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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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낸다는 것.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신성모독과 음담패설 등이 취미인 것 같은 망나니, 육욕에 충만하여 정신적 세계를 단박에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방탕한 이단, 말초적 쾌락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 된듯한 그에게서 왜 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떠올렸던 것일까. 성육신이야말로 그가 말로 주장하고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들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거룩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바로 여기에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숨은 역설이 담겨있는 건 아닐까?


'나'라는 화자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은 '조르바'이다. 이 책은 화자가 조르바를 만나면서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정신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와의 이별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친구는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책을 버리고 삶을 택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떠안고 친구는 카프카스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결국 그 친구는 동포를 구하고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비겁했던 것일까? 이별 장면에서 기억하는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 속에서 ‘나’를 송곳처럼 찔러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던 말은 ‘책벌레’였다. ‘나’는 그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나’는 결심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남겨준, 크레타 섬에 위치한 갈탄광으로 향한다. 그러나 책과 집필도구는 챙겨서 간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도 일생일대의 큰 결단이었다.


조르바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그 레스토랑에서 조르바는 운명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조르바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호탕한 기인이었다.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기로 작정했다. 마침 그는 탄광에서 광부로서의 경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표현해도 조르바를 모두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는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이별했던 친구가 ‘나’에게 어떤 자극제 역할을 했다면, 조르바는 이미 그 길의 목적지에 도달해있는 사람이자 그 길의 완성인 것 같았다. ‘나’의 구원을 찾아나선 여정에서 그는 그 자체로서 답이었다.


400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와 함께 했던 시기에 대한 회고다. 책의 말미에서도 언급되지만, ‘나’는 조르바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의 조르바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조르바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자유를 통해 성숙해지고 풍성해진, 어쩌면 그 많고 많은 책으로부터도 얻지 못했던 해방과 일종의 구원 과정에서부터 얻은 절절한 내면의 변화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있다.


내가 이 광기어린 기인, 조르바와 화자인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생각났던 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중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나’에게 대입했다. 그리고 ‘나’의 눈으로 조르바를 보고 느꼈다 (저자가 ‘나’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아마 이 때문은 아닐까? 독자들이 그가 직접 겪은 조르바를 느껴보라고). 조르바는 슬플 때 소처럼 울 줄 알았고, 기쁠 땐 미친 놈처럼 춤을 출 줄도 알았으며, 영혼의 깊숙한 곳이 터치될 땐 산투르를 연주하여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크레타 섬의 주민들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워 죽여버린 과부를 보호하려 몸을 던졌던 유일한 인간이었으며, 그의 부불리나였던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 앞에서 유일하게 애도를 표하며 슬퍼했던 인간이었으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수도승들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내어 조롱했던 대담하고 예리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밤하늘의 별과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도 예민하게, 마치 처음 그 창조물들을 대하는듯한 자세로 반응했던 인간이었다. 인생의 허다한 경험들을 뒤로 하고 그것을 내던져버리지 않고 그 속에서 진주를 찾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철학을 만들어내었던 인물이었다. 실로 그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식과 지혜를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체득하여 실제 삶을 살아내는 자였던 것이다.


내가 가진 신앙을 바라본다. 말과 글로 도배된 많은 부분들이 보이고, 거기로부터 깨닫고 기뻐하는 작은 몸부림조차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고 머리과 가슴에 갇혀버린 처량한 내 꼴이 보인다. 난 과연 왜 책을 읽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깨달음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려는 결단으로 새로이 시작한 나의 삶과 신앙의 여정은 책 속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가졌고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라고 여겼던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 여정 가운데 이 책을 만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매일 새롭게 도약하는 것이다. 신학책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 신학을 본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인간을 알게되고, 인간을 알게되면서 하나님을 본다. 살아낸다는 것, 머리와 가슴을 찔러 깊은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쏟아낸다해도 일상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억눌린 자들을 돌보지 못한 채 고상한 교회 은어들을 사용해대며 까불어대고, 고작 한다는 신앙의 행위가 개인의 번영과 안녕만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과 악마가 하나라고 함부로 지껄였지만 일상적 삶에선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낸 (어쩌면 예수의 삶을 살아낸) 조르바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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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기쁨 믿음의 글들 19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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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를 넘어서는 은혜.


C. S. Lewis 저, ‘예기치 못한 기쁨 (원제: Surprised by Joy)’을 읽고.


기독교 변증가로 잘 알려진 C. S. Lewis의 삶이 온통 기독교적인 색채들, 이를테면 말씀 듣고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행위들로 가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허다한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그이지만, 실상 그는 목사나 신학자도 아닐 뿐더러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적부터 신앙심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었기에 북아일랜드의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을 뿐, 머리가 조금씩 크면서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대학으로 복귀한 몇 년 후 그는 유신론자가 되었고, 얼마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회심 이후 그는 끝까지 성공회 신자였다). 루이스가 57세가 되던 해에 (생을 마치기 6년 전) 출판된 이 자서전과도 같은 책은 이러한 그의 신앙의 여정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책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년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약 300페이지 안에 모두 담으려면 많은 내용을 빼야만 한다. 그러는 와중에 중요하다 생각되는 사건들은 강조도 해야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형식으로 잘 짜여있다. 논리정연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는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예기치 못한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학창 시절의 그는 마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결코 무난하거나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릴적부터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아왔는데 (그는 북유럽 신화들을 비롯해 많은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기질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것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인간이 모인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거기엔 계급 의식이 물들어있는 법이며, 일반적으로 그 안에선 진실을 은폐하거나 교묘하게 위장하는 방법을 통해 충분히 사교적이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인 속성을 겸비한 인간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기 마련이다. 루이스가 다닌 학교의 분위기가 이 책에선 꽤 자세히 강조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그가 그 시절 적지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그 당시 계급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분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비로소 안정적으로 학문적 성장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서도 여러 번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를 사용하는 것을 봐도 그의 독특한 (이기적으로 보이면서도 남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즉 다분히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학습받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저 그렇게 주어진 모습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게끔 지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 그는 운동과 수학에 젬병이었으며, 오로지 앉아서 혼자 글을 읽고 쓰고 상상하고, 시간에 맞추어 적당한 산책을 즐기고 일찍 잠드는, 고독한 일상을 좋아했던, 천성적인 학자이자 작가였던 것이다.


어릴적부터 종종 그를 예기치 않게 찾아왔고 스스로 ‘기쁨’이라 불렀던 순간을 어른이 되어서도 늘 갈망하곤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이후에 그는 그 ‘기쁨’을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로 여기게 된다. 그 ‘기쁨’은 무언가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갈망 비슷한 것이었는데, 모태신앙으로 자라다가 염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다시 어떤 절대적이며 정신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게 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 ‘기쁨’은 그 자체가 참 기쁨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과,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그 ‘기쁨’이 바라고 가리키고 또 그 ‘기쁨’의 근원이기도 한 대상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간파하게 된다. 참 기쁨은 우리 인간을 흥분, 고조시키며 환희로 다가오는 어떠한 감정이나 마음 상태에 있지 않다. 비록 그것이 평상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의 실체는 참 기쁨의 흔적이며 껍데기일 뿐이다.


사실 난 논리와 변증에 능한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무척 궁금했다. 그 과정 또한 논리정연하고, 누가 들어도 납득이 될만한 이유와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기대는 책의 말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루이스 스스로 자기도 잘 설명할 수 없고 잘 모른다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부분에서 실망감을 느꼈었지만 (사실 300페이지 분량의, 그것도 나와 별 상관없는 개인사를 읽어나가는 건 마냥 흥미진진하진 않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 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무신론자에서 시작해 교회만 다니는 유신론자였다가 철이 좀 들어서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고, 그 과정을 지금까지 납득이 될만하게 설명한 사람은 간증 사기꾼 빼고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론 그동안에도 많이 생각해봤다), 그건 논리적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가장 솔직한 고백이 아닌가 한다. 은혜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정의했던 ‘기쁨’은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오는 감정으로도 나타나고, 어떠한 지적인 깨달음을 얻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로도 나타나며, 아주 가끔씩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들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적과도 같아서 그 일련의 순간들과 사건들은 한결같이 모두 어떤 하나의 대상을 가르킨다. 바로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존재, 그리고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바로 그 존재,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인 것이다.


루이스 덕분에 나도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이 기쁨에 국한되지 않고 난 내 일상에 일어나는 소소한 기쁨들의 근원을 더욱 앙망한다. 루이스라는 거장 덕분에 불필요한 곁길 하나를 걷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흡족하다. 그의 진솔한 회심기 덕분에 오히려 일방적이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별 볼일 없는 내 삶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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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엽 2021-04-30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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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새로운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 언뜻 봐도 짝이 맞지 않는다. 남학생 하나가 남기 떄문이다. 또 하나, 공교롭게도, 다섯 중 하나만 자신의 이름에 색이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이름에 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들어있다. 레드, 블루, 화이트, 블랙. 그러나 그의 이름에만 색이 없다. 그의 이름은 다자키 쓰쿠루. 색채가 없는 이름이다. 운명이었을까. 대학에 진학할 무렵, 다섯 명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고 유지되었던 도시 나고야를 떠나 그는 홀로 도쿄로 진학하게 된다. 그 결과, 나고야엔 다섯이 아닌, 넷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교 2학년이 되기까진 공간만 떨어져있을 뿐 모든 게 똑같다고 여겨졌다.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오면 넷은 여느 때처럼 그를 반겨주었고, 마치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다시 다섯이 되었으며, 그래서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넷 중 하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미안하지만 이제 더는 누구의 집에도 전화를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그는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스스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모호한 말밖에 없었다. 전화는 끊어졌고, 그 순간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은 넷과 하나로 분열됐다. 그리고 그 분열은 16년간 지속된다. 원인을 모른 채로. 아니, 원인을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 아니, 그런 시도조차 감히 할 수 없었던 채로.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중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손에 집어 들었던 건, 어쩌면 내 몸이 보낸 절박한 STOP 사인에 반응한 나의 구체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암묵적으로 내 몸이 보내온 일종의 신호를 나의 무의식이 해독한 뒤, 의식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나의 행동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을까.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기차의 엔진도 쉼이 필요하듯, 나의 머리와 나의 마음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깊은 통찰로 인한 깨달음도 하루 이틀을 넘겨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면역이 생기는 법이다. 인간의 익숙해짐이란 교활한 돼지와도 같아서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단 몇 차례면 그새 다시 새로운 영점을 가지게 되고, 더 좋은 음식을 탐하기 마련이다. 마치 한 번도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감사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늘 배고프고 불만에 가득 찬 채, 불평만 해대게 된다. 통찰이 성찰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이유다.

이럴 때면 난 늘 해독제로써 누군가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접한다. 보통은 읽는 것으로 의외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곤 한다. 정갈한 문장으로 가득 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이에 아주 적합한 소재다. 비록 소설이지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일상적인 이야기.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엔 자유와 여유가 깃든다. 타자를 공감하는 일은 언제나 나 자신의 세상에 갇히는 위험에서 빠져 나오거나 미연에 방지해주는 좋은 해독제가 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 명의 공동체에서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배제 당한 뒤 수개월 간 죽음에게 온통 마음과 생각을 빼앗겼다. 그러나 어느 날 꾼 꿈을 계기로 그는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한층 성숙하고 새로운 자아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여전히 그때의 일이 마음의 걸림돌이었다. 다행히도, 사라를 만난 후 그 응어리는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16년이나 지난 현재, 쓰쿠루에게서 여전히 어딘가 묶여 있는 듯한 모습을 간파한 사라는 그에게 네 명의 이름과 기본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쓰쿠루가 감히 용기내지 못했던 일들을 수 일만에 해낸다. 현재 그들이 사는 곳과 일하는 곳, 가정의 현황 등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에게 내민다. 그 다음은 쓰쿠루의 차례였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들을 만나보기로 작정한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그와 한 명씩 만나는 그들 간의 재회를 통해 그때 그 일의 진상과 그 진상 이면에 감춰졌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다섯 중 하나, 시로의 마음에 생겨났던 상처를 가늠하며 자신이 왜 배제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해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고야는 물론 핀란드까지 직접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게 되는 쓰쿠루. 거기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사정이 있었다. 그가 배제되어야만 했던 이유. 그 정황. 비록 못내 아쉬운 부분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시로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기에, 쓰쿠루는 살아남은 셋과 회포를 풀며 정면으로 과거에 맞서서 16년 간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문제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다. 물론 이때의 해방이란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잘려나간 것들을 보내주고 틀어졌던 마음을 바로잡으며 서로 간의 오해를 해결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때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던 그 무언가가 어느 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쑥 잘려나가게 되는 경험. 그 경험이 남긴 흔적, 죽음의 냄새까지 맡을 정도로 깊숙했던 마음의 상흔.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이런 미해결의 문제들을 한 두 개씩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석연찮은 일의 잔재들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 꼿꼿이 남아서 어느 순간 그때와 비슷한 정황에 처해질 때마다 유령처럼 불쑥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진 않는가.

한편, 사라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 그렇게 형편없을 만큼 불공평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를 찾아주는 사람도 있다. 아픔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아픔을 치유해주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 참 고마운 사람. 그건 분명 은혜일 것이다. 언제나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다. 자꾸만 안으로 침잠하려는 자아에 거스르는 희망의 빛. 진정한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유령으로부터 피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서 매듭을 지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닐까. 단순히 그 일이 생기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치유와 회복은 '과거의 나'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음 속 교통 정리랄까. 조그만 상처에도 필요없이 부풀어오른 딱지를 제거하는 작업이랄까. 외부의 도움으로 인해 과거의 자아와 마주하여 치유를 받고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이야기.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양장본인 이 책을 감싸고 있는 컬러풀한 껍데기를 벗기면, 무채색의 하드커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알고 보니 그는 색채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색채가 없었던 게 아니라, 색채를 가진 이들과의 진정한 교류를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 관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다면, 그 어떤 아름다운 색채도 무채색으로 변색되어 버리지 않을까. 색채가 있든 없든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사라를 만나고 쓰쿠루는 그제서야 그런 관계를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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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죄 -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올바른’ 믿음보다 신뢰를 원하는가?
피터 엔즈 지음,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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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엔즈 저, '확신의 죄'를 읽고.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고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이다.


이 방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사로서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처절한 인지부조화와 복합적인 합리화로 가득 찬 위선적인 자기기만, 그리고 파멸이다. 이 결말은 이 책의 저자, 피터 엔즈가 정의하는 '확신의 죄'의 열매가 아닐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교회 목사의 진공 포장된 설교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세계를 경험하면서 의심의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반석과도 같았던 안전지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 바로 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심의 씨가 우리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 속수무책으로 자라나면서 그 동안 믿어왔고 확신해왔던 세계는 소리 없이 은밀히 함몰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내면세계의 비가역적 붕괴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피터 엔즈는 말한다. 퓨즈가 끊어지고 믿음이 멈추는, 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순간들을 통과하도록 묵묵히 인도하신다고. 아멘. 그렇다. 의심은 신앙생활의 적이 아니라 주요 요소이며, 의심과 신뢰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비로소 예수를 닮는 삶을 현실에서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믿음과 의심,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는 지혜로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의 시작이요 과정이자 끝"이라고 한다. 그는 확신을 추구하고 고수하는 신앙생활의 위험을 간파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은 올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역설하는데, 그는 이를 '확신의 죄'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태도가 '죄'인 이유는, 우리가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지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우상 숭배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선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불청객, 의심을 환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부분이라 쓰고 '모든'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게 된 건 사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 회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존재했었다면, 그 많은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들은 모두 퇴색되어 버렸을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연습을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신비’ 이외에 적당한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 예수를 닮는 삶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내는 과정 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성이 우리를 배신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신뢰. 그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만 가득 찬 믿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신앙,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깔끔한 신앙,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우리 자아에게 모든 통제권을 재부여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역했던 죄인의 옛자아가 적절히 타협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타인들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있고 인자하며 친절한, 모든 일상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만큼 비겁하거나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드는 것처럼, 시편과 전도서, 그리고 욥기에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어쩌면 당돌하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구약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많이 담겨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무사안일, 안빈낙도는 기도제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구약 기자들이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나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피터 엔즈가 말한 것처럼 “어쨌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신뢰하는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넘어서 우리 삶에 지속되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부로 포용하여, 확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확실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의 이성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통제권을 일체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지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길들일 것이고, 의심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성한 손님이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9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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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의 기도 - 개정판
김영봉 지음 / IVP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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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 사귐이 있는가?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몇 달이나 꽂혀 있었을까. 며칠 전, 새롭게 읽을 책을 하나 고르려고 뻔한 내 책장을 찬찬히 훑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눈은 김영봉 목사의 ‘사귐의 기도’에서 멈췄다.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이후 책장에 꽂아두고 한 번도 끄집어낸 적이 없던 책이었다. 항상 다른 책에 우선순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나로선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던 경험이라, 책을 꺼내어 앞부분을 들춰보다가 순식간에 수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잠시 책을 덮고 조용히 묵상하며 나의 내면세계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되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고질적으로 영과 육을 나누는, 공식화된 이분법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의 책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사적인 복음의 충만함이 결코 공적인 복음으로 자연스레 넘쳐 흐른다거나, 누적포인트 전환하듯 바꿀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신앙의 본질이자 전부라고 여겼던 '개인 영성'을 위한 책들과는 부지 중에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책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가진 복음이 오로지 개인적인 경건함과 성숙함만을 향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함몰되어, 내가 아닌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타자들을 돌아보는 눈을 다시 잃게 될까 두려웠고, 개인 간의 거짓과 위선이 아닌 구조적인 불의와 악습 같은 것들로부터 저항하는 마음 보다는 그저 참고 견뎌내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듯한 삶을 또 다시 맹목적으로 살아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24시간 예수 바라보기로 대표되는 개인 영성을 강조하다 보면, 희생자의 희생과 견뎌낸 자의 수고함을 치하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희생하고 견뎌내는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와 응원도 아끼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진 너무나 좋다. 그러나 그러한 불필요한 희생과 견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놓치기 쉽다는 점이 간과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체제로 발현하는 사탄의 모습을 대적하기는 커녕 용인해주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사탄은 "영적"인 존재에 국한되어야 할뿐, 가시적인 체제로 드러나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한 신앙은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적극적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 자체를 불경하게 여긴다거나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여기는 경향까지도 갖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개인은 피해자나 희생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어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시스템, 즉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인 부조리를 인정하고 합리화시켜 버리는 역할까지도 충실히 해낸다 (비록 뜻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오로지 개인의 평안을 더 도모하고 의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서, 어쨌거나 그 역경을 견뎌내도록 개인을 유도한다. 또한, 세상은 장망성이기 때문에 그저 그런 시련 속에서 꾸준히 경건함과 성숙함을 도모하여 죽기까지 지속할 것을 가장 큰 사명이자 신앙의 유일한 지향점이라고 판단하도록 간접적으로 조장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렇게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구조를 인정하고 아무런 저항이나 참여를 거부하면서 개인의 영적 상태만을 돌보는 행위가 과연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까? 거짓과 불의에 분노하거나 저항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참고 견대내면서도 묵묵히 바보처럼 착하고 바르게 살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과연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일까? 과연 그 모습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고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일까?

머리가 커지면서 여전히 개인 경건과 성숙에 함몰되어 있는 목사들의 설교를 언젠가부터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교만한 자로 낙인 찍고 속으로는 온갖 정죄를 단행하면서도, 겉으론 마치 사려 깊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곤 했다.

유전자의 기능을 생체 내에서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해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물처럼 공기처럼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보면 그 공간이 가진 편협함과 가식과 위선으로 오염된 모습과 더불어 조금은 더 객관적인 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안에서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고 거기에 맞는 설교를 공급받으며 살아갈 땐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순수함은 배타적인 분리의 칼이 되었고, 그들의 열심은 더 큰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게 막는 눈가리개가 되어주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 칼과 눈가리개로 훌륭하게 무장한 인간이 사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왔던 주된 세력의 실체 아닌가. 어쩌면 개독교라는 말을 잉태한 산모 역할을 담당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즉 개인 영성으로의 치우침은 초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하나님나라의 모습과는 (믿지 않는 자들이 봐도 충분히 알 만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개인 영성 훈련 관련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정치학적인 인간사회라는 현장과는 무관한, 마치 진공 속과도 같은 공간에서만 이뤄질 것 같은 가르침들을 계속 그런 책들을 통해 공급받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르침들과 내가 일상으로 살아내는 현실과의 간극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그 괴리감은 이내 내게 죄책감으로 작용했으며, 그 죄책감을 나는 또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부족해서 그렇구나.'라는 말로 어떻게든 이해하고 합리화하려는 나의 몸부림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년법은 사적인 복음보다는 복음의 공공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난이 되물림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법을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큰 두 기둥인 정의 (미슈파트)와 공의 (쩨다카)를 근간으로 하여,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헤세드)의 실현이 바로 희년법의 의미 아니었던가. 예수의 핵심 사상 역시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라고 나는 믿는다. 구약이 그저 배경이 되는 신약이 아닌, 구약을 전제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더 크고 풍성하며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말씀이 바로 성경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 24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언제나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법. 24시간, 아니 25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한다고 해서 희년법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법이 아름답게 표현된 실체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복음의 공공성을 함께 모여 추구하는 것이 타당한 수순 아니겠는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진행되고, 다시 난 책을 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내 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공적 복음의 중요성을 외치는 것까진 좋지만, 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똑바른가 하는 질문. 억압받는 타자에게 자유가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들이 바라는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어떻게든 성취가 되게 해주려고 도와주는 일이 과연 복음의 전부인가 하는 질문. 아무래도 사회정의 실현과 약자들을 돕는 일 쪽으로 알아가다 보면,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고, 해서 뭐하나 하는 체념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게 인생이려니 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인이 되어간다. 예수는 서서히 증발되고 예수가 했을법한 행위들만 남아 복음을 실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억압된 자가 해방되고, 가난한 자가 구제 받는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땐 보람과 희열도 느끼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억압받고 소외 당한 무수히 많은 약자들을 생각할 때면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그러면 감사와 기쁨은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내 삶을 다 바쳐도 구제하지 못할 약자들의 부르짖음 소리에 눌리고 만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이 아닌 예수의 공생애 기간 때의 행적들을 좇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아내려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그 끝은 여느 인간 지혜자가 도달하는 최종결론처럼 '삶의 무의미함'이 되어버린다.

우익의 복음에 천착한 삶에서 염증을 느꼈지만, 좌익의 복음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몸부림에서는 허무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 그 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을까. 예수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존재 자체가 나와 함께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하나님과의 사귐이 내게 있는가. 그것으로 나는 기뻐하는가. 감사해 하는가. 혹시 그것 없이 내가 참여하고 도운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함으로만 나의 훈장을 하나씩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썩어질 면류관을 난 사모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예수의 사상과 행적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명분 하에 결국 내가 했던 건 예수를 증발시키고 나의 행위만을 남기는 짓을 하진 않았을까.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계된 모든 질문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거룩한 시간과 공간. 그래서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웃을 향한 사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가.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이 책을 가능한 천천히 읽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의 내용보다는 이러한 질문으로 묵상하며 성찰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좌우에 치우친 복음이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지만, 언제나 이런 점검을 하며 앞길을 내디딜 수 있기를.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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