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예배 -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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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단조로움 속으로 찾아온 예기치 못한 기쁨.


티시 해리슨 워런 저, '오늘이라는 예배'를 읽고.

- 부제: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늘 보던 일상, 늘 하던 일과, 지루하고 하찮아서 나 스스로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순간들. 아니, 그런 의미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타성에 젖어버려 기억에서 곧바로 삭제되고 버려지는 시간들. 하지만 내 하루를, 내 인생을 압도적으로 채우고 있는 그 기계적인 시간들. 때론 순식간에 우리를 다 커버린 어른으로 만들어 버리고, 때론 인생의 덧없음을 곱씹는 철학자나 그 이면에 놓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며, 때론 심리학자로, 또 때론 무면허의 상담가나 사설탐정으로 우릴 만들어 주기도 하는 그 숱한 시간들. 바로 일상의 다른 이름들이다. 나와 당신의 인생, 나와 당신의 하루, 그리고 나와 당신의 오늘. 


그러나 그렇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 심지어 일기장에 끄적거릴만한 내용조차 하나 없는 날에도, 갑자기 훅 들어오는 전율의 순간은 종종 나를 찾아온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순간은 아까와 동일한 바로 그 시공간에서 일어난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순간. 가끔은 입을 쩍 벌리고 두 손을 위로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한없이 겸허하고 한없이 경건한 자가 되어, 경이감에 휩싸인 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순간. 원한다고 찾아오는 순간들이 아니기에, 내 의지와는 분명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그 순간을 맞이하기 이전에 화학적이고 전기적이며, 또 육적이면서 영적이기도 한 어떤 것들이 상호작용하였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 신비라고 하자. 이런 신비로운 순간은 순식간에 나를 압도하여 내 입을 다물게 하고, 비상하게 돌아가던 내 논리와 비판을 멈추게 하며, 보이는 것들 이면에 놓인 세계를 보라고 말한다. 마치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을 엉뚱한 시간과 공간에서 엉뚱한 방법으로 찾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기억할 수조차 없는 오래 전, 마치 태곳적에 나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은,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의 이성과 감성을 단숨에 제압해버리고 나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 순간들. 아.. 어찌 이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왜 나는 그러한 비논리적인 순간들 한가운데서 내 안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남을 느끼고, 그제서야 비로소 계속해서 뛰고 있었던 심장을 느끼며, 그 심장을 통해 전신으로 따뜻한 피가 흘러감을 느끼는 걸까. 왜 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순간을 맞이할 때,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하고, 또 궁극의 답을 얻은 지혜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인생의 굴곡진 곡면의 순간기울기를 살아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살아있음은 물론 행복까지도 느끼고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걸까. 나의 존재 이유와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내가 품어야 할 마음과 해야 할 일들이 왜 그 순간 선명하게 분별이 되는 걸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러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아, 하나님, 이렇게 훅 들어오시다니..."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순간들이 내가 성공을 거뒀거나 뭔가 특별한 일을 성취했을 때 찾아오지 않고, 따분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 가운데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다. 그리고 분명하게 아는 것도 한 가지가 있는데, 이러한 예기치 않은 기쁨의 순간들을 내가 점점 더 기다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다림은 나에겐 하나의 소망이 되어, 하찮을 만큼 평범한 내 일상에 밝고 아름답고 따스한 평안의 빛을 비춘다.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예기치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한 번에 훅 들어오는, 항복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순간들이 있어서 사소한 나의 하루가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이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 당신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일상에서 마지막으로 가슴 설레어 본 적이 언제인가. 


습관처럼 길들여진 반복적인 삶의 패턴 한가운데에 신비가 있다. 그 신비는 발견하는 자를 행복으로 맞아준다. 누구든지 찾을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그 순간들. 이 책은 우리가 누구나 경험하는 그런 사소한 하루를 특별한 (아니, 가장 평범하다고 해야 할까. 가장 평범해서 특별해져 버린 걸까) 시각으로 조명해준다. 부제인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에서도 간파할 수 있듯, 이 책은 하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예전과 연결시켜 바라보며, 작은 순간들의 믿음과 자잘한 형태의 영적 성숙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잠에서 깨어 침대를 정리하고, 이를 닦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부터 끼니를 때우고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24시간을 이 책은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내밀한 관찰과 분석 및 해석은 그녀의 신학적 성찰로 승화되어 이 책을 잔잔한 한 편의 에세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녀만의 수려하고 맛깔 나는 필력은 덤이다. 


우리는 모두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의식을 되찾는다. 나 같은 경우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빠로서, 그리고 한 명의 생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더 깊고 더 실제적인 정체성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다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매일 아침 세례받은 자들로서 잠에서 깬다." 구약의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시고 보호해주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성공회 사제로서 저자는 예배당에 있는 세례반을 지나갈 때 손가락을 살짝 담근 뒤 성호를 긋는 행위가 기억의 행위임을 알려준다.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으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 덕분에 받아들여졌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모든 정체성을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놓았다가 다시 하나씩 주워 입게 되는 아침 시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사랑받은 자요, 용서받은 자요, 받아들여진 자라는 것을.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는 또 다시 단조로운 일상으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오늘을 구별해 주셨다는 것을. 오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시간이라는 것을. 다시 시작할 날은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남편, 아빠, 과학자의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21세기를 들어 스마트폰은 버젓이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스마트폰 의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들기 직전, 그리고 하루 중, 예전 같으면 소위 '심심했을' 짬 시간의 모든 조각조각들 가운데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는 단짝은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 덕분에 테크놀로지가 하루 중 비어있는 모든 순간을 채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야금야금 우리의 습관을 형성해간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정말 마치 지루함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두려움 때문인 것일까. 어느 사순절 기간, 그녀는 스마트폰을 침대 곁에서 치워버리고, 대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정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과 묵상,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 것 아닌 그 행위 덕분에 얻은 유익을 나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작은 혼란 속에서 작은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 어질러진 집 안에 하나의 작은 공간, 질서가 잡힌 사각 공간이 생겼다. 신비롭게도 이 사각형은 나의 어지럽고 산만한 정신 안에도 작고 질서 잡힌 공간을 만들어냈다."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표방하는 세계관이나 특정 문화와는 상관없이, 검증되지 않은 매일의 습관들로 형성되어져 간다. 그녀 역시 이 통찰을 적극 동의하며 반복되고 단조로운 일상의 순간들이 가지는 의미에 신학적 성찰을 가한다. 반복성은 믿음의 리듬을 반영하는 것이며, 우리를 성숙시키는 훈련의 장은 바로 매일의 일상, 그 단조로움 안에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따끔하게 우리에게 도전도 가한다. 크고 즐겁고 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열망하는 문화에서, 침묵과 반복의 공간이 있는 삶을 일구는 것은 믿음의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나는 바로 그것이 일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작은 저항이라 믿는다. 거창한 대의를 위한 거창한 저항이 아닌, 아주 작고 작은 저항. 누군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혁명을 원한다. 아무도 설거지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깨달음처럼 나 역시 기독교 신앙의 일상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되었다. 아무리 혁명을 원하고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을 원해도, 설거지를 배우지 않고는 그것들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어진 3장에서는 이 닦는 사소한 행위에서 '유지와 보수'라는 저자의 신학적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단순한 유지 보수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며, 유한한 육체에 갇힌 우리 인간들의 한계와, 그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또 예배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저자는 그녀의 묵상을 조곤조곤 나누어준다. 특별히, 인간의 제한된 육체 안으로 들어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복음을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도 믿는다는 것에 대한 것의 의미와, 이성적으로 바르게 믿는 신앙을 넘어서는, 즉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예배의 실천에 대한 의미를 묵상한다. 몸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나도 존경하는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을 인용한다. "바닥에 엎드리지 않고도 기도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무릎 꿇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교회의 제도로서 기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려면 몸을 구부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도의 몸짓과 자세를 배우는 것은 기도를 배우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참으로 몸짓이 기도다." 몇 달째 나 역시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땐 누구나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남도 속이고 나도 속이는 그 교묘한 위장의 순간의 단점은 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문제는 생기게 되어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린 진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모든 순조로움이 멈추고, 통제력, 여유, 특권이 사라지고, 대신 궁핍함, 죄성, 신경증, 연약함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4장에서 저자는 바쁜 순간, 열쇠를 잃어버리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은혜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길을 잃었고 깨어진 존재였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분의 용서와 죄사함과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도와준다. 바로 회개와 믿음의 반복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속되는 일상의 리듬이자 호흡과도 같다는 것이다. 열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사건들이 우리의 성숙과 성화를 위한 기회라는 신학적 성찰을 저자는 전혀 고리타분하거나 가르치려는 듯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조용히 아주 설득력 있게 풀어준다. 이 책을 읽는 묘미일 것이다.


5장에서 저자는 먹다 남아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타코 수프를 먹는 행위에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요소, 즉 말씀과 성례전을 성찰한다. 두 가지 모두 음식처럼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요소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야 할 일 가운데서 어떤 특별하거나 거창한 행위가 아닌, 굳이 식사라는 평범한 행위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반복적 일상에 깃든 신비를 읽어낸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식사는 너무나도 평범하여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에서 곧장 사라져버리는 보통의 식사가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했다는 사실은 우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반복적이고 때론 지겹게까지 느껴졌던 식사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예배에서 말씀과 성례전 역시 매 주일마다 반복되는 (적어도 성공회 예배에서는 참이다) 순서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실제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그 조용하고 기억에 남지 않는 행위들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며,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인다고 말한다. 흥분, 모험, 흥미진진하거나 충격적인 영적 경험 등을 파는 많은 현대 기독교 예배는 우리를 금방 목이 타는 영적 경험의 소비자로 전락시키지만, 말씀과 성례전이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 예배는 우리의 정체성이 소비자가 아닌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역설한다. 전통적인 예전 안에 깃든 신비를 조금 맛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6장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는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사실, 나도 다를 바 없다. 나는 '아내에게 큰 소리치고 말과 글이 앞서는 몽상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큰 이념을 표방한다 해놓고서도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 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과의 다툼에서 저자는 '평화의 인사 건네기'와 '평화를 이루는 일상의 일'에 대해 묵상했던 것을 우리에게 나눠준다. 가장 가까운 이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도 세상을 위한 급진적 사랑을 부르짖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묵과하고 막연한 다수의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큰 소리치는 이들.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우리들의 현실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 없고 그 자체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사랑이 바로 땅 위에 존재하는 평화의 실체이며 일상에서 통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그리고 다음을 믿으라고 권한다. 믿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의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 그렇다. 내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소한 평화의 몸짓이 세상의 우주적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믿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메일을 싫어한다. 이메일은 그녀를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실패자라고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메일 확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거룩한 임무라고 고백한다. 노동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 즉 일과 신앙 혹은 삶과 신앙의 조화에 대한 저자의 성찰이 여기 7장에서는 소개되어 있다. 일과 성취감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에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일 안에서, 우리의 일을 통해 직업적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일하는 삶을 기도의 형태로 살아내도록 도와준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특히 베네딕트회 영성의 특징을 잘 대변해주는 로렌스 형제의 예를 들면서 말이다. 성과 속을 구별하는 것에 길들여진 보수 신앙인들은 마치 목회자가 시장에서 반찬 파는 직업을 가진 서민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목회자 스스로도 교회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일을 할 때면 마치 세속적인 일을 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도 믿는다. 거룩하다고 규정해놓은 일을 해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로서 성실히 일에 임하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저자가 싫어하는 이메일 확인 작업에서도 그녀는 거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혹은 속되다고 단정했던 일에서 우리는 거룩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일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우리의 직업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직업을 통해 행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장에서 저자는 시간 통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나눈다. 우린 모두 우리의 시간을 우리가 통제하며 산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은 반복된 습관과 무의식의 세계가 깊숙이 침투해있음을 알 수 있다. 통제는 보통 실행을 의미하지 기다림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 저자는 교통 체증 가운데 모든 것이 묶여있는 경험으로부터 인내와 소망을 읽어내고 그 인내와 소망은 부활에 근거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작전 개시일과 전승 기념일 사이의 삶으로 비유한다. 이미 가졌다 함도 아니고 아직 얻지 못했다 함도 아닌, 언제나 길 위에 서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소망하는 순례자.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중 하나임을 믿는다.


9장에서는 개인영성,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개인의 회심과 영적 성장에만 배타적으로 치우친 복음주의권 문화에 일침을 가하며, 저자는 기독교가 개인영성 뿐만이 아닌 한 민족을 부르시고 형성하시고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면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의미를 성찰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지 않았으며, 그분은 추종자들과 단지 개인적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셨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교회의 죄와 실패 안에서 어두움과 추함을 보는 그녀는 또한 하나님은 죄인들 한가운데서 구속과 회개와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다는 빛나는 소망도 본다. 그리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짚어준다. 손이 몸의 일부이듯, 나 역시 교회의 일부라는 것. 즉 내가 교회 안에서 죄를 볼 때, 나도 그 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나도 교회의 깨어짐에 한몫 거들고 있다는 것. 이 찔림에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이야기했듯, "우리가 함께 온전함을 이룰 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아멘.


10장과 11장에서는 각각 차를 마시고 쉼을 얻는 시간과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쉼은 연습이 필요하다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일상에 깃든 아름다운 작은 순간들에 주목하여, 그것들이 맞닿아있는 신성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우리들에게 제안한다. 쉼과 잠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의 단조로운 일상을 찾아오는 예기치 못한 기쁨. 그 기쁨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임재. 나도 그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뿐 아니라, 그 기쁨을 마음 설레며 기다리는 시간에서도 저자처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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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 고전산책 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안식하시길, 친구.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나는 가방에 보통 한 두 권의 책을 넣고 다닌다. 마침 어제 감상문을 하나 마무리하며 책 한 권을 끝낸터라, 오늘은 새로운 책을 하나 시작할 참이었다. 출근 전 습관처럼 책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심코 가방에 집어넣은 책이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몇 분 후 출근 길에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의 죽음은, 사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사실이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공간적 제약이 있었지만, 언제 한 번 만나 배드민턴도 치고 타코도 같이 먹기로 했었다. 그 약속을 한 게 바로 엊그저께였다. 나는 갓길에 차를 멈추고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 안에 든 책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책을 골랐을 무렵 이미 그는 하늘나라로 간 상태였지만, 난 그 책을 고른 나의 선택을 바보처럼 탓하고 있었다. 먼저 간 거라 믿네. 친구, 심왕찬. 부디 안식하시길.


같은 책도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공감도와 이해도가 달라진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나는 이 책을 읽어냈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그리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낸 두 사람이지만, 나에겐 책 속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현실 속 친구의 죽음이 겹쳐졌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고 존경받는 법조인으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그 역시 한 인간이었다. 그가 살아낸 삶은 우리네 평범한 삶과 다를 바 없었으며, 그가 맞이한 죽음도 특별할 게 없었다. 또한 이 책의 탁월한 점이라고 할 수 있고, 저자 톨스토이의 집필 의도도 엿볼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방관적이고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서도 난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인간 이야기였고, 모두 우리들의 이야기였으며, 또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신조는 대체로 ‘쉽게, 편하게, 점잖게’였다. 법조인의 바쁜 삶을 살아내면서 그는 사회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록 결혼 후 부부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개인주의적으로 해결해버렸다. 이러한 모습 또한 우리네 삶에서 흔하게 겪는 일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지나갔다. 모든 게 대단히 멋있었다. 그는 일 뿐 아니라 상류계층의 삶도 즐길 줄 알았다.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기뻐할 때는 브리지게임을 할 때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 이면에 놓인 인간의 공통적인 습성을 날카롭게 꼬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몸에 이상 징후를 발견한다. 아니, 벌써부터 느껴오던 것이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이었다. 맹장과 신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했다. 그 병은 그의 쉽고, 편하고, 점잖은 삶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몸이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자, 삶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브리지게임에서도 뭐가 잘 안 되면 금새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다. 그는 외로웠다. 능수능란하게 인간관계를 조절하며 그는 늘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병이 들자 그 관계들이 모두 위선과 거짓의 옷을 입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아내 조차도 남편의 병의 책임은 남편 자신에게 있고 자신은 남편의 병 때문에 죽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존재가 주변 사람들에게 장애물로 여겨지는 것 같은 기분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에게조차도. 비참했다. 톨스토이는 여기서 이렇게 쓴다. “그는 파멸의 끝자락에 서서 이해하고 동정해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버텨야 했다.”


공과 사를 탁월하게 구분했던 그도 통증이 점점 심해지자 직장 생활에서도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통증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한없이 절망했다. 그가 이뤄놓은 모든 삶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동안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은폐하며 파괴하던 자세가 죽음에 대한 저항의 행위로써 먹혀 들었으나, 하루하루 커지는 고통은 그마저도 전혀 작동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심이 오로지 과연 그가 곧 자리를 비워주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산 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 그리고 자신 스스로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 쏠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편과 모르핀이 없으면 잠을 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약 성분이 그의 정신을 잃게 만들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그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집사 역할을 하던 농부 출신의 게라심이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게라심에게서는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바로 거짓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는 게 명백한데도, 조금 아플 뿐이라는 거짓말,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거라는 거짓말 등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은 죽음에 이를 것임을 알았다. 그것도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 하나도 없이 홀로 말이다. 죽어갈 때 외로움은 가장 큰 고통임이 분명한 것 같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면서 이 책은 점점 그 혼자만의 관념적인 서술로 채워진다. 저자가 기술한 이반 일리치의 독백 중 내 마음에 꽂혔던 문장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쁨들은 더욱 부질없고 의혹투성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상 똑같았던 사람. 계속되면 될수록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 산에 오른다고 상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어. 그래 그랬던 거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그만큼 내 발아래에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다 끝났어.”


그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계속 피해왔던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혹시 내가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어서 그는 예전에 도저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즉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번 그 생각에 저항하고 반대하고 합리화를 해댔지만,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 와서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 직전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는 매 순간 아무리 기를 써도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에 조금식 다가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며 힘들어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그 구멍에 기어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더 힘들어한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다. 구멍에 기어들어가는 걸 방해하는 건 자신의 지난 삶이 괜찮았다는 인식이었다. 삶의 정당화는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아 그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 점이 그를 제일 힘들게 했다.”


그가 사망하기 한 시간 전,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그의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갖다대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족과 자신을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순간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음을 본다. 그로부터 두 시간 임종의 고통은 더 지속되었지만, 그 자신은 죽음에 이른 게 아니라 빛에 이른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마음 속 독백은 다음과 같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의 삶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보고 싶어하는 삶이었다. 부와 명예를 누리며 여유도 즐길 줄 아는 보기 좋은 삶. 그러나 그 삶은 온갖 위선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삶이었다.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에 높이 오른 사람들에게서 위선과 거짓의 힘을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미끄러져 내릴까, 아니면 피라미드 체제 자체가 무너질까.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진실을 대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삶을 통해서도 인간의 추악한 이기적인 습성을 넌지시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죽음을 통해서도 인간 내면의 모습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삶을 화려하고 보기 좋게 만들었던 것들이 거품이었다는 것. 살았을 때 자신이 주인공 자리에서 이용하고 누리던 그 편리했던 것들이 죽을 때에서야 거치장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도구가 된다는 것. 결국은 아무리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아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을 때와 같이 바닥의 심연에 이를 때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동정받길 바란다는 것. 톨스토이는 분명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깊은 구멍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있게 철학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전 세계의 모든 독자에 의해서 이반 일리치는 매일 매시간 또 죽는다. 그러나 나의 친구의 죽음은 단 한 번, 오늘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무리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도 현실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일반적인 답이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 그것도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답이 될 때가 많은 것이다. 친구를 생각한다. 그의 삶과 그의 죽음. 그를 통해 보았던 여러 나라의 사진들. 가족의 행복함. 생각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희열. 구독하여 종종 듣던 그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기타 연주.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을 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한 번 애도한다. 부디 거기서 안식하시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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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서양문학의 향기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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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인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포항 시골을 떠나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종종 습관대로 서면에 있던 대형 서점인 '동보서적'을 찾았다. 대학생이 된 나는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 코너가 아닌 문학 코너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었다. 그땐 소설보다는 시를 읽었고, 맘에 들면 그 시가 담긴 시집을 구매할 마음도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중학생 때 칼릴 지브란과 헤르만 헤세와 괴테를 읽으며 스며든 문학적 감성이 대학생이 된 나를 시집 코너로 인도했던 것이다.


1996년.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젊은 시인들이 낭만에 가득 차 저마다 부르짖는 사랑 노래를 시로 담아 책으로 만들었었다. 연애 편지에나 사용할법한 낯간지러운 시부터 시작해서 몇 번을 읽어야 비로소 무언가가 묵직하게 와 닿는 시까지, 시집 코너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집이 넘쳐났다. 이 책 저 책 내키는 대로 시를 읽어가다 보면 한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메뚜기처럼 그날도 이 시집 저 시집을 들춰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의 시에 사로잡혀 난 그 책을 끝내 구매하고야 말았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시인 이름은 똑똑히 기억이 난다. 릴케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뭔가가 달랐다. 굉장히 감성적이면서도 절제가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겉이 아닌 심층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릴케를 처음 만났다. 감수성이 여전히 예민했던 풋풋한 20대의 시작점에서 릴케를 만났던 건 행운이었다.


40대에 접어든 내가 저번 주말 중고 서점에서 우연히 릴케를 만났던 건 일종의 데자뷰였다. 언제나 중고 서점에 들르면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피는데, 마침 릴케의 책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순간, 시간이 멈추면서 내 기억은 20여 년 전으로 훌쩍 뛰어갔고, 동보서적 시집 코너에 서서 시집 한 권에 몰입해있던 과거의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혼자서 기분이 좋아 입가에 웃음이 걸린 채 그 책을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오른 릴케의 작품인데 시집이 아니라니 나도 처음엔 의아했었다. 그러나 릴케는 시나 산문보다 훨씬 많은 양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책은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라는 이름의 작가에게 릴케가 보낸 열 편의 편지를 모아놓은 작품이다.


카푸스는 문학 지망생이었다. 릴케와 같은 사관학교에 다녔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릴케의 시집에 몰입해 있던 중, 릴케가 학생일 때도 있었던 호라체크 목사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릴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카푸스는 자신이 쓴 습작 시들을 릴케에게 보내 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타고난 소질과 그가 가질 직업이 서로 어긋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무렵이었고 막 스무 살이 되려는 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카푸스는 단순히 그가 쓴 시에 대한 평가나 조언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닌 솔직한 인생 고민까지도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편지로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는 몇 주 후 릴케의 성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쓰인 답장을 받게 된다. 1903년 2월 17일 파리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그 후 열 번째 편지가 작성된 날짜는1908년 12월 26일이다. 약 5년 간의 기간 동안 주고 받은 편지, 그 안에 담긴 젊은 날의 무수한 고민과 좌절과 방랑의 여정. 그것들에 대한 인생의 선배이자 고독한 시인의 길을 꿋꿋이 먼저 간 릴케의 답장이 바로 이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릴케는 창작의 고통 중 마주해야만 하는 고독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삶과 죽음, 고독과 침묵, 그리고 그로부터 길어 올려 예술로 승화시킨 글, 곧 시의 언어. 무엇보다도 릴케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이니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권면한다.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것을 신뢰하고 매달리라고 말한다.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고 소박한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릴케가 가진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 릴케는 섣불리 서로가 하나가 되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경솔함을 넌지시 지적하며, 개개인이 먼저 성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간다. 릴케의 시집이 왜 20대의 나를 사로잡았었는지, 왜 막 스무 살이 되려던 카푸스를 사로잡았었는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독 가운데,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지속된 훈련으로 스스로 몸과 영혼을 다진 뒤, 그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릴케의 사색과 성찰. 그리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시. 아마도 나와 카푸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가진 고민에 릴케의 시가 나름대로의 해답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만간 정말 오랜만에 릴케의 시집을 하나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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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뮈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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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저,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기괴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주인공이 쪄들어 냄새가 날 것 같은 부랑자였기 때문이었거나, 하마터면 철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나 수준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복을 거부하지만 또 반복되고야 마는, 그리고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그들의 허무한 삶 때문도 아니었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일상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쓴 나물을 먹은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얼른 깨끗하게 샤워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문득 그들이 갇혔던 일상이 우리 인간들의 실존적인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기괴하기만 했던 기분은 금새, 겉으론 우스꽝스럽지만 속으론 아주 깊고 묵직하게 내면을 터치당했다는 기분으로 바뀌었다.


책 전체엔 허무함이 줄줄 흐른다. 신물 나고 진절머리가 나지만 탈출할 수도 없는 그들의 일상은 마치 오래 빨지 않고 주구장창 써온 모자나, 벗어서 겨우 바람에 말리는 정도의 관리만 해서 고약한 냄새가 풀풀 풍겨나는 구두 속 땀과 함께 엉겨 붙은 이물질처럼, 이미 그들 자신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상, 그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절망적이다 못해 절망 자체가 그들의 호흡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도를 기다리며 그 시간을 때우는 것 밖엔 없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이 책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허무한 삶에 그나마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도 된다.


기다림에 지쳐 순간순간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할 때조차도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 이미 허무와 절망과 한 몸이 된 그들에게 있어선 일종의 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그 기다림은 또한 그들을 유일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마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와 악으로 물들어버린,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의 마음 중심에서도 여전히 무언가 구원을 바라는 본능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자신의 책에서 신을 찾지 말라는 말까지 남긴 사무엘 베케트였지만, 난 이 책에서 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구원과 해방의 길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매일 기다려도 오지 않고 고작 전령인 소년을 보내어 다음을 기약하는 "고도"라는 존재는 어쩌면 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도에게 전할 말이 없냐고 물어보는 소년은 인간의 기도를 담아가는 천사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에게 자기들을 만났다고만 고도에게 전하라고 하는 두 주인공의 메시지는 절망 속에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실존을 전하는 것 같았다.


2차 세계대전 가운데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나치를 피해 숨어 지내는 동안 피난민들과 대화를 나눈 경험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는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의 정체를 포함한 이 책에 대한 해석을 전혀 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남겨 두었지만, 아마도 그는 그가 겪은 인생의 부조리를 통해서 궁극적인 인간의 삶의 의미를, 비록 절망적인 현실 속이지만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기다림"에서 찾으려고 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의 모습이나 끊임없이 질적 변증을 통해 주체적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실존주의적인 그의 인간관과도 맞닿아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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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전원 교향곡 -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을유세계문학전집 24
앙드레 지드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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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다시 읽고.


책에 몰입을 해보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만나기 전까진 독서하며 한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의 도움으로 "데미안"을 읽게 되면서 문학세계에 들어왔던 나는 문학고전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당최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단테의 신곡, 책보단 짧은 연극을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던 괴테의 파우스트, 지루하기만 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길고 난해하여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마칠 수 있었던 도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도, 뭔지 모를 의무감 반 호기심 반으로 읽어냈다. 내가 "좁은문"을 읽었던 시기가 그 어려운 책들을 읽고 난 이후인지 읽기 전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히 내 뇌리에 박힌 기억은 내가, 이 싸나이 김영웅이 독서하면서 울어버린 사건이었다. 그렇다. 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책의 앞 색지에다가 내가 처음으로 울었던 책이라고 써놨었던 것 같다.


데미안에 이어, 나이 마흔에 시작한 나의 고전 다시 읽기 시리즈의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었다. 베드타임 스토리로 Calendar mystery 시리즈 중 September 편을 아들에게 끝까지 다 읽어주고 나서 느꼈던 깔끔함 때문이었을까. 아들을 재우고 나니, 퇴근 길 기차 안에서 읽다가 만 챕터의 나머지 부분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챕터까지만 다 읽고 자려고 했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유일한 책이었던 탓일까. 지속되는 알리사의 편지와 제롬이 묘사하는 그녀의 이미지, 그리고 곧 닥쳐올 둘 사이의 비극이 너무나도 선명해져, 난 결국 알리사의 죽음을 두 번째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고, 또다시 비탄에 잠긴 채 겨우겨우 책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녀가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이다. 25년간 잊혀지지 않았던 문장. 심호흡을 했다. 비록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감정의 폭풍같은 것이 내 전신을 감쌌다. 시계는 벌써 자정을 가리켰지만 당장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하녀가 등불을 들고 오기 전에 조금만 더 그 책 안에 있고 싶었다. 정리되지는 않지만 불현듯 마음 깊은 곳을 터치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그렇게 한동안 나 자신을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왈칵 터져나오는 감정의 북받침이 책 곳곳에 나오지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이기만 하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차례의 감정의 폭풍 또한 고요함 가운데 있다. 고요한 폭풍이랄까. 그리고 책에 지속적으로 흐르는 또 다른 기운은 슬픔이다. 고요함과 슬픔. 아, 좁은문을 통과하는 길은 고요하고도 슬픈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


25년 전에, 알리사의 죽음과 살아남은 제롬을 생각하며 눈물을 터뜨렸던 건, 어쩌면 내가 신앙이라는 게 무엇인지 지금보다 많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해석해 본다. 지금도 그때처럼 책을 다 이해할 순 없다.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왜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적이 되어야만 하는지, 난 아직도 명쾌하게 답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라는 것은 분명 15살의 청소년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며 아련함과 순수함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그 아련함과 순수함의 출처가 무지일 수도 있겠다는, 참 재수없고도 늙어빠진 생각을 하게 된다.


알리사의 성스러운 길을 가고자 하는 그 고결한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마흔 살의 나는 한편으로 알리사를 책망한다. 비록 알리사가 병에 걸려 죽게 되어 그 이상 깊게 논쟁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알리사가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분명히 망설이지 않고 바보라고 말해주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더 밝히 인도받는 것이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라면, 어찌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있냐고 난 따질 테다. 그 좁은문은 결코 한 사람만 지나칠 수 있는 "종착역'의 의미보다는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 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들어가야만 하는 "시작점"의 의미이지 않겠냐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당장 그 볼품없는 어설픈 연극을 그만 두라고 큰 소리로 권유해볼 테다. 그 성스러운 길을 가는 길이 고행과 고독과 외로움으로만 가득 채워져야만 하는 거냐고, 왜 사랑하는 사람과 두 손 붙잡고 갈 수 없는 거냐고, 정 길이 좁다면 사랑하는 사람 등에 업혀서 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외쳐볼 테다.


하지만, 25년 전에도 그랬듯이 알리사는 혼자 요양원에서 외로이 죽어갔다. 그것은 스스로 준비한 죽음이었다. 의도적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갔다. 난 너무 속이 상했다.


제롬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알리사가 그렇게 매몰찬 연극을 해가면서까지 제롬으로부터의 사랑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시도들이, 마흔살의 내 눈엔 부질없고 어리석게도 보인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다. 아, 25년간 내가 너무 늙어버렸나. 나도 모르게 내가 어릴 적 그다지도 싫어했던 뭇 아저씨의 버릇없고 영혼없는 논리로 색안경을 끼고 잔소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면서 난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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