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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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 이동진


이동진 저,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 이동진 독서법'을 읽고


이동진은 영화평론가로 잘 알려져 있고 여러 매체에서도 그렇게 소개된다. 그가 남긴 짧지만 강렬한, 그래서인지 긴 여운을 남기며 수려하기까지 한 많은 명문들은 이동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다.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해서, 혹은 독창적인 비평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글쓰기를 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동진은 이게 가능했고, 그 재능은 그의 꾸준한 '읽고 쓰는 삶'이 맺은 열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말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이동진의 독서법에 관해서다. 굳이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고 하면 제목에 나와 있는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 이동진의 독서법의 핵심 키워드는 '재미'다. 어떤 지식을 쌓기 위한 특정한 목적으로 읽는 독서도 독서이지만, 그런 독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끝나는 일에 불과하고 지속할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동진의 독서법의 중요한 전제는 독서의 지속, 혹은 독서의 생활화라고 할 수 있겠다. 빈 시간에 별 망설임 없이 책을 들고 읽을 수 있는 문화를 염원하는 이동진의 바람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의 키워드인 '재미'라는 단어를 이해했다고 해서 이 책을 닫으면 후회할 것이다. 내게 이동진은 글보다 말을 더 잘하는 인플루언서로 각인되어 있는데, 편한 구어체로 쓰인 이 책의 여러 꼭지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이동진이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며, 곳곳에서 그의 낭중지추 같은 내공 혹은 통찰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삐져나온 송곳을 알아채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묘미이자 이 책의 가장 적확한 독법이 아닌가 싶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 유사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이동진의 독서법은 아마도 책을 좋아하고 지속해서 읽어나가고 있는 무수한 독자들의 독서법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딱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아래에 조금 더 풀어볼까 한다. 


이동진은 책에서 길을 찾을 수도 있지만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니, 길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길을 잃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동진의 다른 표현으로 이는 각각 '쌓는 독서'와 '허무는 독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후자에 주목했다.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허무는 독서라니! 길을 잃기 위한 독서라니! 평소에 안개처럼 막연한 생각의 파편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던 것을 누군가 명료하게 정리한 문장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나는 이 부분에서 느꼈던 것 같다. 카프카의 유명한 말처럼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는 문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독서의 목적은 나도 모르게 게을러지고 있던 내 안의 나를 깨우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길을 잃을 용기, 잃어도 괜찮다는 용기, 그게 아니어도 괜찮다는 용기. 독서인으로서 늘 명심해야 할 깨우침일 것이다.


이동진은 2만 3천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이다. 책 뒤엔 그가 추천하는 책 목록이 소개되어 있다. 무려 800권이다. 내가 지난 8년간 읽은 책들을 다 합쳐도 겨우 천 권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은데, 추천을 800권이나 할 수 있다는 건 도대체 그가 읽은 책이 몇 천권이란 말일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독서가들이 이 세상엔 많은 것을 다시 실감한다. 


이 책을 읽으며 예상 밖의 소득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의 독서법이 있고, 글쓰기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으며, 그것들을 나누고 전달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읽고 쓰고 나누는 삶은 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니, 나도 언젠간 나만의 고유한 철학과 노하우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십 년은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볼 것이다.


#위즈덤하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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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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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친근한


이승우 저, '소설가의 귓속말'을 읽고


'고요한 읽기' 덕분에 이승우 작가의 에세이 혹은 산문의 매력에 빠진 이후, 나는 그를 전작 읽기 리스트에 조용히 올렸고, '생의 이면'과 '사랑이 한 일'을 읽으며 불편했던 그의 문체가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중첩되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그의 문장들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이 어쩌면 이승우를 읽는 고유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언젠간 '생의 이면'과 '사랑이 한 일'을 다시 읽어야 할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여러 형태의 글들이 한데 모인 산문집이다. 에세이, 비평, 서평, 칼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글들이 책 한 권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갈한 느낌이나 다듬어진 느낌보다는 조금 더 이승우 작가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제목에 쓰인 '귓속말'이라는 단어가 단박에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소설은 무엇인지에 대해, 혹은 소설가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어떤 명쾌한 답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에서 소설가 이승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귓속말은 그런 일체의 팁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자신의 여러 생각들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에서 내게 더 의미가 깊었던 단어는 '귓속말'이 아닌 '소설가'였다. 소설을 쓰는 사람을 일컫는 일반적인 '소설가'가 아닌, '귓속말'을 들려주는 소설가, 즉 이승우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제 이승우 작가가 왠지 친근해진 기분이다.


한 작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작가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아니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일 테다. 그리고 좋은 책이란 다 읽고도 또 읽고 싶어 지게 만들고, 그 작가가 쓴 다른 책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일 것이다. 내겐 이 책이 그랬다. 지금까지 읽은 이승우 작가의 다섯 작품 중 가장 소박한 책이지만 말이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4. 캉탕: https://rtmodel.tistory.com/2024

5. 소설가의 귓속말: https://rtmodel.tistory.com/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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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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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편재


크리스티앙 보뱅 저, '빈 자리'를 읽고


보뱅의 글을 읽고 있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운 곳에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비칠 때야 비로소 드러나는 먼지처럼, 보뱅의 글은 평소에 모르고 지나치던 모든 존재들을 세밀하게 비춘다. 먼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지 않기로, 그러지 말자고 연신 다짐해 놓고도, 또다시 쫓기듯 살던 나는 그제야 쫓기는 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걸음을 멈추게 되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시간도 멈추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응시의 시공간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다소곳한 자세로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부재' 혹은 '결핍'을 보게 된다. '빈 자리'다. 신이 떠난 자리일까, 그 텅 빈 시공간은 누구의 빈 자리인 걸까. 아무것도 아닌 듯하나 모든 존재의 중심에 놓인 이것, 이 공허를 인지하는 것, 이 빈 자리를 깨닫는 것이 보뱅의 글을 위한 독법이리라.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소설도 아니고, 어떤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상이나 주장이 담긴 글도 아니다. 보뱅의 글은 어쩌면 '빈 자리'를 노래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응시하며, 그 가운데 있는 부재와 결핍을 따스한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며 그것들과 함께 한다. 편재한 부재의 미학이랄까. 부재의 충만이 만들어내는 향연이랄까. 보뱅의 글을 읽고 있으면 겸손해진다. 앞과 위만을 쳐다보며 살던 나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 이 부재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를 가만히 응시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 안의 부재를, 그리고 그 부재를 통해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선행하는 부재,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론적 한계일 것이다. 


정갈한 문장이 읽고 싶을 때 보뱅을 꺼내든다. 읽다가 자주 멈추게 되는 그의 글을 사랑한다. 중요한 것과 의미 있는 것, 아름다운 것과 기억에 남는 것의 경계가 흐려질 때 나는 다시 이 책을 손에 들 것 같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 크리스티앙 보뱅 읽기

1. 작은 파티 드레스: https://rtmodel.tistory.com/1437

2. 그리움의 정원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446

3. 환희의 인간: https://rtmodel.tistory.com/1449

4. 자리: https://rtmodel.tistory.com/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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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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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용기


줌파 라히리 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읽고


제2의 모국어이자 주언어였던 영어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키고 이탈리아어를 제3의 모국어이자 제2의 주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줌파 라히리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저명한 미국 작가다. 그녀는 인도 벵골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민자 신분으로 살게 되었고, 어릴 적엔 부모를 따라 벵골어를 사용하다가 미국 이주 후 영어를 사용하게 되며 이중 정체성을 평생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탈리아어가 느닷없이 그녀의 삶으로 들어와 중심부에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탈리아, 그리고 그곳의 언어를 흡수하고 싶었던 그녀는 미국 작가로 전성기를 누리던 2012년 돌연 이탈리아로 이주하는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로마에서 2년을 거주하며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걸 놓지 않는다. 그녀는 왜 이런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을 했던 걸까?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하여 명성을 떨치며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해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답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도주라고 생각한다고. 철저히 언어적 변신을 꾀하며 무언가에서 멀어져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는 거라고. 영어에 대한 패배감이나 성공에서 도망치는 거라고.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어색한 구석이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구시대 우아한 긴치마에 티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슬리퍼를 신은 것처럼 이상하게 옷을 입은 느낌, 혹은 엄마의 옷장에 몰래 들어가 하이힐을 신어보고,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보석과 모피코트를 걸쳐보려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과 비슷하다고. 


그녀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평생 짊어진 사람이었다.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해도 인도계 외모 때문에 미국에서도 외국인 취급을 받았고, 이탈리아 로마에 2년간 거주할 때 이탈리아어를 남편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했음에도 이탈리아 현지인들로부터는 이탈리아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편보다 더 이탈리아어를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어딜 가나 현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흡수하기로 했던 선택도 어쩌면 이런 정체성 혼란이 없었다면 오히려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공과 정착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잠식되지 않고 창작에 대한 순수한 작가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모험을 용기 있게 선택한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용기에서 나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가득 차게 된다. 그녀의 작품들을 여러 권 구입했다. 전작 읽기 작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1.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https://rtmodel.tistory.com/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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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인의 키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승주연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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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체호프


안톤 체호프 저, ‘낯선 여인의 키스‘를 읽고


체호프의 단편을 언젠간 꼭 읽어 보리라 다짐했던 건 도스토옙스키를 막 읽기 시작하면서였고 코로나가 발발하기 이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이다. 단편집도 책장에 잘 모셔 두었기에 마음 내킬 때 손에 잡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획은 다른 많은 계획들과 함께 무산되었고 나는 약 천 권의 책 중 단 오십 권만 남겨 두고 처분한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체호프 단편집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녹색광선 시리즈를 좋아한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을 접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다. 나는 녹색광선을 통해 푸쉬킨, 발자크, 츠바이크, 페렉을 처음 만났다. 모두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들의 작품을 더 읽고 싶어 지게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원래 알고 있던 카뮈의 '결혼, 여름' 역시 재독의 맛을 한층 높여주었다. 작년엔 마침 체호프의 단편집을 출간한다고 해서 나는 이번엔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출간 직후 구매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또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1년이 지나고 얼마 전 책장 정리를 하다가 눈에 띈 이 책을 나는 마지막 순간을 부여잡듯 덥석 손에 잡고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마침내 체호프를 만날 수 있었다.


아래는 책에 실린 여덟 단편에 대한 나의 짧은 감상이다. 


농담

여덟 편 중 가장 짧은 분량의 이 작품은 이 책을 여는 첫 단편이다. 달랑 열 페이지. 읽기 시작했는데 금세 끝나고 마는 작품. 그러나 좋은 단편들이 그렇듯, 강한 여운이 남는 작품. 나쟈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스스로도 불확실한 일인칭 주인공 화자는 나쟈에게 눈썰매를 타자고 제안한 뒤 그녀를 썰매장으로 데려간다. 썰매가 처음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나쟈는 화자의 강권에 못 이겨 결국 썰매를 타게 되는데, 속도가 붙어 가장 바람 소리가 거센 지점에서 화자는 느닷없이 “당신을 사랑해요, 나쟈”라는 말을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나쟈는 그 말을 들었지만 과연 그 말을 화자가 했는지 안 했는지, 바람결에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화자는 그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나쟈가 확인을 바란다는 눈치를 채게 된다. 작전 성공이다. 그런데 나쟈는 화자에게 직접 물을 자신이 없는 듯하다. 아, 이 보이지 않는 밀당이라니. 대신 그녀는 그리도 타기 싫었던 썰매를 다시 타자고 제안한다. 화자는 그 말에 응하며 장난을 반복한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여러 날을 그렇게 한다.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직전 화자는 나쟈의 집 앞에서 창가에 나와 있는 그녀를 몰래 지켜보다가 바람이 부는 찰나를 이용해 썰매 탈 때 했던 그 장난을 다시 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쟈는 어디선가 들려온 그 문장을 듣고 행복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인다. 과연 나쟈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사람이 화자이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화자가 아니길 바랐던 걸까? 작품은 시간이 지나고 나쟈를 회상하는 화자의 간략한 설명으로 끝난다. 그녀는 결혼하여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면서.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자신이 왜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농담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설마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 여러 단편을 읽어 왔지만, 내게 이 작품은 단편 특유의 불친절함이 아닌 미완성, 다시 말해 쓰다 만 듯한 인상을 남긴 소설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인 안나와 그를 사모하게 된 한 남자 구로프. 둘은 얄타라는 휴양지에서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 사랑엔 문제가 있다. 안나와 구로프는 각각 남편과 아내가 버젓이 살아 있는 유부녀, 유부남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둘은 불륜에 빠진 것이다. 휴가를 끝내고 안나는 S시로, 구로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가지만, 둘은 서로를 잊지 못한다. 구로프는 안나를 만나기 위해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담대하게 S시로 향하고, 극장에서 만난 안나 역시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 뒤, 안나가 모스크바에 들른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두 사람 사이의 불륜이 정상 궤도에 오르는 시작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윤리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는 들킬지도 모르고, 들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날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에 노출되어야 하는 순간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고심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저자인 체호프는 이 두 사람의 불륜을 응원하는 입장인 듯하다는 점인데, 작품 마지막 문장들이 이를 입증한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묘안이 떠오를 것이고, 그러면 새롭고 멋진 삶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사랑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먼 길을 가야 하며,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다 읽고 나서도 얼떨떨한 소설. 내가 뭘 놓쳤나 싶어 다시 뒤적거려야만 했던 소설. 그러면서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나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묘하게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진창

읽기 전에는 제목의 의미를 절대 모를 소설이다. 책을 다 읽고 문득 제목을 다시 보며 실없는 한숨을 지었다. 할 말이 없었다. 완전 당했다는 기분도 들었다. 아, 이런 게 체호프의 매력일까? 빌려준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 두 남자가 그 돈을 돌려줘야 하는 한 여자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광경을 이토록 코믹하고 쾌활하고 완벽하게 보여주다니! 결코 아름답지도 않고 신분이나 배경이 탐탁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요상한 매력을 풍기는 수산나에게 꼼짝없이 붙잡힌 건 그런데 두 남자만이 아니었다. 작품 마지막에서는 더 많은 남자들이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네가 여기 왜 있어?'라고 할 것만 같은 이 어이없는 상황. 어느새 나도 마치 그 자리에 멀뚱대며 있는 남자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았고, 그들이 느끼고 있을 모종의 수치심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산나가 대체 어떤 여자길래? 하는 호기심이 작품을 다 읽고도 진한 재스민향처럼 내게 남아 있다. 하지만 체호프는 미리 경고했었다. 제목으로 말이다. 그곳은 진창이라고. 그러니 들어가지 말라고. 아니,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해석한 걸지도 모른다. 진창이라는 의미는 경고가 아니라 운명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곳은 모든 남자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곳, 곧 진창이라고 말이다. 아아, 체호프는 이미 남자들의 속마음을 다 꿰뚫어 본 것 같다. '너도 별 거 아니잖아?' 하며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젠장. 된통 당했다. 그것도 완전 무방비 상태로.


귀여운 여인

사랑 없으면 살 수 없는 여인, 올렌카의 이야기다. 여기서 '사랑 없으면'을 '사랑받지 못하면'으로 읽으면 안 된다. '사랑하지 못하면'으로 읽어야 한다. 올렌카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여인이다. 이 단편소설은 올렌카가 네 남자를 순차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여정을 비춘다. 한 남자를 사랑할 때마다 그녀의 생각과 마음은 그 남자의 생각과 마음과 같아진다. 공감이라고 하기엔 약하게 느껴지고, 세뇌라고 하기엔 세게 느껴지며, 수동적이고 순응적이며 자기 주관이 없다고 말하기에도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자세로 올렌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온전히 하나가 된다. 어떻게 보면, 순수하게 사랑에 빠지면 응당 나타나야 하는 솔직한 모습을 체호프는 올렌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도 첫 번째 남자도 죽고, 이후에 만난 두 번째 남자도 죽고, 그 이후에 만난 세 번째 남자는 일 때문에 떠나게 되고, 마지막으로 올렌카가 사랑에 빠졌던 남자는 세 번째 남자의 아들이었다. 이성애가 아닌 모성애까지 올렌카는 모두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에 세 번째 남자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작품이 끝나는데, 체호프가 귀여운 여인, 올렌카를 끝까지 응원한다는 마음을 표현한 설정이지 싶다. 나도 동감하게 된다. 올렌카가 자기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그러니까 상대방과 하나가 될 때까지, 사랑에 빠지는 삶을 끝까지 살아내면 좋겠다.


검은 수사

환상소설인 듯한 이 작품은 유능한 학자인 코브린 박사의 짧은 삶을 비춘다. 고아가 된 그를 양육해 준 예고르와 그의 딸 타냐가 거하는 집에 오랜만에 방문한 코브린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과거를 회상하며 행복에 잠긴다. 코브린이 그곳을 찾은 건 일 중독으로 의사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일도 계속한다. 그러다가 검은 수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사람이 아닌 환영이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냈으며 코브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존재였다. 검은 수사는 코브린의 광기 어린 천재성을 칭찬하고, 코브린은 그 칭찬과 인정에 기뻐하지만,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타냐나 그의 장인이 된 예고르가 보기에 코브린은 정신병이 심화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데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코브린을 보며 타냐와 예고르는 코브린을 병원으로 데려가게 되고 코브린은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자 검은 수사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좋은 소식이 되지 못했다. 코브린은 생기를 잃어갔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으며, 그만의 고유한 개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모든 색이 빠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타냐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삶을 시작했으나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의 마지막에 다시 나타난 검은 수사가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만약 당시에 자네가 천재라는 것을 믿었다면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슬프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을거야.”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그는 정신과 약을 먹기 전의 삶을 회상한다. 죽음을 맞이한 코브린의 얼굴에는 천상의 행복감에 사로잡힌 미소가 박제되어 있었다. 광인인 채 살더라도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다면, 삶을 기계적으로만 사는 색깔 없는 정상인보다 더 값진 삶을 사는 게 아니겠냐고 체호프가 묻는 듯한 소설이다. 광기에 대해, 광기 어린 사람을 향한 평가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는 작품이다.


낯선 여인의 키스

포병 여단의 6개 포대가 야영지로 가는 길에 하룻밤 묵을 요량으로 들른 한 작은 마을에서 장교들은 그곳의 지주인 폰 라베크 중장으로부터 차를 마시러 오라는 초대를 받는다. 장교들은 초대에 응했고, 중장의 저택으로 들어가 술도 마시고 저녁식사도 하고 춤도 추고 게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랴보비치는 가장 사교적이지 못한 장교였다. 그는 춤을 춰본 적도 없었기에 당구를 치는 무리들에 어정쩡하게 섞여 있다가 당구마저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혼자서 홀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길을 잃어버린 나머지 엉뚱한 방에 들어가게 된다. 활짝 열린 방 창문 너머로 사시나무, 라일락, 장미꽃 향이 흘러들었다. 멈춰 서서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사각대는 드레스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여자가 숨을 가쁘게 쉬면서 "이제야 오시다니!"라고 속삭이며 볼에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즉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을 깨닫고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자리를 뜬다. 그러나 랴보비치에겐 그것이 지울 수 없을 만큼 진한 흔적으로 남는다. 부대는 마을을 떠나 야영지에 도착하고, 다시 야영지를 떠나 낯선 여인의 키스를 받았던 작은 마을로 돌아오게 되지만, 랴보비치는 얼굴도 알 수 없는 그 여인 생각으로 모든 시간을 신비감에 쌓인 채 보내게 된다. 돌아온 마을에서 옛 기억을 쫓아 저택 근처로 혼자서 가보기도 하지만, 자신이 바람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숙소로 돌아오니 동료들 모두가 어떤 장군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 랴보비치는 그곳에 합류하지 않기로 한다. 아마도 '낯선 여인의 키스'의 기억을 때 묻히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서정적이고 순수한 낭만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그 '낯선 여인'이 누구일지 궁금하다. 


6호실

이 책에 실린 여덟 단편 중 중편이라 해도 될 만큼 가장 긴 작품이다. 제목만 보고도 나는 눈치를 챘다. 6호실이라니.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자연스레 병실을, 그중에서도 정신병동에 속한 병실을 떠올렸다. 내 짐작은 적중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다른 단편들과 달리 남녀 간의 사랑이나 심리가 아니라, 이 작품은 성을 뛰어넘는 인간 본성을 겨냥한다. 잠시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도 했다. 의사인 안드레이 예피미치와 정신병 환자 이반 드미트리치 사이의 대화가 이 작품에선 가장 에센스가 아닐까 싶다. 누가 정신병자이고 누가 정상인인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끝내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안드레이 예피미치를 보며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 주위를 둘러싼 지인들의 반응과 행동에서 나는 공포마저 느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느꼈던 감옥의 정의와 목적과 유용성에 대한 답 없는 질문들도 떠올랐다. '감옥'이라는 단어 대신 '정신병동'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기만 하면 얼추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진 않으나 분량이 긴 만큼 단편이 던져주는 잽이 아닌 중장편에서 맛볼 수 있는 묵직한 어퍼컷을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덕분에 체호프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진지하고 무거운 질문과 통찰을 다루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 길더라도 이 작품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신부

나쟈라는 한 약혼녀가 어릴 적부터 한 집에서 친하게 지내던, 고아였던 오빠 사샤 덕분에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쟈의 어머니는 친할머니의 자산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책만 읽고 모호한 것들을 확신 있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여자다. 나쟈와 곧 결혼하기로 약속한 안드레이라는 약혼남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대며 바이올린이나 켜며 결혼을 기다린다.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나쟈가 보기에 그곳에서 안드레이와 결혼까지 하게 되면 대대로 그 삶 안에서 박제된 채 죽음을 기다릴 것만 같았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을 보게 된 건 매년마다 그것을 알려주는 사샤 덕분이었다. 결혼을 한 달 앞에 둔 시점에서야 비로소 나쟈는 마음에 결단을 내리고 사샤와 함께 늪과 같은 그 집을 떠나기로 한다. 당연히 결혼은 취소되었고, 갑자기 떠나버린 나쟈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나쟈는 집을 떠나 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음 해에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나쟈는 집에 오면서 들른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사샤가 더 이상 영특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병약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나쟈는 옛 기억에 잠시 회상에 잠기기도 하지만, 날벼락처럼 들려온 사샤의 사망 소식을 계기로 다시 한번 예전에 사샤와 함께 집을 떠나기로 결단했던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된다. 한 젊은 여성의 자기 객관화와 개성화를 통한 성장 소설. 마치 헤세의 변주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6. 낯선 여인의 키스 (by 안톤 체호프): https://rtmodel.tistory.com/2034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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