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완 윌리엄스 대표작 세트 - 전2권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제자가 된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로완 윌리엄스 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읽고.

 

진리처럼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있던 자리가 치우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언젠간 그 시간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닫혀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꾹 잠겨있던 녹슨 눈과 거미줄 쳐진 귀가 마침내 열리는 순간, 누군가에겐 자신이 쌓고 지켜왔던 성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인생의 극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기꺼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한동안 놓고 있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삶을 재조정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생 때 교회를 잠시 떠나기까지 다녔던 여러 교회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였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던 기독교에 관한 모든 정보는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교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게는 오직 그곳에서 배워 처음 알게 되었던 지식이 기독교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전부였다.

 

불행하게도, 별 문제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공부 잘하는 인간이 교회에 결석하지 않고 출석하며, 질문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기까지 하면, 백이면 백 신앙 좋다는 소리 듣는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리라는 데에 오백원 건다). 그러나 내게도 어느 날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그 일련의 과정이 처음엔 인생의 극소점을 넘어 최소점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가 아닌 기회이자 발판으로 재해석되어지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내 삶의 키를 재조정하는 기억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때였다. 내가 알고 믿었던 것들이 가졌던 찬란한 유일성과 엄숙한 절대성이 깨어지게 된 건. 메커니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위치한 지점이 가운데가 아니라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 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기독교 관련 지식들이 하나의 해석이나 주장에 불과한 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주 작아졌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교파가 기독교라는 지붕 아래 존재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공회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라고 이해하면 성공회를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내가 읽었던 신학책의 꽤 많은 저자들이 성공회 배경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번에 처음 접한 로완 윌리엄스 또한 성공회 소속 신학자이다. 그는 천 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성 안셀무스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도자라는 평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을 가진 아주 짧지만 묵직한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할 가장 핵심 요소 네 가지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자상한 선생님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주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례와 성경, 성찬례와 기도, 이 네 가지에 관한 지식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배워왔던 기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전부가 아니었고, 상당히 편향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신학적인 요소들이 매일 접하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 거룩한 백성의 참 의미가 결코 어떤 위력을 행사하며 겉으로 드러난 집단이나, 저기 산 속에 따로 존재하는 은둔형 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죄악과 혼돈이 가득하고 여전히 유혹이 넘쳐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그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요, 그 세상과 똑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세상 속에 존재하되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 연약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나도 용기 내어 몸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 세상 속에 존재하는 죄악과 혼돈을 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맞서는 것, 그 삶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임하길 간구하는 것, 그러나 위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도움을 구하여 우리가 쓰여지는 것, 예언자적인 사명으로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상하좌우의 모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를 놓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더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고, 예전엔 몰랐던 많은 숨겨진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간다. 성공회 대주교의 글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 또한 만남의 축복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상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세상엔 정말 탐험할 것이 많아 교만해진다는 건 곧 옹색함이요 게으름이며, 용기 없음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성공회 교회를 찾아 예배에 직접 참석해봐야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4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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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지음, 김유리 옮김 / IVP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공동체라 외롭지 않을 순례자의 여정.

유진 피터슨 저, '한 길 가는 순례자'를 읽고.

'지금, 여기'를 누리는 종말론적 신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삶의 자세다. 결코 일회성 쾌락을 추구하는 관광객들의 그것이 아니다. 비록 종말론적 신앙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그 의미는, 과거로부터의 맥락이나 미래를 향한 소망도 없이 그저 오늘을 말초적으로 즐기자는 한탕주의와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오늘은 어제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왕이신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오시어 완전한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내일을 소망하는 간절한 현재다. 제자 된 그리스도인의 순례 여정에는 관광객들에게는 없는 목적지가 있다. 평생의 여정이 한 곳, 즉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다.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이것은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쓴 동기가 된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서 인용한 문구다. 마치 관광객의 구미에 맞는 상품처럼 짜맞춰지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의 실태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그 종교 안에서 목적도 순종도 없이 즉흥적인 입맛만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현대판 그리스도인을 비판하면서, 제자와 순례자의 정체성을 띠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자세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다. 첫 장에서부터 그는 예수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따끔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관광객의 자세로는 성숙할 수 없다."

이 책은 시편 120 - 134편, 흔히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라고 알려진 15편의 시편 본문을 골자로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깊은 기도 생활 없이는 결코 길고 긴 순종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과, 소개하는 15편의 시편 본문이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장기간에 걸쳐 그들의 모든 삶을 기도로 옮기고 또 그들이 기도한 그대로 살기를 배울 수 있는 주요 방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또한,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로 살기로 다짐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안내서와 지도로서의 실용성뿐 아니라, 여행 노래로서의 흥겨움까지도 겸비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우리들이 이 15편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로 다시 기도하길 권고한다. 

제자도를 다시 짚어주면서 시작한 이 책은 15편의 시편 본문에 각각 의미를 부여하며 한 편 한 편 묵상해 나간다. 15편에 해당되는 15개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각 장의 제목이다). 회개, 섭리, 예배, 섬김, 도움, 안전, 기쁨, 일, 행복, 인내, 소망, 겸손, 순종, 공동체, 송축. 이 단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한 길 가는 순례자의 여정에 있어 필수 코스 같은 인상을 준다. 회개로 시작하여 송축으로 끝나는 여정, 곧 예수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의 인생이 아닐까. 비록 이 15편은 히브리 순례자들이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순서대로 불렀던 노래로 보이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충분히 이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인생 전체로 확장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15개의 키워드 중에서 내게 가장 와 닿아 새롭게 깨달아진 단어는 '공동체'였다. 사적인 복음의 한계와 그 폐단을 절실히 알게 된 이후 복음의 공공성을 향한 나의 생각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었다. 이는 곧 하나님나라의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에 대한 이해와,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윤리적인 측면에서 따져보게끔 만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분히 공동체적이지 못했다. 기독교에서 공동체가 가지는 의미를 모르지도 않았음에도, 나의 질문은 늘 개인의 윤리적 삶과 이웃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사랑의 실천 등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나는 언제나 홀로 고립되어 외로워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아마도 기존 장로교가 주축이 된 한인 교회 시스템 안에서 겪은 갈등과 상처가 한 몫을 톡톡히 담당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지만, 공동체와는 유리된 듯한, 이 모순적인 나의 삶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윤곽을 보다 명징하게 드러냈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결코 사적이고 비밀스런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또한, "성경은 고립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공동체의 일원이다. 창조는 공동체가 생기고 나서야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고립된 개인들과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일하신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존재로 볼 때, 우리가 주고받는 관계는 훨씬 깊어질 것이다."

왜 난 하나님을 향한 여정, 곧 순례자의 길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홀로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왜 난 나도 모르게 고독한 철학자나 구도자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홀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여겨왔던 것일까. 분명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봐도, 신약의 초대교회를 들여다 봐도, 모두 혼자가 아닌 공동체가 존재했고, 하나님은 늘 그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셨는데도 말이다. 

물론 일대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인의 삶에서 체험하는 것과, 그 체험과 어제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약속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례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해내는 것, 그리고 본인의 삶에서 세상의 삶과 예수의 삶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믿음과 결단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공동체의 뒷받침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언제나 함께 떠올려야 한다. 혼자서는 넘어질 수 있다. 낙망할 수 있다.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이 증폭된다. 먼 길을 갈 때 혼자 운전하는 것과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운전하는 것의 차이와도 같다. 약한 개인이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견고해질 수 있다. 서로를 향한 의지, 이는 곧 신뢰에서 오며, 그 신뢰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전환되는 경험이다. 또한 순례의 여정을 지속할 때 닥쳐올 어려움을 서로를 의지하며 이겨낼 때 우리는 공동체의 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웃사랑이 하나님사랑과 다르지 않은 이유다.

한 길 가는 순례자. 처음에는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독한 길처럼 여겨져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가는 길이라 생각을 확장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길 가는 순례자는 단수이자 복수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도 있고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도 있는 것이다. 후자를 좀 더 생각하게 되니 참 힘이 된다. 유진 피터슨이 바랐던 것처럼 내 삶 속에서도 복음이 살아 있기를 소원한다. 깨어있는 순례자, 그리고 그 순례자들의 공동체. 구약의 히브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먼 길을 떠나는 그 길을 상상해본다. 거기에는 개인이자 공동체인 그리스도인이 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3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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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유진 피터슨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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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묵시와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다.


유진 피터슨 저,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을 읽고.


때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운 압축성과 설명할 수 없는 깊음이 진득하게 글에 배어있어,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생각의 묵직한 파편들을 그대로 떠안은 채 그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한 챕터 한 챕터를 천천히 읽어오면서 느꼈던 감동과 깨달음이 여전히 범람하여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만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유진 피터슨이라는 신뢰할만한 눈을 통해 다시 느껴볼 수 있었다. 비록 아직까진 요한계시록에 대해 내게 먼저 들어간 잘못된 편견과 착각들이 바른 이해보다 내 안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 책은 내게 그것들을 무력화시키고 해방시켜주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해주었다. 마침내 드러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함께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귀결되는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기로 마음을 다잡는 하나의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유진 피터슨은 요한계시록이 우리를 각성시켜주는 힘을 가진다고 말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라 상상력을 소생시키고자 읽는 책이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의 묵시는 시인의 언어를 구사하여 오래되어서 무뎌진 진리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어 진리를 진리답게 우리에게 다시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새롭게 깨어있도록 도와준다.


이 책은 요한계시록의 강해가 아닌 저자의 묵상이자 강의록이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이 무슨 내용인지 조목조목 풀어주는 방식이 아닌, 요한계시록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일상의 구체적인 언어를 통하여 풀어주는 방식을 취한다. 요한계시록 본문의 순서를 따라가되, 그 본문들이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해석하여준다. 유진 피터슨은 현실에 기꺼이 몸담고 있으면서 현실을 품고 현실을 리드하는 영성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사도 요한을 신학자이자 시인이자 목회자로 해석하여 소개하는 대목에서 나는 동일한 해석을 유진 피터슨에게도 적용되어야 함을 간파했다. 그 역시 하나님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진지하게 연구하는 신학자이고, 철학자의 조심성과 도덕주의자의 진지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호탕함과 대담성을 겸비하여 능숙하고 정확하게 상상의 언어를 사용하기에 부족함 없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시인이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이 모든 삶의 중심이 된다는 확신을 품고 성심껏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과 기쁘게 대화하는 목회자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통해, 내게는 무겁고 무섭기도 했던 요한의 묵시가 내가 속한 현실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여지는 것을 감사하게 즐길 수 있었다.


여러 챕터에 걸쳐 계속해서 강조되어지는 단어 중 하나는 '예배'였다.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몰입하는 행위이자, 우리의 방향을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립하게 해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중심적 행위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현실을 등한시하고 영과 육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세계에서의 예배는 인간의 사적인 유익처와 도피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예배를 비활동적이며 세상사에 비추어 볼 때 부조리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예배를 그만두고 세상에 무언가 즉각적인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예배를 그만두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 인간이 행하는 일로 초점을 바꾸어 예배를 변질시키는 사람들 역시 삶의 방향을 잃었다는 측면에선 마찬가지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삶이 예배라는 말을 오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을 소멸해서도 안되며, 예배가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말 뒤에 숨어 은밀히 영지주의적인 안위만을 구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셨듯 거룩하도록 일상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일 것이다.


또한 원제목, 'Reversed thunder (역전된 천둥: 기도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 일어났던, 요한계시록 8장에 기록된, 하늘의 침묵의 이미지가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말을 경청하시는 하나님이 언제나 동일하신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경이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시고 들으시고 직접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행동과 말이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존엄성을 얻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 창조주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믿는다. 온 맘 다해 찬양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Revelation 1:8)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5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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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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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J. D. 밴스 저,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공감할 수 있다. 크든 작든 공통된 경험이 없다면, 상호 간의 소통은 어렵기 마련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으로라도 독자가 저자를 공감하지 못하면, 독서 자체는 노동이 되어 버리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특히 그 책이 회고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감 없이 끝까지 읽어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을 읽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한 백인 남성의 인생을 공감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긴 하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짧은 시간 끝까지 읽어내도록 만들었을까?


내게 있어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근교다. 쉐이커 하이츠라는 도시에서 입주자의 약 90퍼센트가 흑인으로 구성되었던 한 오래된 아파트에서 3년 반을 살았다.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국에 남아 바로 옆에 위치한 인디애나주에서도 1년 반을 살았다. 의도치 않게 나의 7년의 미국 생활 중 5년을 소위 미드웨스트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살게 되었던 셈이다. 힐빌리의 애환을 담은 이 책이 외국인이자 아시안인 내게 많이 공감되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백인이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흑인들이 메우고 있었다. 히스패닉이나 나와 같은 아시안은 드물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과 켄터키주 잭슨은 내가 5년간 살았던 곳과 불과 차로 두세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특히 저자가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미들타운의 분위기는, 실제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로선 머리 속으로 그려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같은 러스트 벨트에 속한 지역에 살면서 수 차례 차로 오가며 그곳들의 냄새와 분위기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20세기말, 과거엔 미국의 대표적 공업 지대로 번영을 누렸지만,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몰락한 지역을 러스트 벨트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인적이 드물고 폐허들이 산재해있는 지역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느꼈던 그 특유의 적막함과 암울함을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 지역에서 주유소에 들려야 할 때면 난 잔뜩 긴장을 하곤 했었다. 눈이 풀린듯한 사람들이 흑백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 있었는데, 그들이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되었을 거라는 나의 직감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빈곤과 약물 중독이 다반사인 곳이었다.


J. D. 밴스는 힐빌리다. 힐빌리는 러스트 벨트에 살며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의 북동부 지역부터 중서부 지역까지 관통하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특히 중서부 지역에 집중되어있다. 이를테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오하이오와 켄터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인디애나가 이에 속한다. 저자는 힐빌리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전형적인 힐빌리로 살았지만, 대부분의 힐빌리들이 밟는 전처를 밟지 않고, 오히려 그 저주의 사슬을 끊고 나온 몇 안 되는 힐빌리 중 하나다. 1984년생인 그는 이제 자신이 힐빌리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그 가운데서도 존재했던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운명적인 여러 만남들의 도움으로, 수재들도 들어가기 힘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해냈고, 중산층 이상의 부류에 속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수직 신분상승을 기적적으로 이뤄낸 경우인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을 '더럽게 운 좋은 개자식'이라고 표현한다. 힐빌리다운 걸걸함이 단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대부분은 저자의 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과 때론 지겹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아마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감동을 주는 부분도 많다. 저자의 경험과 식견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힐빌리들의 삶은 소외되고 고립되어 마치 저주의 쇠사슬로 스스로가 꽁꽁 묶어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가난이 실제로 대물림되고 있었고, 약물 중독과 폭력, 불륜, 가정 파탄, 그리고 저학력 역시 마치 그들의 전통인 양 자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거나 오히려 더 증폭되고 있었다. 스캇 펙은 아마도 이러한 저주의 고리에서부터 악을 진단해낼지도 모른다. 저자도 간파하고 있듯이, 힐빌리들의 그러한 삶은 정부의 문제도 사회 시스템의 문제도 아니었다. 주된 원인은 그들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그들 내부에 있는 듯했다.


저자 역시 어린 시절 충분히 불행했다. 굳이 조부모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그의 엄마는 간호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재능이 있었으나, 허구한 날 남자를 바꾸었고 마약에 중독되어 폭력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일으켜 범죄기록이 많은 여자였다. 저자는 이 때문에 자신의 라스트 네임에서 혼란을 느꼈고, 실제로 엄마에게서 살인을 당할 뻔한 위기도 모면했던 적이 있다.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힐빌리들의 많은 가정이 부모 둘 중 하나는 약물 중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고, 불륜과 폭력, 가정 파탄이 그들의 일상처럼 되어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어린 시절의 삶이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갇힌 세상 속에서 그들은 국가와 정부를 탓했고, 사회 시스템을 탓했다. 누군가의 경제적 도움이 주어지면 그 돈으로 마약이나 알코올을 구입하는 데 탕진했다. 아이들은 버림받은 거나 다름 없었고, 한 부모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한 힐빌리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구조적 모순 속에서 여전히 하층민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자신의 가정이 여느 힐빌리 가정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비록 엄마가 마약 중독이었지만, 외할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그에게 그나마 안정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었으며, 친 누나의 엄마 역할과 이모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 우물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해병대 지원과 제대로 삶의 규모를 배우게 되었고, 오하이오 주립대를 우등생으로 단기간에 졸업하면서 점점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장악해 나가게 되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 졸업하면서 운명적인 멘토와의 만남과 평생 반려자와의 만남으로 완전히 힐빌리의 저주의 쇠사슬을 끊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는 상류층 사회에 속해있지만, 여전히 힐빌리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어릴 적 각인되었던 힐빌리들의 결코 좋지 않은 문화가 가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힐빌리와는 정반대의 문화 속에서 자라난 아내와 그 가정 덕분에 그는 점점 치유되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방인인 내 안에도 힐빌리가 살고 있음을 느낀다. 화통 삶아먹은 듯 소리칠 때나, 내게 불이익을 준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나, 괜한 자존심에 주위의 시선을 왜곡하여 내 안에 갇혀 웃음을 지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힐빌리의 피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공감하며 읽어내려간 주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그를 규정지을 수 없길 개인적으로 바란다. 그래서 그의 개척이 힐빌리들에게 메시지가 되어 그들에게 각인된 저주의 DNA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방인인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을 힐빌리도 깨끗이 치유되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57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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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경계에 서서.


J. D. 샐린저 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책 제목의 의미를 처음으로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은, 주인공 ‘홀든’이 여동생 ‘피비’에게 선물할 레코드 음반을 사기 위해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걸어가고 있을 무렵 들려온 한 꼬마의 노래에서다. 그 꼬마는 “호밀밭을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을 부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지나가는 차들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관통했고, 그 꼬마 부모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홀든의 귀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잠입한 자기 집에서 피비를 깨워 얘기를 나누던 중, 좋아하는 한 가지만 말해보라는 피비의 질문에 홀든이 머뭇거리다가 답한 장면에서 비로소 그 뜻은 명확해진다. 다분히 문학적이고 순수하며 이상적인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홀든은 이미 여러 차례 퇴학이나 자퇴로 고등학교를 그만 둔 이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펜시’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이번에도 퇴학을 당했다. 이 책은 퇴학이 결정된 후, 아직 부모에게 공식적으로 통보되기 전의 며칠 간, 홀든이 학교를 먼저 떠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방황 기간을 주로 다룬다. 홀든은 부모님이 공식적인 퇴학 통보를 받기 전, 그러니까 방학이 시작되기 전 집으로 들어간다면 받게 될 뻔한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홀든은 학교를 떠나 집이 있는 뉴욕으로 향한다. 호텔에서 머물며 그 시대 어른들이 하던 위선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미 직간접적으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아직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홀든은 어른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대우받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어른처럼 술을 시켜서 먹고 싶고, 담배도 당당하게 피고 싶고, 여자와 섹스도 하고 싶어하는, 즉 고등학생이면 의례히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될 욕구를 충족하길 원했던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홀든이 원하는대로 거의 이뤄지지도 않았지만, 홀든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 그 안에 흐르는 그의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여 보여지고 들려오는 어른들의 행동과 말들을 보며, 난 지금도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인 샐린저가 하필이면 평범하지 않은 한 고등학생의 눈으로 그 당시 미국 사회 (이 책의 출판은 1951년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를 바라보며, 때론 직설적이고 때론 냉소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미국을 그려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미국이 아닌 모든 기성세대에게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가식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제목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중간인,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으며, 어른들의 세계가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답습하려는 생존본능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 사이에 놓인 강을 아직 건너지 않은 한 청소년의 눈에 비쳐진 세계를 통해 샐린저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인 것이다. 이미 정립된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봤을 땐 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홀든은 기꺼이 사랑스런 여동생 피비와 같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한다. 호밀밭은 낭떠러지와 닿아 있다. 그 낭떠러지는 아마도 기성세대가 정립한, 마치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이나 퇴폐적인 술집과 호텔 같은, 세상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마구 뛰어놀기만 할 뿐, 그 어린아이의 세계가 낭떠러지와도 같은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아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중간인으로 나오는 주인공 홀든은 그 경계를 알고 있다. 강을 건너려고 시도도 해봤다 (홀든이 퇴학생으로 그려진 숨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홀든의 고백으로 보아선, 여느 청소년들이 가는 그 길을 가지 않고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남는 위대한 결단을 나중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공부도 잘 하고 잘난 학생들의 눈에는 자기애와 욕심에 눈이 멀어, 낭떠러지라는 실체가 그저 살아남고 밟고 일어서기 위하여 계속해서 올라가야 할 피라미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아주 평범하다고도 볼 수 있는 홀든의 눈에는, 오히려 두 세계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였고, 아이들의 세계가 가진 가치가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진 것이다. 인생을 바쳐 보호하고 싶을만큼.


나도 한 때 피비처럼 아이였고, 홀든처럼 중간인이었으며, 이젠 그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기성세대가 되었고, 피비와도 같은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일개 범인이다. 홀든과는 달리 난 경제적 배경이 전무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지만, 이렇다할 큰 어려움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물론 홀든을 통한 저자 샐린저의 관점이 녹아있는 책이겠지만, 난 홀든의 나이일 때 홀든이 했던 고민과 생각들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홀든보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세상과 사회에 대한, 기성세대에 대한 부조리와 위선에 대해서는 그리 큰 의문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다가온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사적인 복음만을 강조했고, 이는 나의 내면의 평안과 생존과 번영만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평안과 평화를 도모하는 세상이 허공에 뜬 이론이 되지 않기 위해선, 현재 내가 처한 좌표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고 적실하게 말이다. 이런 면에서 홀든은 나보다 훨신 나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미국 나이로 마흔 하나가 되어버린 나. 전체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나. 몇 년 전에서야 홀든이 가졌던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나.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전진한다. 의로운 세상을 위한 삶을 살기를 도전한다. 꺼져가는 등불이나 상한 갈대와도 같은 자이지만, 결코 꺼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바로 이런 세상이 샐린저가 홀든을 통해 꿈꿨던 세상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1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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