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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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누나가 들려주는 것만 같은 재미난 인류 이야기.


이상희 (이상희 (Sang-Hee Lee)) 저, '인류의 기원'을 읽고.


기원 논쟁처럼 다분야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아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화제 거리가 되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우주의 기원, 생명의 기원, 그리고 인류의 기원을 묻는 건 인간 역사에 있어서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질문이지만, 여전히 거기엔 답이 없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타당하게 설명이 가능한 가설이 있을 뿐이다. 그 가설은 신학적인 입장에선 믿음으로 불리기도 하고, 철학적인 입장에선 하나의 인식 체계가 되기도 하며, 과학적인 입장에선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기도 한다.


'인류의 기원'을 제목으로 하는 이 책 역시 인류의 기원을 알려주지 않는다.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고인류학자인 저자는 관찰, 비교, 분석 등의 과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밝혀진 굵직굵직한 여러 가설들을 재미있는 일상적인 소재를 동원하여 대중적인 언어로 친절하고 쉽게 알려주며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옆집 누나가 동네 친구들 모아놓고 옛날 이야기 들려주는 것만 같은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총 스물 두 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진 이 책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단편의 이야기들을 스물 두 번을 듣고 나면, 어느덧 인류의 기원에 대해 역사적으로 논의되어진 흐름을 대략 꿸 수 있다. 따분한 역사를 재미난 만화를 통해 배울 수 있었던 '먼 나라 이웃 나라'의 고인류학 버전이랄까. 책을 읽다 보면 진지해질 때도 있고, 가끔은 공포스러워질 때도 있으며, 또 웃을 수밖에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러는 와중에 전문적인 지식을 기본적으로나마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는 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효용일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3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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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고정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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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오만과 편견의 해체.


제인 오스틴 저, ‘오만과 편견’을 읽고.


오만함은 숨겨진 나르시시즘의 발현이자, 타자에게 비쳐진 나르시시즘의 거울상이다. 인간의 자신감은 자주 도도함으로, 도도함은 오만함으로 진화한다.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의 표출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감 상실을 거쳐 자기비하로 치닫는 경우 역시 또 다른 자기파멸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신감을 가지고 또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겸손한 자신감이 오랫동안 디디고 서있을 자리는 너무나도 좁다. 게다가 그 좁은 길 양쪽으론 파멸의 강이 버젓이 흐른다. 우린 과연 살면서 발을 헛디디지 않고, 파멸의 강에 익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대접받아왔고, 대접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성인의 경우, 게다가 사교성까지 부족할 경우, 타인으로부터 오만함의 명예를 입을 가능성은 현저히 높아진다. 그러나 이때, 오만과는 다른 어떤 한 힘이 위력을 떨칠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편견이다. 


편견에게 있어 오만함만큼 적당한 파트너는 없다. 결국 오해로 판정될 주관적 선입견은 차후에 발생하는 많은 증거들의 선택과 조작, 인멸을 유도하며, 나아가 편견은 자신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며 또 적극 수호하게끔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이 오만하다는 편견을 가지게 될 경우, 그 편견의 눈에는 오만함을 뒷받침하는 증거만이 보이게 된다. 또한 오만의 눈에도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편견의 존재가 결코 탐탁지 않다. 오만과 편견 사이에는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른다. 그 강의 존재는 서로를 더욱 증폭시켜 궁극적인 자폭을 유도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뜻밖의 사건은 발생하고야 말고, 그 사건은 삶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온다. 인생이 신비인 이유는 어쩌면 예상 밖의 일들이 만들어내는 향연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 오만함의 역을 맡았던 '다아시'와 편견을 맡았던 '엘리자베스' 사이에도 처음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깊고 넓은 강이 흘렀다. 그러나 그 어두운 강에도 서광이 찾아왔다. 엘리자베스를 가득 채웠던 다아시를 향한 혐오는 결국 오해로 인한 편견이었음이 밝혀지고,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베넷 가 모두에게 오해되었던 다아시의 오만함의 실체는 겸손한 자신감과 깊은 이해심을 동반한 자상하고 사려 깊은 배려심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둘 사이엔 진정한 사랑이 흘러 들어 결국 둘은 하나가 된다. 


이 책은 오만과 편견의 악한 파트너십이 점차 상쇄되어가는 아름답고 놀라운 과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쓰여진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고 우아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많은 남성 작가들이 쓴 내러티브와는 또 다른 신선한 느낌을 준다. 나는 이 책을 많은 남성 독자들에게 특별히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는 누구에게라도 존재할 오만과 편견이 깨어지고 그 자리에 진정한 사랑이 잦아들길 바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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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 - 선교적 삶과 비즈니스 선교
김진수 지음 / 선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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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 소금의 바른 존재감 드러내기.


김진수 (Jinsoo Kim) 저, '선한 영향력'을 읽고.


책을 덮고 조용히 내 가슴을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소금인가? 맛을 잃진 않았는가? 아니면 너무 강한 맛을 내어 음식 맛을 버리고 있진 않는가?”


책 중간 즈음에 소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알던 얘기지만 선한 영향력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읽었을 때 새롭게 다가왔다. 때론 몰랐던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던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추출해낼 때 갑절의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번이 그랬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음식은 맛을 내지 못한다. 반대로 소금이 강한 맛을 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싱거워도 짜도 음식은 제 맛을 낼 수 없다. 소금은 음식이 필요로 하는 만큼 적당히 들어가 음식 고유의 맛을 살려야 한다. 소금의 존재감은 음식에서 소금 맛을 내게 될 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소금 자체의 맛은 사라지고, 음식에 스며들어 음식과 하나가 되어 음식 본연의 맛을 내도록 도와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늘 소금은 음식 옆에 있으면서 음식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쓰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선한 영향력'의 실체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외딴 산 속이 아닌 세상 가운데 존재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어두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빛이 필요하고, 음식이 부패하지 않고 제 맛을 내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현실에서의 빛과 소금들은 너무나도 다르다.


어두움과 함께 있어야 할 많은 빛들은 이미 자칭 빛들로 가득한 조명상사 안에 바글대고 있다. 빛들끼리의 교류에만 머물며,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적인 안위만을 간구한다. 어두움을 이기기 위해 갑이 되어 다스리고자 한다. 어두움은 빛이 피해야 할 대상이자 빛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오인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어두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빛은 빛끼리 있다가 소멸된다. 선한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금은 어떠한가. 소금을 자처하여 썩어가는 음식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많은 경우 정체성이나 사명을 잃어버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반면, 음식 맛이 소금 맛이 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어 선전하기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두 경우 모두 소금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된다.


자신이 소금임을 아는 정체성 인식, 음식을 부패하지 않고 제 맛을 내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명 인식, 이 두 가지를 모두 했다고 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럴싸한 이론적인 구호만으론 어림도 없다. 현실은 소금으로 하여금 음식 옆에 대기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필요할 때 언제든 음식에 뿌려지도록, 그래서 소금 맛은 사라져도 음식 맛이 살아날 수 있도록 요구한다.


선교지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과 현지 상황과는 별 상관없이 마치 '따로국밥'처럼 섬으로 홀로 거룩하게 존재하거나, 현지인과 현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온 진공 속 프로그램으로 선교를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안타까운 이 두 경우 모두 소금이 음식에 제대로 녹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실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음식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곁에서만 고결하게 서성이고 있는 경우가 되겠고, 후자는 음식 맛을 소금 맛으로 만들어버린 원맨쇼의 경우가 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소금은 소금으로 존재할 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소금은 음식에 스며들어 음식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소금은 음식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금의 숙명이자 존재감의 발현이다. 스며드는 것, 바로 선한 영향력의 시작이다.


저자인 김진수 장로는 자신을 선교사 모자를 쓰지 않은 선교사라고 말한다. 그는 신학교 배경이 없을 뿐더러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해당되는 후원 교회도 없고 파송되지도 않았다. 그는 캐나다 서부에 위치한 인디안 원주민들을 위하여 소금이 되기로 한 귀한 평신도 선교사다.


후원 교회나 후원금이 없이도 선교가 지속되는 이유는 그가 자비로 시작한 비지니스 덕분이다. 그는 이미 창업에 성공해본 유경험자다. 실수나 실패를 포함한 과거의 모든 점들이 이어져 하나의 선이 만들어지는 기적을 맛보고 있는 자이며, 그 과정 자체가 곧 선교라고 믿는 자다. 그 선들은 머지않아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말하는 비지니스 선교는 ‘선교로써의 비지니스 (BAM: business as mission)’이다. 기존에 있던 ‘선교를 위한 비지니스 (BFM: business for mission)’가 아니다. 둘은 큰 차이가 있다. BFM의 경우, 비지니스는 선교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 비지니스에서 얻어낸 결과물, 즉 물질적인 열매가 선교를 위해 쓰여지는 구조다. BAM에서는 비지니스의 결과 뿐 아니라 모든 시작과 과정 자체가 선교다. 소금으로 비유를 하자면, BFM은 소금이 들어가 만들어낸 음식으로 얻은 수입으로 선교를 하는 것이고, BAM의 경우는 소금이 음식 옆에 내팽겨치지 않고 음식의 신뢰를 얻으며 대기할 수 있게 되는 과정부터 서서히 음식에 스며들어가는 과정 모두가 선교와 동격이 된다.


언젠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묵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한 과정이 곧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메시지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궈낸 어떤 큰 성과가 필요하신 분도 아닐 뿐더러 그런 것들보단 우리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더 큰 관심이 있으시다고 믿는다. 우리의 목적 성취도 그분에게는 동일한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사는 삶은 어떤 특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되는 이유도 된다.


나도 소금으로써 녹아들고 스며들길 원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정직하게 신뢰를 얻으며 음식을 위해 기꺼이 쓰임받는 하나의 소금이 되길 원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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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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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프랜시스 S. 콜린스 저, '신의 언어'를 읽고.


군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나는 그 해 제대를 했다. 2000년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었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진 놀라운 해였다. 세계적으로 10년이 넘게 투자된 Human Genome Project가 완성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 해엔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전체 약 30억 개 길이의 인간 유전체 서열이 모두 밝혀졌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공개되었다. 우리 몸의 설계도 초안이라 할 수 있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 지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유명해진 제임스 왓슨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Human Genome Project를 끝까지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2000년 6월 백악관에서 열렸던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성을 축하하며 선포하는 감격적인 자리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옆에 서있던 사람의 이름은 프랜시스 S. 콜린스였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전문 과학도서도 아니고 신학도서도 아니며 자서전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솔한 목소리가 곳곳에 잘 침투되어있어 이 모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Human Genome Project를 이끈 과학자로서,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를 거쳐 나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아내며 유신론적 진화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과학과 신앙 사이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고 답을 해온 선배로서의 프랜시스 콜린스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논리정연하면서도 진정성이 여과없이 드러난 필체는 덤이다.


생물학자인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이 분야를 앞서간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호소력이 있었다. 진지하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모두를 포함해서, 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그의 진솔한 내러티브는 분명 하나의 빛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어두웠던 부분을 밝혀줄 것이다.


그가 이끈 프로젝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낸 것은 인간의 모든 염색체의 뼈대가 되는 DNA의 염기서열이다. 그는 이를 감히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관여하여 어렵사리 밝혀낸 그 암호와도 같은 염기서열은 분명 현대과학과 지성이 일궈낸 쾌거일진데, 그 프로젝트 리더가 자신의 입으로 그 암호를 ‘과학의 언어’가 아닌, 종교적 색채가 단박에 드러나는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린 과학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제목만 곰곰히 씹어봐도 우린 그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잡음없이 공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서로를 강화시키고 성숙시키며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생물학적 진화를 정의할 때 필수요소인 DNA 변화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진화를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진화의 정교한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신의 창조방법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다. ‘유신론적 진화’라는 말이 주는 불완전한 뉘앙스 때문에 책에서 ‘바이오로고스’라 칭하자고 제안까지 하는 그의 관점을, 나도 한 명의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만 하면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여기거나, 진화나 과학을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말해주고 싶다. 과학과 신앙은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으며, 그 유쾌한 공존이야말로 원래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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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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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된 아름다움을 만나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때묻지 않고 홀로 빛나는 원석이 카프카라면, 손이 많이 가는 정제과정을 거쳐 마침내 간결함과 고유함의 옷을 입은 보석은 하루키다. 함부로 던져진 것 같은 무례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성실하고 고운 정성이 자리잡았다. 정갈하고도 완숙한 글을 만났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를 만난 건 행운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갈한 책을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죽음’이다. 죽음은 곧 상실, 이 책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죽음은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흠뻑 적시고 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와 직간접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놓인 소수의 등장인물 중 절반이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다.


고등학생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자살은 이 책에 등장하는 첫 죽음이다. 이 죽음은 이 책을 구성하는 중심 이야기의 발단 역할을 하며, 이 책의 마지막 죽음인 나오코의 자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그 사이에 소개되는 죽음도 넷이나 된다. 먼저 과거에 있었던 나오코 언니의 자살, 역시 과거에 있었던 미도리 어머니의 병사, 그리고 와타나베가 직접 만나기도 했던 미도리 아버지의 병사,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의 학교 선배 나가사와의 애인이었던 하츠미의 자살이 그것이다. 죽음을 육체적 의미만이 아닌 정신적 상실의 관점에서 본다면, 와타나베의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특공대의 갑작스런 사라짐까지도 이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이 책은 하나하나의 의미있는 죽음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며 살아남은 자였다.


소개된 죽음의 절반 이상이 자살이라는 점은 나를 슬프게 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원인을 불문하고 비극이다. 하루키 역시 기즈키나 나오코, 나오코의 언니, 그리고 하츠미의 자살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와타나베라는 남자 주인공의 눈으로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상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자살을 포함한 죽음, 죽음을 포함한 상실은 우리 삶의 끝이 아닌 삶의 현재에서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겠지만, 역시 죽음과 함께 현재 숨쉬고 있는 존재다. 죽음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으며, 또 우리 바로 곁에 있다. 상실의 아픔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Loss is all around.


상실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상실은 어느덧 높아졌던 인간의 자의식을 낮아지게 만드는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다. 또한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직시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겸허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특급 도우미이기도 하다. 우린 상실로 인하여 같아진다. 상실은 인간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도구로 역할한다.


비록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죽음으로 커다란 상실을 경험했지만, 하루키는 그에게서 자살의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오히려 자살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 (기즈키, 나오코, 하츠미)에게 힘이 되었던 존재였으며, 곧 암으로 죽을 상황에 처했던 사람 (미도리의 아버지)에게까지도 편하고 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의 이미지가 아닌 삶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루키는 와타나베의 이미지를 죽음이 아닌 삶으로 부여함으로써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일종의 희망을 보여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와타나베의 몸과 마음을 몇 년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나오코의 죽음은 어찌보면 그에게 부여된 상실의 시대를 지나 꿋꿋하게 생생한 일상을 살아내가는 미도리와의 관계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버젓이 존재하듯이 삶 또한 그렇다. 죽음과 삶은 시작과 끝이 아닌, 공존하며 다른 두 개의 존재일 뿐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과 삶의 복잡한 혼합물일지도 모르겠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그런 존재였다. 나오코가 죽음이었다면 미도리는 삶이었다. 둘은 함께 존재했으며 서로를 알았다. 그 둘 사이에 있던 와타나베는 먼저 간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옆에 와있던 삶에 안착한 것이었다. 그렇다. 이 책은 나오코로 시작하여 미도리로 끝을 맺는다. 상실의 시대에서도 삶은 끈질기게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지만 지나가버리는 죽음을 먼저 보내고 우리를 살아남게 해주는 것이다. Life is all around.


책을 다 읽고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찾아 들었다. 정제된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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