풍성할 수 있는 것은 <탕자의 귀향>을 처음 만난 그 때부터 수 년 동안 땀 흘린 그와 같은 수고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하여 이 그림의 원작을 감상하게 된 것은 그에게 <탕자 이야기>의 이해를 더 깊게 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단락으로 나누자고 하면 누구나 작은 아들 이야기와 큰 아들 이야기로 나눈다. 저자도 그 틀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우리의 이해에 아버지에 대한 단락을 하나 더 추가한다. 그래서 그가 쓴 <탕자의 귀환>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 그리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3.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아버지와 단절하고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은 누가 보더라도 탕자임에 분명하다. 집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고, 쉼과 평화와 풍요를 집만큼 보장해주는 곳이 없지만 작은 아들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아버지에게 속하기를 거절했던 그의 선택은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인 아픔을 주었고,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자신의 인생에서 아들은 고통의 걸음을 걸어야했다. 그리고 그 영상너머에 그것과 겹쳐진 또 다른 영상, 우리는 작은 아들의 가출에서 아담이 저지른 반역을 보게 된다. 

겉모습만 본다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랑감이자 온 동네의 자랑감이다. 그의 변함없는 성실함은 누구든지 그를 믿음직스런 사람으로 보게 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은 맏아들로서 그가 가진 성실함과 책임감이 지금껏 무거운 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집을 떠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 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종처럼 살았고 그의 마음에는 분노가 있었다. 그는 분명 아들이었지만 아들만이 갖는 특별한 자유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결국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의 분노는 폭발했고, 그는 아버지와 단절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다. 큰 아들 역시 심정적으로는 집을 나온 탕자인 것이다. 큰아들의 마음은 독선과 자기연민과 질투로 가득하고, 동생의 죄를 지적하는 그의 얼굴에는 누가가 본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 표독스러움과 낯익음에 놀랐는데 다시 뜯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다.

4.   

누가복음 15장을 읽을 때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비유들이 각각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사람들인데 비해서 이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가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물론 성경 이야기는 좀 다르다. 성경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아들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알아보고 달려가는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다. 헨리 나우웬은 나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보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집에 앉아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였던 것이다. 두 탕자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런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절을 선언한 아들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경험한 원리나 원칙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대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 용납 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향으로 향하는 아들의 걸음에 무겁고 고민스러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보듬어내고 있을 뿐이다. 염치없는 인간들이라도 돌아가야 산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5.
아들들의 탈선이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아픔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지 아들들이 염려되었고, 그런 만큼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아들들이 훌륭하게 성장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이 어린 아이, 철부지 아들로 남지 않고 아버지 이상의 훌륭한 아버지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아버지가 자기들을 감싸 안아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우리의 아버지 경험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게 아니다. 아버지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특히 우리 문화권에서는 아들을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가 경험한 아버지도 그랬고 아들을 대하는 나를 봐도 그렇다. 탕자의 아버지에게서 우리가 한 수 배워야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 배움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로 나아가야 한다. 헨리 나우웬이 아버지를 묵상하며 이 점을 포착했다.
 

6.
책을 다 읽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탕자의 귀향>을 이번에는 잘 따라왔을까...? 일단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새삼 발견한 것이 있다. <탕자의 귀향>을 보는 헨리 나우웬의 묵상은 너무 철저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아버지의 손 모양에서부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 그것을 드러내는 그림의 명암, 붓 자국 하나까지... 그는 화가가 이 그림을 왜 그렇게 그렸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아다녔다. 그의 철저함이 두 번째 읽는 <탕자의 귀향>에서 나에게 그림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지 그림 한 장을 묵상 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이면에 있는 화가의 삶과 그 이전에 그림을 있게 했던 성경 말씀과 그 둘을 다 보고 있는 자기의 생애까지를 묵상한다. 그래서 저자는 끊임없이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에 렘브란트와 자신과 번갈아가며 대비시킨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은 방탕한 작은 아들이 렘브란트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이고, 집에 있는 탕자가 곧 화가이며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를 환영하는 하늘 아버지이면서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아버지의 자리라고 하는 것도 알았다. 저자가 갖게 된 이런 깨달음은 나와 모든 사람들을 그리로 오라고 부르는 초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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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6-0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보려 했는데 좋은 리뷰를 만나 반갑습니다.
얼마 전 한 책을 통해 헨리 나웬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기독교 작가로서 마주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상처입은 치유자>를 읽었는데 그 역시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지 않을까 합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